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62화 (162/375)

〈 162화 〉 베라스틴 #14

* * *

[162] 베라스틴 #14

“잠깐... 여기가 수로의 또 다른 입구라고요..?”

“그럴세.”

“하지만 이곳은...”

“그 마음 이해하네. 나도 처음엔 많이 놀랐었지.”

“....”

경악으로 벌어진 내 눈동자에는 번잡한 우물가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동쪽 거리에서 제일 번화한 장소.

나도 수없이 들린 곳이다. 베라스틴에서 하루하루 모험가 의뢰로 연명하던 시절만 해도 매일 식수를 구하러, 고된 노고로 쌓인 때를 벗기러 들르는 장소기도 하다.

지금이야 저택에 수도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굳이 번거롭게 물을 길으러 다닐 필요가 없지만, 과거 노숙하던 때는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곤 했으니.

“아으... 차가워...”

“...거기 새치기하지 마쇼..”

“어이쿠... 미안합네다. 누가 있는 줄 몰랐네그려.”

“....”

얼기설기 엮인 간이 칸막이에서는 하루의 일과를 씻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수다를 좋아하는 아낙네들은 바가지에 물을 길으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고,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가 으레 그렇듯 길게 늘어선 노점과 그에 따라붙는 구경꾼은 필연적이었다.

이전보다 다소 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붐비는 인파를 바라보며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 지하수로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요...?”

“그렇네, 아마 베라스틴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야. 올해로 환갑이 되는 내 선임 관리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이런 곳에 숨겨져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표현보다 이 상황에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단언컨대 시민 중 그 누구도 이 장소에 카타콤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없을 거다. 이교도에 가담했던 선조 같은 건 베라스틴의 역사에서 지워진 이야기니까.

그들로부터 이어진 후손이 이렇게 번창한 도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로브를 가다듬던 차, 아리엘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입구가 있다면 어떻게 들어가죠? 이렇게나 보는 눈이 많은데...”

“그러게... 이래서야 말짱 도루묵인데...”

그녀의 말마따나 이 정도로 인파가 붐벼선 도저히 잠입할 수가 없다. 도시의 명맥이 이어지는 한 우물가는 항상 북적거리기 마련이니까. 더군다나...

“.....”

창을 든 기사와 눈이 마주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이렇듯 이곳은 영주의 기사단이 온종일 지키고 있다. 모두가 이용하는 우물에 누군가가 수작이라도 부리면 큰일이니.

토드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괜찮네. 자네 혹시 옛사람들이 어떻게 우물을 팠는지 알고 있나?”

“음... 그야 삽으로 팠겠죠? 아니면 마법사를 고용했다던가...”

“방법을 묻는 게 아닐세. 무릇 만물에는 수명이 있기 마련이듯 우물도 예외는 아니야. 오랜 세월에 걸쳐 지하수를 다 쓰게 되면 새로운 구멍을 파야만 한다네. 그래, 수로로 통하는 옛 우물은 바로 근처에 있다네.”

“...그게 어디죠?”

그가 잠시 뜸을 들이며 웃고는 저 멀리 몸을 씻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칸막이를 눈짓했다.

“바로 저 샤워 부스라네. 저기 세 번째 가림막으로 들어가서 땅을 파 보게나. 지금은 흙으로 막아놨지만 조금만 파내면 나무판자가 나올 걸세. 그걸 들추기만 하면 곧바로 수직굴이 나오지. 옛적에 쓰던 우물이자 지하수로로 이어지는 통로 말일세.”

“그렇다면 의심받지 않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거죠? 이전 우물이 메말라서 다시 판 거라면 분명 멀찌감치...”

“깊이가 달라서 그렇다네. 자리는 같아도 높낮이에 따라 지하수에 유무가 결정되고도 하니 말이야. 그러니 밧줄과 든든한 조력자를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걸세. 여긴 좀 깊을 테니.”

“...어째서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그의 작달막한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우리를 도운 게 대외로 알려지면 큰 화를 면치 못할 수도 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영주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토드 또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지금까지의 대화로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을 터,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걸까?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 똑같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다. 다들 제 명줄은 소중한 법이니.

싸구려 잡철 투구 속, 새까만 두 눈동자를 빛내며 묻자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깐 이 늙은이와 어울려줄 수 있겠는가? 자네들에게 수로의 지도도 건네줄 겸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네.”

““.....””

*

토드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교외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목조 주택이었다.

­끼익...

“..아빠 왔다.”

“아빠!!”

“맛있는 거 사 왔어?!”

야트막한 짚섶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던 꼬마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직 세상의 때조차 묻지 않은 천진한 아이들. 개중에는 아직 두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젖먹이도 섞여 있다.

하지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오던 꼬마들은 낯선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제 아비 뒤로 숨으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왔다.

“아빠... 저 형아랑 누나는 누구야...?”

“...아주 멋진 모험가들이란다. 자, 호밀 빵을 사 왔으니 가서 동생들이랑 나눠 먹으렴.”

“와! 먹을 거다!!”

“나도 나도!!”

토드가 나뭇잎 봉투로 싼 빵을 건네자 꼬마들이 득달같이 팔을 뻗어왔다. 이내 썰물이 빠져나갈 때처럼 쏜살같이 문지방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그 기세에 잠시 멍하게 서 있자니, 토드가 우리를 돌아보며 씁쓸한 중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와 아리엘은 그를 따라 자그마한 마당을 가로질렀다. 겨울에 대비해 잔뜩 쌓아놓은 땔감과 두꺼운 천으로 덮어둔 닭장 또한 지나쳤다.

토드는 우리를 작은 별실로 안내했고, 벽난로에 불을 지펴 얼어붙은 손발을 녹였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구석에 쌓인 지푸라기와 만들다 만 소쿠리를 보고 있자니 얇은 벽 너머로부터는 노모의 기침과 갓난아이의 칭얼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랄까... 되게 목가적인 곳이네...”

“그러게...”

아리엘과 살짝 불편한 심정으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자니 드디어 토드가 양피지 꾸러미를 품에 안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네, 모친이 좀 편찮아서 말이야... 원래는 간단한 식사라도 내와야 하는 건데...”

“괘, 괜찮아요..! 금방 돌아갈 건데요 뭐...”

“네, 네...! 마침 토드 님과 만나기 전에 막 배를 채우고 나와서... 아,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사 온 게 있는데 좀 나눠드릴게요!”

아리엘이 배낭에서 과일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원래는 우리가 저녁 식사 이후 디저트로 먹으려고 산 물건이지만 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빈손으로 방문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토드는 꾸러미를 받아들더니 씁쓰름한 미소를 피어올리며 읊조렸다.

“...고맙네, 보다시피 요즘 형편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직장을 잃고 고정된 수입이 사라지니 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더군. 이건 사양하지 않고 받도록 하겠네. 만삭인 아내가 참 좋아할 걸세.”

“저... 혹시 저희가 또 도울 건...”

“마음만 받도록 하지. 저축해둔 돈이 있으니 이번 겨울은 무사히 날 수 있을 거야. 소일거리를 하면서 소소하게 벌고 있기도 하고.. 이런 시국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도 많이 힘들 테지...”

그가 구석에 놓인 볏짚을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저걸로 간단한 집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거겠지. 하지만 그 수익만으로는 이 식구들을 다 먹여 살리기 어려울 텐데...

“고맙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게 바로 그 지도일세.”

토드가 헛기침하더니 양피지 더미를 탁자 위에 늘여놓았다. 구석구석 좀먹고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양피는 빈말로도 좋은 상태라 말하기 어려웠지만, 그 위를 수놓은 복잡한 도면에서 외관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비범함이 엿보였다.

토드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으며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우리 가문 대대로 물려 온 지도일세. 이런 가업을 물려준 아비를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었어. 지하수로를 관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매일 썩어나가는 악취와 습기에 맞서 싸워야 했으니 말일세. 임신한 아내에게 병이 옮을까 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자식들을 만져 본 적도 없네.”

굳건하게 닫힌 그의 입꼬리에서는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감과 한 직업을 한평생 업으로 살아온 이의 진중함이 공존했다.

“그래, 그렇게 일생을 한탄하며 살았어. 하지만 막상 관리인 직에서 해임되고 나니 상심이 크더군. 싫어도 그곳은 내 청춘을 불태운 곳이었으니 말이야. 나는 수로의 관리인 직책을 맡으면서 번 봉급으로 지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고,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자식도 얻었네.”

해묵은 다갈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그가 오랜 숙원을 이야기하듯 내게 고했다.

“보다시피 난 베라스틴을 떠날 수 없는 몸이야. 낯선 타지에 가봤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을 굶길 수밖에 없겠지. 능력 없는 아비지만 내 그 꼴만은 못 보겠네. 그래서 난 자네를 믿어. 수많은 괴물을 해치우고 날 어둠 속에서 구원해준 자네를 말일세. 그러니 부탁하겠네...”

토드가 애타게 내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이 베라스틴을 악몽 속에서 끄집어 주게... 내 자네를 위해서, 내 아이와 아내의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네.. 설령 영주에게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

베라스틴에 닥친 이변을 해결해 달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아무리 도시에 언데드가 창궐했다고 한들 사람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대대로 이어진 집과 토지를 포기하고 다른 마을로 이주하기란 쉽지 않다. 등에 짊어진 게 많을수록 더더욱.

우물가에 몰려있던 인파 또한 그 방증.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주민이 모일 수 있었던 건, 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의 아픔을 덜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중년의 각오를 눈앞에 두고도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아저씨.”

줄곧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아온 나는, 적어도 나를 믿어준 상대에게는 모질지 못하다.

나는 고개 숙인 그를 일으켜주며 고했다.

언제나처럼 사나운 웃음을 피워올리며­

“잘 봐둬, 앞으로 굉장한 일을 벌일 테니까.”

작은 결심을 하나 세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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