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진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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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진입 #1
진심이 된 나는 조금 다르다.
뚜렷한 목표가 생긴 작금, 토드의 오두막에 방문하고 하루가 더 지난 시점. 나는 저택 거실에 늘여놓은 물자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아리엘, 은 무기를 좀 더 챙겨가야 할까?”
“괜찮아! 내가 축복을 걸어주면 쉽게 언데드를 물리칠 수 있어!”
“그래도 하나쯤은 더 있는 게 좋지 않아?”
“음... 언데드가 은에 약하다는 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얘기야.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위에 덧씌운 신성력 때문이거든. 순수한 은은 다른 재질보다 축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만 결국 누군가가 신성력을 걸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어.”
“그렇다면... 너무 많아도 곤란하겠네...”
“응, 그리고 나 혼자서 상시 축복을 걸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이만하면 충분해.”
아리엘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지금 그녀는 전투용으로 특별히 개량된 사제복을 입은 상태. 아가사 신전의 수녀답게 눈처럼 새하얀 색으로 물든 보호 장구가 돋보인다.
모험가 중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장비들이지만 마음만은 나도 못지않다. 그야...
“이제야 좀 진짜 모험가가 된 것 같네...”
고개를 숙여 내 옷차림을 둘러보자 번쩍거리는 각반이 강렬하게 존재감을 주장했다. 그 아래 두꺼운 가죽 재질의 부츠 끝자락에는 단단한 강철이 덧씌워져 있었고, 손등까지 덮은 건틀릿에선 둔중한 광택이 흘렀다.
모두 론디니움 대장간에서 새로 맞춘 장비. 이젠 더 이상 검 한 자루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은으로 도금되어 재탄생한 코볼트 단검과 바스타드 소드의 검집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내일 아침 모험가 길드에 들러서 카렌 씨한테도 말해놓자. 우리가 들어간 뒤에 다시 구멍을 메꿔줄 사람도 필요하니까.”
“그러게... 근데 나올 때는 어떡하게?”
“뭐... 그냥 부수고 나와야지. 별수 있나.”
“그래? 모두 잘 풀렸으면 좋겠다!”
“....넌 정말로 괜찮은 거야?”
남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부유하고 신자 수가 많기로 유명한 아가사 신전의 중간 지위급 사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와는 달리 전도유망한 인재다.
본인은 감추려는 모양이지만 좋은 집안 태생이 틀림없을뿐더러 용모도 무척 아름다우니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아리엘은 인망도 넓으니까.’
거친 일을 하는 모험가들이라면 자주 병상 신세를 지기 마련이다. 무릇 남성의 로망을 자극하는 아가사 신전의 사제 중에서도 생크림 케이크 위의 딸기처럼 눈에 띄는 그녀는 자주 화제의 대상으로 오르곤 했다.
하물며 치료원의 천사라느니 여신이라느니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으며 신성시될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녀석을 사지로 이끌고 있다.
가슴을 쿡쿡 찔러오는 죄책감에 고개를 내리깔았지만, 아리엘은 되려 화사한 미소로 내 불안을 불식시키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베라스틴의 시민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
“도란을 혼자 사지로 보낼 수는 없잖아? 그럼 또 무지막지하게 다쳐서 올 거 아냐. 언데드가 내 소중한 친..구를 헤치게 둘 순 없지!”
“아리엘...”
애잔하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사무쳤다.
진실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한 나와는 달리 언제나 당당한 그녀는 너무나도 눈부셔 보였기에.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묵직하게 옥죄여 오는 투구를 의식하며 탄식하자 의아해하는 시선이 전해져왔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기운찬 목소리를 자아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성대하게 차려 볼까! 같이 장 보러 갈래?”
“응! 좋아!”
장비를 도로 갈아입고 거실을 정리한 뒤, 아리엘과 함께 대충 로브를 덮어쓰고 시장 거리로 향했다.
그녀와 함께 나란히 길거리를 거닐자 어슴푸레한 베라스틴의 정경이 시야 양옆으로 펼쳐졌다. 붉은 황혼이 내리깔린 가도는 서정적인 분위기로 휘황하다. 머잖아 폭풍이 몰아치기라도 하는지 하늘 저편에선 먹구름이 다가왔고, 습기를 머금은 찬 공기는 목덜미를 적셨다.
옷깃을 여미며 암울한 기운이 묻어나오는 하얀 면면들을 지나치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푸줏간이 나왔다.
하지만 끈적거리는 가림천을 젖히고 들어서자 주인장이 의자에 앉은 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장사 안 해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아리엘이 미소를 흐리자 남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상품이 없어. 물건이 없으니 손님도 오질 않아.. 그나마 보관하고 있던 고기도 전부 썩어버렸고 간간이 들어오는 것도 죄다 상한 것밖에 없어...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제서야 어두컴컴한 정육점 내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건...”
널브러진 진열장과 부러진 목제 선반.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은 폭격을 맞은 지붕처럼 푹 꺼져버렸고,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엔 생겨난 지 얼마 안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얼룩이 산재해 있었다.
누가 보면 건달이 들쑤시고 가기라도 한 듯한 광경이지만 이 익숙한 냄새는...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도축한 고기가 저절로 살아 움직였어. 막 손님에게 내놓으려는 참인데... 시뻘건 살덩이를 꿈틀거리며 두 발로 바닥을 딛고...”
“....”
코를 삐뚤어 버릴 듯한 악취가 비강을 들쑤셨다. 언데드가 으레 내뿜는 부패한 오취. 그러고 보니 도시 안에서도 놈들이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앞으로 이런 일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날 거다.
“...고기를 찾고 있다면 저 반대편 매장에 가 봐. 난 이만 이곳을 뜰 테니까. 언데드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너희도 빨리 베라스틴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거야.”
“....”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쏴아아아아...
“결국... 비가 오네...”
“그러게...”
어느새 창밖에는 미약한 눈발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창문을 때리는 빗발에 커튼을 치고 넉넉하게 사 온 먹거리를 늘여놓자 넓게만 보였던 식탁이 가득 찼다. 내일 모래면 지하수로에 들어가야 할 터, 먹을 수 있을 때 잔뜩 먹어놔야 한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르니까.
보글거리는 냄비와 경쾌한 도마 소리, 음울한 분위기를 떨쳐내고자 애써 밝은 표정으로 고기를 손질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도란이 요리하는 거야?”
“그래... 혹시 요리하는 거 처음 봐?”
“...도란, 넌 가끔 날 너무 아가씨 취급한다니까. 혼자 살고 있는데 요리 정도야 당연히 할 줄 알지.”
“어? 넌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예전에 종종 그녀를 숙소까지 데려다줬으니 틀림없을 텐데...
본디 신성력이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혹한 고행과 끝없는 자기 수행을 거치고,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만이 발현할 수 있는 것이 신성력이다.
그런 연유로 아가사 사제들은 예외 없이 신전 부속 건물에서 합숙하며 도를 닦는 데 매진하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난 언니 오빠들이랑 조금 달라서... 기숙사는 맞지만 개인 숙소를 배정받았어! 나는 처음부터 신성력을 쓸 수 있었으니까 엄청 빡빡하게 일정에 맞출 필요가 없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신성력을 쓸 수 있다니...? 아무런 수행 없이?”
“응! 처음 깨달은 건 다섯 살 때였나? 정원에서 뛰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는데 빨리 나아서 다시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상처가 아물어 버렸어. 깜짝 놀라서 부모님이랑 신전에 찾아갔더니 내 몸 안에 아가사 신님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라.”
“아, 가호를 받았다고 했지...”
이 세계는 수많은 신이 실존하는 세계이니만큼 종종 은총을 선사받은 사람이 나타나곤 한다.
이럴 경우 해당 신이 관조하는 분야에 따라 판이한 권능을 발현할 수 있을뿐더러, 극히 드문 케이스긴 하지만 여러 신에게 동시에 간택을 받는 경우도 존재한다.
한때 말톤이 선보였던 경이로운 회복력처럼.
“...그래서 사제가 된 거야? 아가사 신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으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정식 사제가 아니야. 명예직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뭐?”
충격적인 발언에 입을 떡 벌리자 아리엘이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음... 난 신님에게 직접 축복을 받았잖아? 그런데 교회가 날 배척하면 신의 뜻에 반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굳이 고된 수행을 하지 않아도 같은 교단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거지.”
“그럼 치료원에서 일하고 있던 건...”
“그냥 취미생활이야! 내 능력으로 아픈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니 멋지잖아! 덕분에 도란이란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했고!”
“....”
자칫 넋을 놓고 봐버릴 것처럼 해맑은 미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 또한 병실 신세를 진 적이 있으니 알고 있다. 치료원에서 근무한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피와 고름이 난무하는 병동 속에서 숨 돌릴 틈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게 바로 그들이다.
심지어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아리엘은 불우한 이웃을 위해 꼬박꼬박 기부도 하고 있단다.
그에 더불어 교회에 헌금하고 나면 남는 봉급도 많지 않을 텐데...
“....”
달그락.
새삼 그녀가 내 또래라는 사실에 조금 위축되며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덜었다. 그렇게 은제 포크와 나이프를 멋들어진 원목 식탁 위에 세팅하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자니, 돌연 아리엘이 손뼉을 마주치며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이내 사뿐사뿐 지하 저장고에서 올라오는 그녀의 손에는 적색 액체가 남실거리는 유리병이 들려있었다.
손을 멈추고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리엘, 그거 술이야?”
“응! 원래는 중요한 날 먹으려고 내가... 아, 아니...! 이 집 주인이 아껴둔 건데,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 하지 않겠어?”
“...집주인이 마시려고 놔둔 건데 우리가 마시면 어떡하게.”
“으... 그게 그러니까... 괘, 괜찮을 거야! 우리는 베라스틴을 구하러 가는 거니까! ....어쩌면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오늘 하루쯤은... 안 될까?”
“....”
그러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잖아.
늦은 시각, 연인을 놔두고 다른 여자와 단둘이 술을 마신다는 대목에서 양심이 적잖게 찔려왔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이게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날 돕기 위해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주는 사람을 내칠 정도로 나는 매정하지 못하다.
“...그래, 알았어. 앞으로 한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테니까. 너무 과음만 안 하면...”
“조, 좋아...! 잠깐만 기다려! 잔이 어디 있더라...”
아리엘이 순간 기쁨의 탄성을 흘리더니 입가를 헤실거리며 투명한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대체 왜.’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나는 변변찮은 보답 한 번 해준 적 없는데...
그녀가 적색 액체가 남실거리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럼... 나와 도란의 무사 귀환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막 잔을 마주치려는 참이었다.
딸랑.. 딸랑...
“어...?”
“종소리..? 혹시 카렌 씨도 여기 알고 있었어?”
“어, 몇 번 놀러 왔었거든. 근데 카렌이 이런 시간에 찾아올 리가 없는데...”
세찬 빗소리 너머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를 위해 저택 정문에 걸어둔 초인종이 틀림없다. 일정한 리듬으로 울려 퍼지는 거로 보아 바람이 장난치는 것일 리도 없는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나가볼까?”
“아냐, 도란은 먼저 먹고 있어. 내가 다녀올게.”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뭐야, 도란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괜찮아! 내 몸 하나 정돈 건사할 수 있으니까!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소리 지를게.”
“...그래.”
아리엘은 투구 아래로 드러난 내 볼을 꾸욱 잡아당기며 곰살궂게 웃어 보이고는 우비를 덮어쓰며 걸어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뿐.
참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여자다.
먼저 식사하라곤 했지만 정말로 혼자서 숟가락을 들 수도 없는 노릇.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현현한 광채를 자아내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현관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들이찼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마중을 나서자...
“어... 도란, 너를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나를...?”
현관에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매만지는 아리엘과 그 뒤에 서서 비에 흠뻑 젖은...
“라, 라디?!!!”
포도주 빛깔 후드 아래, 짙은 푸른색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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