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64화 (164/375)

〈 164화 〉 진입 #2

* * *

[163] 진입 #2

“라, 라디야?!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

피처럼 붉은 후드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짙푸른 눈동자. 젖어서 들러붙은 잿빛 머리칼 사이로는 다람쥐를 빼닮은 세 줄무늬 문양이 엿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라디는 제 덩치의 두 배는 될 법한 배낭을 등에 지고 있었고, 거센 폭우 탓에 쫄딱 젖어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이보다 더 정겨울 순 없겠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나쁘다. 그야...

“....마을에 도착했더니 베라스틴이 쑥대밭이라잖아요... 도란님이 걱정돼서 다 때려치우고 바로 달려왔죠. 그런데...”

라디가 내 어깨너머를 흘겨봤다. 온갖 진미가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과 고급 와인이 찰랑거리는 글라스를.

녀석이 피로감을 지우지 못하는 눈매로 날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람?”

“아, 아니!! 그럴 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다. 이런 늦은 시각에 다 큰 남녀가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인다? 백번 양보한다고 한들 이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자택에서 단둘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웃이다.

지나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전부 같은 대답일 터. 하물며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라디의 심정은 어떠할까.

참담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자니 녀석이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저번 일도 그렇고 도란님한테 바람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로부터 겨우 이 주일도 안 지났는데.”

너무 빠르다는 생각 안 들어요?

“아, 아니...!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치, 친구!! 얘랑은 그냥 예전부터 알던 친구 사이라...”

“...그럼 저건 뭔데요.”

라디가 싸늘한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인 와인병을 눈짓했다.

“저 보라색 상표, 카베르나산 포도주잖아요. 비싼 건 몇십 파운드도 호가하고 가장 저렴한 것도 2골드는 족히 넘는 건데... 단순한 친구 사이에 저렇게 귀한 걸?”

“....!!”

황급히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머리칼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나와 라디를 살피고 있을 뿐이다.

제기랄! 저게 그렇게나 비싼 물건이었을 줄이야...!!

“거, 거기엔 다 사정이...”

“...그래요? 그럼 그렇다 치고... 이 언니는 왜 사제복을 입고 계시는데요? ...설마 그런 취향이었어요? 코스프레라던가...”

“그, 그런 거 아냐!! 그, 그거야...! 조금 전에 장비를 점검했었거든!! 그때 이후로 안 갈아입어서 그런 거야! 이쪽은 아리엘이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던 은인인데 무려 아가사 신전의 사제...”

“...아가사 신전의 사제가 이렇게 고급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고요? 게다가 그렇게나 부자인 데다가 얼굴도 이렇게 이쁜데 도란님하고 아는 사이라... 흠... 설마 같이 잤어요?”

“다, 다른 방에서 잤어!!”

“그럼 이 저택에서 같이 잔 건 맞다는 소리네요.”

“.....”

위장이 베베 꼬인다.

우째 이런 일이...

착잡하게 옷깃을 매만졌다. 라디는 감정보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녀석이니 차근차근 사건의 경위를 설명한다면 결국엔 이해해 줄 거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지 않은가?

내가 걱정돼서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달려왔다는데 막상 당사자는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으니 부아가 뻗칠 만도 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그녀 사이에 켕기는 짓은 아무... 아무.. 아무것도...

‘시간이 늦었습니다.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

씨발.

일단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며 상황을 설명하려던 차, 라디가 시선을 돌리며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저... 아리엘 님이라고 하셨나요...?”

“으, 으응..?”

라디가 현관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당돌하게 읊조렸다.

“초면에 실례지만... 비를 좀 많이 맞아서 그런데 욕실을 좀 빌려도 괜찮을까요?”

“어... 으응, 잠시만... 욕조에 물을 받아줄 테니까...”

“...욕조도 있어요?”

“어, 그... 그런데 왜?”

“....”

라디가 날 힐긋 노려봤다.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

그간 녀석 앞에 선 몬스터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아리엘이 라디를 안내해주고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그녀가 되돌아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외쳤다.

“도, 도란..! 어, 어떻게 된 거야...! 애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게다가... 저, 저렇게나 귀, 귀엽고 예쁜...”

“...말 안 했으니까.”

“왜, 왜 안 한 건데?!!”

그야... 그럴 타이밍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내가 자의식 과잉도 아닌데 아리엘의 면전에 대고 ‘나 애인 있어요~’라고 하는 건 ‘난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미안’이라는 뜻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구태여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라디에 대해 털어놓으면 또 이것저것 설명해야 할 게 분명하다.

“설명해 도란!!”

지금처럼.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들이킨 뒤 아리엘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말톤의 소개로 처음 만난 것부터 던전에서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역경을 헤쳐온 것까지.

그렇게 술술 실토하다 보니 아리엘의 표정이 제법 볼 만했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저.. 라디라는 애는... 도란이 투구 벗은 모습도 본 적 있겠네...? 여, 연인이니까...”

“당연하지.”

“그, 그... 그럼 혹시 막... 야, 야 야한 짓도 하고 그랬어...?”

“...그건 왜.”

“으윽...”

돌연 아리엘이 어뢰에 맞은 함선처럼 격침되어버렸다.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기묘한 신음을 흘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혼자만 내 얼굴을 못 본 게 이다지도 아쉬웠나.

잘 차려진 식탁을 눈앞에 두고도 숟가락 한 번 들지 못한 채 막막하게 서 있자니 목욕을 마친 라디가 계단을 내려왔다.

녀석이 새하얀 가운으로 머릿결을 누르며 아리엘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잘 썼어요. 아가사 신전의 아리엘 사제님이라고 하셨죠?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으, 으응...! 나도 라디라고 부르면 되겠니?”

“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도란님이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은데... 죄송해요.”

“아, 아냐...! 나도 좋은 걸.. 아, 아니 도란이 좋다는 게 아니고...! 같이 임무를 수행하니까...”

“....”

라디가 재차 날 노려봤다. 분위기상 뭐라고 대꾸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어떤 대답을 들을지가 무서워서 눈조차 못 마주치겠다.

성난 살쾡이처럼 다짜고짜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다는 점이 천만다행이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 라디는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녀석은 즉각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내 쪽을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일주일 만에 본 애인한테 제일 궁금한 게 그거에요?”

“아, 아니...! 그야 당연히...!”

“네, 당연히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아카이아 길드에 가서 물었더니 접수원이 여기로 가보라던데요?”

“....혹시 그 접수원 머리 색이 주황색이었어?”

“정확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그분이 도란님한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뭐라고 하던데...?”

으슥한 한기에 몸을 떨며 물었다.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지만, 물어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라디가 무미건조하게 턱을 짚으며 읊조렸다.

“그분이 ‘나중에 꼭 설명해 도란, 아니면 내 손에 죽던가.’라고 전해달래요.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건지... 제가 알던 도란님은 여자는커녕 친구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는데. ...퍽 인기가 많으시네요?”

“그, 그건 오해...”

“게다가 이렇게 고급스러운 저택에서 운치 있게 와인도 기울일 줄 알고... 참~ 로맨틱하시기까지. 누구는 애인이 위험할까 봐 잠도 못 자고 웃돈까지 쥐여주면서 급행 마차를 수소문해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저, 정말 미...”

“흥!”

“....”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얼어붙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 반박할 수조차 없다.

설탕 액기스를 퍼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자 아리엘이 조심스레 침묵을 깼다.

“저... 그럼 라디..야? 오는데 고생했지? 일단 뭐라도 좀 먹을래?”

“아, 고마워요. 워낙 급하게 오느라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거든요... 안부 한 번 묻지 않는 누구보다 훨씬 낫네요.”

뜨끔!

“그래...?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음식은 충분하게 있으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식기 전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뇨,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갑자기 이런 폐를 끼치게 되어서 정말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리엘 언니는 외모만 아름다우신 게 아니라 목소리도, 마음씨도 참 고우시네요.”

“그런... 과찬이야.”

라디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식탁에 앉았다. 상을 차린 지 꽤 지난 나머지 조금 식긴 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는 듯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열심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한번 죄책감이 가슴을 후벼팠다. 내 안위가 걱정되어 먼 걸음을 달려왔을 녀석에게 반갑다는 말조차 못 건넸다니.

라디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주자 녀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일단 다 먹고 얘기해요. 두 분도 식사 중이셨던 것 같은데 마저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아리엘 우리도 먹자.”

“알았어...”

조금 불편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이어갔다.

상투적인 대화가 몇 번 오간 뒤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 나와 아리엘 또한 많이 주린 터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니 그 많던 음식이 어느새 동이 나버렸다.

눈치껏 주방에서 입가심용으로 준비한 과일을 내오자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설명을 듣고 싶은데... 아리엘 언니는 도란 오빠하고 무슨 관계에요?”

“아,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저, 정말로!!”

“....탓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도란님에게 믿을 만한 지인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렇게나 아리따운 여성분이실 줄은 몰랐거든요. 애초에 워낙 사교성이 떨어지는 분이기도 하고.. 한눈팔 배짱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요.”

라디가 내 투구를 힐끗 눈짓했다. 하기야... 내가 딴마음을 품고 있었더라면 투구를 벗고 있었겠지. 그래야 무슨 짓을 하든지 할 테니.

하지만 하나 정정하자면 나는 사교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친해질 기회가 없는...

아리엘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일단은 친구 사이라고 해야겠지? 처음 만난 건 이 근처 숲에서였는데 그 뒤로 자주 만나다 보니 알게 됐어. 내가 일하는 치료원에 도란이 곧잘 실려 왔거든. 어찌나 매번 다치고 오는지... 그런데 가끔은 또 엄청 듬직해서 개구쟁이 남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어.”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니까요...”

“맞아... 게다가 한 번은 코볼트한테 잔뜩 얻어맞고 온 거 있지?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었다니까. 그렇게까지 엉망인 사람은 환자 중에서도 보기 드물...”

“그, 그건 그냥 코볼트가 아니라 코볼트 킹...!”

“도란님은 좀 조용히 하세요. ..그래요?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저한테는 분명 완전히 압도했다고...”

“에이 설마, 도란이 처음 모험가가 됐을 때는 엄청 못 미더웠어. 강하기는 엄청나게 강한데 묘하게 맹한 구석이 있어서...”

“아! 그거 뭔지 알 것 같아요.”

“....”

어째서일까...?

조금 소외된 기분.

라디와 아리엘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맞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온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만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라는 게 문제다.

“...그때가 아마 2계층이었나? 한번은 도란님이 자신 있게 돌격했는데, 하필이면 스컹크 마물의 분사액을 얼굴에 정통으로 뒤집어쓴 거 있죠? 하루종일 멀찌감치 떨어져서 뒤따라오게 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언제는 도란이 말벌한테 쏘이고 온 거야. 울먹이며 나한테 달려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하마터면 쏘인 부위가...”

“그만!! 둘 다 이제 그만...!”

“왜요? 막 재밌어지려던 참인데.”

“...계속할 거라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엄숙하게 읊조리자 두 녀석의 말소리가 잠시 멎었다. 역시 사람은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마련.

하지만 곧바로 라디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로 발끈하셔서 되겠어요?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예를 들면 저번에 제가 잠든 사이 도란님이...”

“제, 제발...! 내가 잘못했어!”

“....알았으면 처신 똑바로 하세요. 그럼... 이제 베라스틴이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오는 동안 대강 듣긴 했는데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 그건 말이지...”

아리엘이 라디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도시에서 언데드가 출몰한 경위부터 영주가 이번 사태에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까지.

자초지종을 듣고 난 라디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뇌하더니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우물가에 카타콤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 했죠? 저도 같이 가요.”

“역시나...”

당연히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다.

내가 아는 라디라면 사정을 듣자마자 우리에게 가담하려고 할 거라는 걸.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인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류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명분이 없다.

라디가 있으면 든든한 것도 사실이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녀석이 쐐기를 박았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이 들어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혼자만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마음 편할 줄 알았어요? 만약 남아 있으라는 둥 그런 헛소리 하면 진심으로 화낼 거예요. 저 아직 도란님 완전히 용서한 거 아니거든요.”

“....”

녀석의 차가운 눈동자를 목도하자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라디를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비는 있는 거야? 맨몸으로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돼. 나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

“걱정 마세요, 마침 빌헴 마을에 맡겨두었던 짐도 다 찾아서 문제없어요. 언데드가 나온다고 하니 마을을 떠나오기 전에 은 무기도 준비했고요.”

라디가 목욕 가운을 걷자 꼼꼼하게 기름칠 된 쇠뇌와 은도금 볼트가 엿보였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녀석.

“...수로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냄새가 지독할 텐데 괜찮겠어?”

“그건 뭐... 참아야죠. 하루 이틀 겪어본 것도 아니고.”

“죽을 수도 있어.”

“절벽에서도 뛰어내렸는데 이 정도쯤이야.”

“....알았어. 그럼 오늘은 이만 다들 자자. 내일 이맘때쯤 수로로 돌입해야 할 테니까.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아리엘 너도 기숙사 말고 여기서 자고 가고. 라디 너도 내 방은 오른쪽 끝에 있으니까 같이...”

“....”

말하던 도중 입을 다물었다.

라디가 수조 밖으로 뛰쳐나와 말라죽은 해삼을 바라보듯 날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도란님 가끔 진짜 눈치 없는 거 알아요?”

“내가...?”

“오늘은 저도 따로 잘 거예요. 아리엘 언니, 남는 방 있어요?”

“아... 따라와! 안내해줄게!”

“....”

나는 멍하니 복도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쩐지 앞으로 수난이 시작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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