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65화 (165/375)

〈 165화 〉 진입 #3

* * *

[165] 진입 #3

­쏴아아아아....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길 속.

방수포 아래로 들이치는 물살을 떨쳐내며 내달렸다.

카타콤 입구가 있는 동쪽 광장 우물가를 향해.

“...도착했어, 여기야.”

“이곳이 바로...”

“난 기사들부터 확인하고 올게!”

“...조심해 아리엘.”

카렌까지 포함해 총 네 명. 아리엘이 위병의 동향을 살피는 사이 준비해온 삽으로 땅을 파헤쳤다. 거친 뇌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흙을 파내기란 쉽지 않았으나 오히려 이 행운에 감사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올 수 있었으니까.

카렌이 잠시 손을 멈추며 물었다.

“...도란 씨, 정말로 이 아래에 통로가 있는 거예요?”

“예, 틀림없을 겁니다.”

“으음...”

그녀는 반신반의한 눈치였으나 우리를 도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렇게 거센 빗줄기에 체온이 차갑게 식어 올 때 즈음­

“이제 슬슬 나올...”

­툭!

“....”

두꺼운 삽자루 너머로 둔탁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우리는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를 마주보고는 재빨리 마저 흙을 파헤쳤다. 땅을 파내면 파낼수록 점점 삽질에 가속이 걸렸고, 진흙 덮인 무언가가 서서히 윤곽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나무판자를 들추자 흙이 후두둑 떨어져내려며 숨겨져 있던 수직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네요.”

“정말이었구나... 우물가에 도시 지하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니...”

라디와 카렌이 침음하며 삽자루를 놓았다. 그녀들이 구멍을 내려다보며 경악하는 사이, 나는 재빨리 어깨에 걸쳐 맸던 로프를 통로 안쪽에 늘어뜨리고 망을 보던 아리엘을 불러들였다.

“아리엘, 됐어!! 빨리 와!”

“끝났어? 꽤 깊네, 잠깐만...”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따스한 빛무리가 피어올라 구멍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환한 조명이 울퉁불퉁한 수직굴을 선명하게 비추었지만, 시꺼먼 구덩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디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꽤 높은데... 라디야 너 괜찮겠어?”

“...어쩔 수 없죠. 지체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저희가 돌입한 뒤의 일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래, 내가 먼저 앞장설게. 그럼... 카렌 씨, 뒷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나 하세요. 제발...”

“괜찮아, 내가 같이 가니까 안심해!”

“...아리엘 너도 걱정이야. 굶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뛰다가 넘어져서 다치지 말고... 그.. 라디 씨라고 하셨죠? 철부지 아리엘이랑 도란 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정식 파티원으로 수속 절차를 밟아놓을 테니 수색이 끝나면 공로를 인정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꼭 기대에 부응할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카렌 씨.”

“다녀올게 카렌!”

작별 인사를 마치고 로프를 붙들었다. 이제 이 아래로 내려가면 당분간 지상을 밟지 못한다. 햇빛도 보지 못하고, 던전과는 달리 발광 이끼조차 없다.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 속에서 기약 없는 나날을 버텨야 한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천천히 줄을 타고 하강했다. 끈으로 만든 간이 하네스에 무게를 지탱하며 서서히 내려오다 보니 귓전을 가득 메웠던 빗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지상에서 비쳐오던 희미한 조명 역시 저물고 말았다.

묵직하게 늘어지는 배낭에 두 팔다리가 저려 올 때 즈음 발치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고, 나는 찰팍거리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얕은 웅덩이 위로 착지했다.

“이곳이 우물 바닥...”

­휘이이잉...

먼 지상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투구 사이를 드나들며 기묘한 소음을 일궈냈다. 축축한 이끼와 물웅덩이가 자아내는 묘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으며 사방에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메아리쳤다.

“랜턴이 어디있더라...”

서둘러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마석등을 켜자 습기를 머금은 암석과 약간의 진흙, 잔잔하게 물결치는 수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방울이 맺혀 반짝이는 우물 바닥의 첫인상은 밤 해변가에 뿌려놓은 진주알처럼 환상적이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잠시 팔다리를 쉬어주고 있자니 구멍 너머로 아리엘과 라디가 나타났다.

“꺄아아아아악!!”

­덥석!!!

“...괜찮아?”

“으으... 네.. 마지막에 실수로 줄을 놓쳐버려서...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잠깐 여기 앉아 있어. 아리엘 너도 좀 쉬고.”

“그래, 역시 조금 무겁네...!”

그녀들이 방수 코팅을 마친 배낭을 내려놓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이곳에선 식량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니 필연적으로 많은 짐을 싸 들고 온 탓. 심지어 라디는 독극물과 함정까지 준비한 모양이니 더욱 버거웠겠지.

배낭 위에 걸터앉아 지친 팔다리를 쉬어주고 있자니 아리엘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물 밑바닥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신기하다.. 여기까지 내려와 보는 건 처음이야.”

“저도요... 아마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볼 기회는 또 없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이곳에 독을 풀었다간 하루아침 만에 주민 수백 명을 몰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네요.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만해요. 저라면 최대한 늦게 눈치채도록 약효가 느린...”

“살벌한 소리 하지 마 인마.”

라디의 후드를 푹 눌러주며 웃었다. 과연 녀석다운 발상이다.

방수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돌돌 말아 배낭에 매달자 아리엘이 내게 다가와 기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옛날 선조들이 건설했다는 땅굴은 어디쯤 있을까? 도란, 지도 가지고 왔지?”

“응, 잠깐만 기다려봐.”

허리춤에서 토드 씨가 준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지도에 그려져 있는 지하수로는 대략 5층. 구획이 난잡하게 얽혀 있어 명확하게 층수를 구분 짓는 건 불가능했으나 어림짐작으로 분간해놓았다.

그 밑으로도 공간이 있는 듯했지만 어째서인지 도중부터 잉크가 번져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지도를 곱게 접어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 물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돼. 가다 보면 중간에 작은 샛길이 하나 나올 테니 놓치지 않게 잘 살피고. ...이제 슬슬 출발하자.”

“네. 아리엘 언니, 배낭 메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잠시만...”

휴식을 마친 뒤 차분하게 발을 내디뎠다. 지하수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통로는 발목을 간질일 만치의 담수가 고여있어 몹시도 미끄러웠지만, 아리엘의 저택에서 챙겨온 마석등 덕에 어찌어찌 넘어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걷다 보니 걸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는 반드시 필요한 일.

언제 어디서 언데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어쩌면 시꺼먼 물웅덩이 아래에 스켈레톤 병사가 숨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우물 밑바닥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끝없는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선사했다.

하물며 이 지하엔 언데드만 있는 게 아니다.

“...라디야, 뭐가 나타나면 바로 말해줘. 후각으로 감지할 수 있지?”

“네, 도중부터 하수 시설과 이어져 있다길래 걱정했는데... 물비린내가 좀 나긴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아요. 그런데...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그래, 뭔데?”

“기사가 나타나면... 도란님은 어쩌실 거예요?”

“뭐...?”

순간 멈칫했다. 무심코 돌아본 녀석의 두 눈동자에 지독한 살의가 서려 있었기에.

...그러고 보니 라디는 기사라면 치를 떨었지.

“주저 없이 해치울 거야. 이런 곳에서 마주칠 정도면 뭐... 떳떳한 녀석은 아니겠지. 놈들이 수상한 가면을 쓴 무리와 함께 다니는 걸 목격한 사람도 있으니까. ...아리엘, 넌 어떡할 거야?”

“응, 어떡할 거라니? 뭐 말이야?”

“사람을 만나면 말이야. 기사와 마주치면 높은 확률로 싸워야 할 텐데...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잘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실전에서는 수많은 요인이 전투에 영향을 끼치곤 하니까. 피로도, 노면 상태, 무기의 마모도, 보호장구 등 무수한 변수가 승패를 좌우한다.

허나 그중 전투에 임하는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잘 훈련된 군인이라고 한들 전의를 잃어버리는 순간부터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검 끝에 망설임을 싣는 순간 칼날은 무뎌지고, 언젠가 부러져 제 심장을 찌르게 된다.

아리엘이 도적을 해치는 건 봤어도 기사한테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 이 세계에선 사람마다 생명의 가치가 다르고 이 둘의 무게는 비교를 불허하니까.

다소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으나 아리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올 뿐이었다.

“...괜찮아 도란. 나도 할 때는 하는 성격이야. 악한을 상대할 때도 손속을 둘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아.”

“그래...? 그렇다면 뭐...”

“응, 그러니까 도란이나 잘해! 예전처럼 나한테 치유받다가 아프다고 엉엉 울지 말고.”

“내, 내가 언제 울었다고...!”

“아니야?”

“그, 그건...! 그냥 생리현상으로 찔끔, 아주 찔끔 눈물이 고여나온 게 전부라고!! 너도 알잖아! 그거 엄청 아프...!”

“...잠시만요. 말씀하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저거 샛길 아니에요?”

반보 앞서나가던 라디가 멈춰서며 머리 위를 손짓했다. 녀석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드니 커다란 물길 위로 난 비좁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평소라면 그냥 자연적으로 생겨난 지형이겠거니 지나쳤겠지만...

“...맞는 것 같네. 지도에도 여기쯤이라고 나와 있어. ...좀 높은데 뭐 밟고 올라갈 만한 거 없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지형지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벽을 기어오를 수밖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그래, 이 정도쯤이야.”

바위가 물에 젖어 미끄러웠지만 단도로 홈을 만들어 어떻게든 해결했다. 묵직하게 짓누르는 배낭을 벗고 날렵하게 기어올라 구멍에 다다르자 통로 반대편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실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라디와 아리엘을 돌아보며 로프를 늘어뜨렸다.

“자, 가방부터 넘겨줘. 이 줄에 묶을 수 있지?”

“잠시만요. 아리엘 언니, 이거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응! 셋에 힘주는 거다? 하나 둘... 읏챠..!”

배낭이 무거우니 간단한 행동조차 버겁다.

짐을 먼저 끌어올린 뒤, 나머지 두 명 모두 암벽을 기어오르자 아리엘이 통로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샛길을 만들었을까? 단순히 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좀 더 눈에 띄는 곳에 만들어도 괜찮았을 텐데...”

“음... 어젯밤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교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이교도 때문에?”

“네, 이 지하 공간은 매장소 겸 유족들의 피난처로 쓰였다고 했잖아요? 지하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고 하니 나름대로 주거 시설이 갖춰져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당연히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을 테고...”

“그럼... 이곳도 우리가 봤던 2계층에서 봤던 유적처럼...”

“네, 여러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확률이 높아요. 이교도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다면 그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는 해놨을 테니까요. 심지어 그때 우리가 봤던 유적은 오래돼서 망가진 것들이 많았지만, 이곳에 있는 함정은 아직 멀쩡하게 작동할 거예요.”

“하기야...”

베라스틴이 막 세워질 무렵에 만들어진 함정이라면 화살촉에 발라둔 맹독의 효력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톱날 장치에 공급된 기름이 동나지도 않았을 테고, 어쩌면 그보다 더욱 집요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고될 수도 있겠네...”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칠흑의 공간, 언제 튀어나와 사지를 앗아갈지 모르는 함정,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언데드 무리, 가면을 쓴 수상쩍은 무리와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영주의 사병들까지...

이 모든 것들을 돌파해 지하 묘지의 최심부까지 도달해야 한다. 베라스틴에 발생한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건­

“도란님...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표정이 구겨지셨는데...”

“아니 그냥... 기분이 좀 묘해서.”

“괜찮은 거 맞아...?비에 젖어서 몸살 기운이 오는 걸지도 몰라. 조금 쉬었다 가자.”

“...괜찮아.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마...”

누굴까.

귓바퀴에 불쾌히 들러붙는 이 간절한 목소리는.

누군가 있다.

이 아래에.

예상을 아득히 웃돌 정도로 무수한 인파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님 부디...]

무언가를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난 어떻게 안 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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