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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66화 (166/375)

〈 166화 〉 진입 #4

* * *

[166] 진입 #4

“라디야 괜찮아...?”

“....”

­도리도리!

“큰일이네... 아직 멀었어 도란..?”

“얼마 안 남긴 했는데... 안 되겠다. 최대한 서두르자.”

발길을 재촉했다. 비좁은 샛길을 지나 큼지막한 통로에 접어들자 하수도와 노선이 겹치는 구간이 나왔다. 습기 찬 석벽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고, 길 중앙으로 흐르는 탁한 오폐수가 녹슨 철창에 부딪힐 때마다 시꺼먼 물보라가 튀어올랐다.

창백하게 질린 채 코를 틀어막는 라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을 수 있겠어..? 이제 오 분만 가면 되니까...”

“....”

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녀석의 후각 덕에 위험을 회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 너무 지나치면 가끔 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둘러 통로를 나아갔고, 아래로 뻗은 계단이 나오자마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폭이 좁은 계단을 수도 없이 내려와 악취가 가셨을 즈음에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라디야 지금은 좀 어때...?”

“...아까보단 많이 괜찮아졌어요. 조금 전까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라디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옷소매를 킁킁거리며 읊조렸다. 나는 그녀를 살짝 끌어안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녀석에게는 마치 하수 속에 파묻혀 헤엄치는 기분이었을 테지.

잠시 통로에 서서 포옹하고 있자니 라디도 살며시 미소지으며 날 올려다봤다. 한데...

“왜, 아리엘. 내 투구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리엘이 배낭끈을 매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진짜 연인이구나 싶어서.. 이렇게 다정한 도란은 처음 봤어.”

“.....”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던 차, 라디가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아리엘 언니, 사실은 말씀드릴 게 하나 있는데...”

설마...!

“라, 라디야!”

“도란님...?”

황급히 팔을 뻗어 만류했다. 이내 아리엘에게 시선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서둘러 라디의 손을 붙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목소리를 낮춘 채 아리엘이 있는 방향을 힐끗거리며 속삭였다.

“너, 너...! 그걸 말하려 하면 어떡해?!”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다 알면서... 그새 잊어버린 거야?”

슬쩍 투구를 손짓했다. 아무리 라디라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녀석은 그간 아무렇지도 않게 봐왔으니 익숙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 머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곤욕을 치르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가.

내가 필사적으로 토로하자 라디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답했다.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이건 제 오지랖이지만... 저분한테라면 밝혀도 괜찮지 않을까요? 제가 사낭 쥐 수인이란 걸 알고도 개의치 않은 데다가 이전부터 도란님을 많이 도와준 은인이라면서요...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분은 아닐 것 같은데...”

“....”

나도 안다.

어떻게 모를까. 그동안 그렇게나 봐왔는데.

하지만 혹시 모를 아주 미미한 가능성이 내 각오를 묘연하게 만들었다. 얇디얇게 쌓인 서리에도 작물이 쇠하듯이, 그녀의 냉기에 살짝이라도 스쳤다간 내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상처가 남을 테니까.

그 아찔한 상상에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자 라디가 내 목덜미를 품에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전 언제나 도란님의 선택을 존중해요. 도란님이 어떤 길을 가더라도 끝까지 함께할 거예요. 그러니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외면하고 도란님을 떠나가는 순간에도 제가 곁에 남아있을 거라는 사실을요...”

“...그래.”

“그러니 그렇게 겁먹지 말고 어깨 좀 펴요. 알았지?”

라디가 양손으로 내 투구를 찹찹 때리며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알았어, 그래서 아까 아리엘한테 하려던 말은 뭔데.”

“음... 그건... 비밀?”

“뭐?”

“도란님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에요. 적어도 아직은.”

“....”

내가 곰곰이 그 말뜻을 유추하는 사이 라디가 아리엘에게 다가가 말했다.

“죄송해요. 좀 오래 걸렸죠?”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미안해요.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아리엘 언니와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도란님이 들으면 조금 곤란해서 오늘 불침번 때까지만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내가 도란이랑 친하게 지내서 그런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뭐라고 해야 할지... 나쁜 내용은 아니니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도란님의 은인인 만큼 저도 언니랑 원만하게 지냈으면 좋겠거든요. 앞으로 오래... 볼 사이기도 하고.”

“...그래? 알았어, 믿고 기다릴게 라디야.”

“.....”

살짝 난해한 심경으로 먼발치에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라디가 내게 숨긴 내용이 뭘까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중에 아리엘한테 슬쩍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이자.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니까 조심하고. 내가 앞장설 테니 둘 다 뭐가 느껴지면 둘 다 바로 말해줘야 해?”

“네, 알겠어요.”

“응!”

다시금 앞길을 재촉했다. 현재 우리가 위치한 장소는 지하 2층. 조금 전까지는 하수도 청소 의뢰를 맡아 몇 번 들어와 본 적이 있는 구역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완전한 미지의 공간이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게 의식하며 울퉁불퉁한 석재 통로를 나아가고 있자니 머잖아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길이 나뉘네요... 어디로 가야 해요 도란님?”

“음... 그게 좀... 뭐라 말하기가 곤란해.”

“응? 지도에 나와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이거 좀 봐볼래...?”

마석등으로 지도를 비추자 아리엘과 라디가 가까이 달라붙었다. 나는 두 녀석이 보기 편하도록 살짝 물러선 뒤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 위치거든? 갈림길 중 어느 쪽으로 가도 지하에는 도달할 수는 있어. 문제는 두 통로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있다는 건데...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 같아.”

“그러게요... 보아하니 한쪽은 외곽으로 뻗어있고 다른 하나는 중심지로 이어지네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혹시 뭐 안 느껴져? 이상한 냄새가 난다거나...”

“...죄송해요. 아직 코가 마비된 상태라... 오히려 아리엘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아리엘이?”

고개를 돌려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통로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다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 양쪽으로부터 안 좋은 기운이 폴폴 풍겨오고 있어. 다만...”

“다만?”

“....외곽으로 빠지는 길에서 유독 불길한 기척이 느껴져. 이 통로는 피하는 게 좋겠어.”

“...동쪽 숲에서 느꼈다던 사기 말하는 거야?”

“응, 맞아.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언데드가 나타나려는 조짐이려나 본데... 혹시 모르니까 미리 축복을 걸어줄게.”

그녀가 다소곳하게 주문을 읊조리자 새하얀 광채가 나와 라디를 감쌌다. 호숫가 위에 떨어지는 첫눈처럼 포근하게 녹아드는 빛. 언제 봐도 놀라운 광경에 감탄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저주에 대한 내성과 반사신경을 높여줬어! 이제 스켈레톤이 몰려와도 끄떡없을 거야.”

“...사제에게 축복을 받아보는 건 처음인데.. 신기해요... 시야가 조금 밝아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응... 라디가 그렇게 느꼈다면 아마 맞을걸? 축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발현되거든. 전부 체질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

라디가 아직 하얀 기운이 남아있는 꼬리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효과가 쉬이 체감되는 모양. 나는 저번처럼 미약한 고양감밖에 못 느끼겠는데...

“...그럼 아리엘 말대로 이쪽 통로로 가자. 여기는 도중부터 복잡하게 꼬여 있는 모양이니 조심하고. 혹시라도 함정이...”

“도란님!!!!”

­쐐애애액!!!

“....!!”

찰나ㅡ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통로 저편에서 함정 특유의 작동음과 함께 번뜩이는 무언가가 쇄도했다. 라디가 외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통이 꿰뚫렸을 수(手).

하지만 팔뚝을 감싼 건틀릿으로 날붙이를 쳐내기가 무섭게 무수한 격발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라디와 아리엘을 감싸려던 순간─

­카가가가가가강!!!!

광막(光?).

가솔린이 가득 찬 방 안에 라이터를 던져넣은 것처럼 순식간에 팽창한 빛무리가 쇠붙이를 튕겨냈다. 나와 라디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방벽.

빛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은 쇠날이 적중한 지점에서 무수한 파문을 자아내며 금빛 잔상을 퍼트렸고, 머잖아 부드럽게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뒤를 돌아보자 천천히 팔을 떨구며 탄식하는 아리엘이 보였다.

“가, 간신히 막았다...!”

“뭐, 뭐야 방금 건... 마법...?”

“배리어... 중급 마법... 같은데요?”

아리엘이 시선을 눈치채고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꼬며 올려다봤다.

“으음... 나 잘했어?”

“....그래, 하마터면 벌집 신세가 될 뻔했네... 방금 그건 무슨 마법이야? 화살을 전부 튕겨내던데.”

“응... 광속성 마법 배리어에 신성력을 덧씌워서 강도를 강화한 거야. 이렇게 하면 하급 마법으로도 상당한 위력을 낼 수 있거든!”

“잠깐...! 마법에 신성력을 덮어썼다고요...? 그런 건 듣도보도 못했는데...”

“으음... 아마 보기 꽤 드물걸? 아가사 님의 축복과 내 마력의 궁합이 좋아서 우연히 터득한 거니까. 혼자서 깨우치긴 했지만 나 말고도 우리 교단의 고위 성기사나 사제 중엔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을 거야.”

“.....”

라디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슬그머니 뒤돌아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솔직히 난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는데 대단한 거야?”

“다, 당연하죠!! 방금 못 들으셨어요?! 마력과 신성력을 결합해 마법을 개변했다잖아요! 오리지널 마법이라고요!!”

“...그거 힘들어?”

“네!! 저거 괴물이에요 괴물!”

“실례야. 나 괴물 아니거든?”

아리엘이 새침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라디에게 감화되어 살짝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너 그런 마법도 부릴 수 있었어? 난 어둠을 밝히는 거랑 축복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그야 평소에는 보여줄 기회가 없었으니까. 마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 조금 배워놨거든. 간단한 생활 마법도 몇 개 쓸 줄 알고. 정식 마법사는 아니라서 살상력 높은 군용 마법은 한두 개밖에 쓸 줄 모르지만.”

“....”

그니까 조금은 쓸 수 있다는 겁니까.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삼켰다. 이쯤 되면 사제가 아니라 마녀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나 재능 넘치는 녀석이 왜 나를 그렇게 챙겨주는지 곰곰이 고민하고 있자니 라디가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땅에 떨어진 쇠붙이를 살폈다.

“그건 그렇고... 끄트머리가 넓적한 편전.. 독극물이 발라져 있어요. 타닌 계열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한 독을 쓴 모양인데 아직 약효가 남아있으니 조심해야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처음이 아닌 모양인데요?”

“그게 무슨... 이런..”

마석등을 높게 들어올리자 통로 바닥에 낭자한 혈흔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됐으리라 추정되는 핏자국은 조명이 닿지 않는 저편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야산에서 발견된 살인 현장처럼 음산한 기운을 물씬 풍겼다.

발치에 덩그러니 놓인 쇳조각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각반의 이음매에서 찢겨나온 조각이야. 기사들이 이곳을 통과했던 게 틀림없어. 심지어 피도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그러게요. 이 정도 혈흔이면 꽤 치명상이었겠어요. 놈들이 독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을 것 같지도 않고... 최소 서넛쯤은 우습게 죽었겠는데요?”

“그러게...”

“저... 잠깐만, 하나 이상한 게 있는데...”

화살이 더 날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참혹한 현장을 분석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다가왔다.

시선으로 뒷말을 재촉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체는 어디로 간 거야? 이런 지하에서는 시신을 수습하기 힘들었을 텐데... 갑옷도 같이 없어졌고.”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라디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리엘의 말을 듣고 나자 위화감이 샘솟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렇게 비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건장한 성인 남성을 옮기기란 쉽지 않았을 터, 심지어 그토록 무거운 플레이트 아머도 같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이 현장에는 묘한 점이 하나 더 있다.

‘핏자국이 이상해...’

혼자서는 이 많은 시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최소 두 명이 시체를 옮긴다고 가정하면 겨드랑이와 다리를 붙잡고 운반했을 테고. 그렇다면 혈흔이 뚝뚝 끊겨있어야 정상이지만, 여기 있는 핏자국은 통로 저편까지 질질 끌려있다.

“시체가 저절로 살아 움직였다면 모를까...”

“....아리엘 언니, 기사의 언데드는 얼마나 강할까요?”

“글쎄... 일반 스켈레톤보다야 훨씬 세겠지만 특별한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 이상 해치우는 데 그렇게까지 애먹을 정도는 아닐 거야. 언데드의 강함은 생전의 강함에 국한되기보단 사념이나 주술의 영향을 크게 받으니까.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뭐가 또 있어...?”

“응... 이전에 우연히 영주성에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엄청나게 강한 남자를 봤었어. 영주의 기사들을 통솔하는 기사단장 말이야. 정말로 베라스틴의 기사들이 이번 사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여기서 그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최악이겠네.”

“그런 상황만은 피했으면 좋겠는데요...”

불안하게 허리춤의 장검을 매만졌다.

나는 이 아래 도사리고 있을 무언가를 흘겨보고는 끈덕지게 늘러붙는 불길함을 떨쳐내며 통로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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