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진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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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진입 #5
“도란님, 함정이에요.”
“...그래, 이건 나도 그냥 보고 알겠다.”
길고 협소한 통로를 세 시간 남짓 걸었을 무렵.
드디어 널찍한 공간에 도달했다. 작은 홀 정도 되어 보이는 공동에는 네모반듯한 바위 블록이 깔려있었고, 사방에 무시무시한 사출구가 도사려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을 암시했다.
납덩어리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털썩 내려놓으며 전방을 살폈다.
“무늬가 새겨진 타일... 아무래도 정해진 순서대로 발판을 밟아야만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모양인데?”
“...제 생각도 그래요. 일정 무게를 넘으면 발동되는 구조인 것 같아요.”
“한 번 건드려 볼까 도란?”
“내가 해 볼 테니 둘 다 멀리 떨어져 있어.”
두 녀석을 통로 어귀로 물렸다. 구석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들어 타일 위로 던져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큼지막한 바위를 굴려봐도 마찬가지.
패턴을 파훼할 뾰족한 단서도 없는 상황, 결국 직접 나서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조심하세요.”
“조심해 도란, 일단 계속 실드를 펼쳐둘 테니까...”
“그래.”
언제든 물러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천천히 타일 위로 발을 옮겼다. 바닥의 갈라진 틈새로부터 먼지가 피어오르자 심장이 철렁였다. 아무리 대비했다고 한들 함정이란 걸 뻔히 알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상당한 담력을 요구했으니까.
이윽고 예정된 수순처럼 돌 타일이 덜컥 움직이며 사방에서 첨예한 화살촉이 몰아쳤다.
타다다다당!!!!
“...성능 한 번 죽이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그래 덕분에, 여긴 그냥 지나가도 되겠다. 보호막 계속 펼쳐둘 수 있지?”
“응! 나한테 맡겨!”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후 배낭을 짊어지고 함께 함정을 통과했다. 뭔가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중간 즈음부터는 한 발 한 발 내디디기가 무섭게 화살이 쏟아졌지만, 아리엘이 펼쳐준 보호막 덕분에 아무 문제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때로는 정직하게 함정을 파훼하는 것만이 왕도는 아니니까.
라디가 주위를 에워싼 빛무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건드리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마법사랑 파티를 짜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왜 그렇게 높은 몸값을 받는지 알겠어요. 어마어마하게 편리해요.”
“사실 마법사도 뭣도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그냥 잔재주를 조금 부릴 줄 아는 게 전부야. 진짜배기 마법사랑 비교하면 곤란해.”
“보통은 생활 마법 한두 개만 배워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데 말이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아리엘 언니는 어디 가문 출신인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뭐..?”
아리엘이 돌연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이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냥 평범한 시민...”
“네? 그럴 리가... 이렇게나 기품있고 재력까지 갖추셨는데 평범한 서민이라니...”
“그, 그건 말이지...”
“뭐... 본인이 밝히기 싫어하는 모양이니까 그냥 냅두자. 다 사정이 있겠지.”
“...죄송해요. 아리엘 언니.”
“아이참... 그러니까 진짜로 아니래도...”
아리엘이 내 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귀한 혈통이란 게 들통나면 우리가 거리를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평민 중에는 귀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마석등을 앞세운 채 걷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언데드라고 하니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이야... 악마도 신성력에 약해?”
최대한 우연을 가장해 물었다.
마족과는 불구대천의 사이라 이 세계에서는 종종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터부시되곤 한다. 흑발이 악마의 후손이라는 뜬소문이 나도는 것에는 그러한 요인도 일조할 터.
만약 놈들이 신성력에 취약하다면 과거에 몇 번 마족과 얽힌 경험이 있는 내게는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어조로 물었지만, 어째선지 아리엘은 내 투구를 응시하며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긴 생머리를 비비 꼬며 대답했다.
“음... 경우에 따라 달라. 이 세계엔 워낙 많은 신님이 계시니까 축복도 제각각이잖아? 악마도 대게는 인간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떤 경우는 상극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나 봐. 이건 우리 신전의 수도원장이 말해준 내용인데... 이전에 한 악마를 생포해서 축복을 걸어줬더니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었데.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비슷하잖아 언데드랑 악마.”
“그런가...?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전승에 따르면 언데드를 부리는 마족도 존재했다는 모양이니까.”
“...그래요? 언데드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적 아니었어요?”
“음... 꼭 그런 것만은 아냐. 흑마술사가 다루는 주술 중에도 언데드를 부리는 계통이 있거든. 실제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그쪽 권능을 내려주는 신도 한 분 계시고.”
“그런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악취가 장난이 아닐 텐... 잠깐.”
불현듯 라디가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멈춰섰다.
뒤이어 후드를 젖히고 자세를 낮추더니 귀를 쫑긋거리며 읊조렸다.
“앞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아리엘 너는?”
“나도...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달그락거리는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대비하는 게 좋겠어.”
“...그래, 내가 선두에 나설게.”
배낭을 내려놓았다. 얼얼한 어깨를 풀며 전투에 대비했다. 일반 언데드는 둔기로 뼈마디를 분쇄해놓는 게 제일 효율적이지만, 마침 이 기회에 실험해볼 게 있다.
종아리에서 은빛으로 번뜩거리는 코볼트 단검을 뽑아들자 라디가 눈을 크게 떴다.
“은 도금 무기... 도란님도 꽤 준비하신 모양이네요.”
“물론이지.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보험은 많이 들여놓을수록 좋지 않겠어? 아리엘, 여기에도 축복 좀 부탁할게.”
“응, 잠시만...”
그녀가 주문을 읊조리자 새하얀 빛이 단검에 녹아들었다. 사정거리가 짧은 게 흠이지만 이번 전투에서 충분히 위력적이라고 판단되면 유사시 비상 무기로 활약할 수 있을 거다.
동쪽 숲에서 실험했을 때는 도금을 하지 않았을 대니까.
라디에게 랜턴을 맡기고 전위로 나서자 통로 저편에서 새하얀 형체들이 발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스켈레톤이었네. 다섯 마리가 끝인가?”
“그러게요, 혹시나 기사는 아닐까 싶었는데... 아쉽네요.”
“...가다 보면 언젠간 만나겠지.”
맥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걸어나갔다. 기사의 좀비나 상위 언데드 개체 정도는 기대했는데 아직은 층수가 깊지 않아서 그런지 약한 놈들이 출몰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실험 대상 정도는 되어줄 수 있겠지.
나는 칼자루를 굳게 움켜쥐고는 순식간에 도약해 한 녀석의 어깨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파각!!
콰르르르!!!
‘...먹힌다.’
단순히 날끝이 닿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놈의 관절이 바스러졌다. 뼈마디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휘청거리는 인골. 그 새하얀 낯짝에 경악의 기색이 스쳐 지나간 건 기분 탓일까?
휘이이익!
“어딜.”
측면에서 희뿌연 궤적이 쇄도했다. 둔중하기 짝이 없는 공격. 나는 즉시 스탭을 밟아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철 박힌 부츠로 정강이를 걷어찼고,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스켈레톤의 뒤통수를 틀어주고 각반을 차올렸다.
그것만으로 녀석은 명치가 박살 난 채 맥없이 허물어지며 뿌연 뼛가루를 피워올렸다.
“일단 하나.”
곧바로 기세를 이어나갔다. 무턱대고 휘둘러 오는 팔뚝을 낚아채 건틀릿 사이에 끼우고 부러뜨렸다. 놈이 공허한 눈두덩이로 노려보며 이빨을 들이댔지만, 단단한 주먹으로 아래턱을 강타하자 뼛조각을 쏟아내며 벽에 처박혔다.
“둘.”
몰아치는 연격. 지근거리로 파고든다. 치밀어오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적을 분쇄했다. 나는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겼고, 비좁은 통로의 공간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이 엉키도록 유도했다.
연계도, 치명적인 공격 수단도, 변변찮은 방어 기제도 없는 오합지졸 따위 내 상대가 아니었으니.
은빛 섬광을 머금은 단검에 스치자 둔기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뼈마디를 덜그럭거리는 언데드를 처리하고 잔해를 주시하고 있자니 라디가 다가와 옷에 묻은 뼛가루를 털어내어주었다.
“...어쩐지 이전보다 움직임이 더 능숙해진 것 같은데요...?”
“물론이지. 제대로 된 방어구를 갖췄으니까.”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명필은 붓을 가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투에 있어서 장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목숨이 달린 일 아닌가. 팔랑거리는 천옷에 싸구려 단검 한 자루만을 든 사람과 아다만티움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가 같을 수는 없다.
심지어 그 둘이 비슷한 실력대였다면 어떨까.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바로 장비다. 방어구를 갖춰 입으면 수비에 공을 들일 필요가 줄어들고, 그만큼 공격에 할애하는 게 가능하다. 다채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건 당연지사.
“방어구 때문이 아니라 아리엘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건...”
“그, 그럴 리가...! 크흠! 아, 아리엘,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 닿자마자 그냥 부서져 버려. 앞으로 언데드랑 상대할 때마다 계속 써줄 수 있어?”
“응... 상시 유지할 수는 없지만 신성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걸어줄 수 있어. 어때, 굉장하지?”
“그래... 엄청 유용하네.”
번뜩거리는 칼날을 들여다보며 감탄하고 있자니 라디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제 슬슬 쉬는 게 어때요? 반나절은 넘게 걸어온 것 같기도 하고 이 앞으로 나아가면 계속 언데드와 마주칠 테니까요.”
“그럴까? 하긴... 배도 채워야 하니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신성력으로 정화했다고 한들 언데드의 잔해가 있는 장소에서 야영하는 건 좀 꺼림칙한 바, 우리는 통로를 조금 더 나아가 자그마한 원형 공간이 있는 곳에서 멈춰섰다.
함정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방수포를 깔고 앉자 묵직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끼니를 때울 육포와 부드러운 밀빵, 버터 따위를 꺼내놓고 가방을 뒤지고 있자니 라디가 수통을 들고 기웃거리며 물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 찾았다.”
가방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자 라디가 숨을 들이켰다.
“그건...!”
“까먹고 있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도란님이 아무 말도 없길래 절벽 위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게 얼마짜린데 그렇게 쉽게 잃어버려. 말톤이 잘 보관하고 있더라.”
홍옥(??).
고대 유적, 카노푸스 단지가 가득한 방을 통과할 때 뱀 석상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보석이다. 그간 쓸 데도 없고 처분하기도 모호해 애물단지와도 같은 취급이었지만, 아리엘의 저택에서 목욕물을 데울 때 불 마석 얘기가 나온 뒤로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짜 용도는 아직 감도 안 잡히지만.
아리엘에게 구슬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리엘, 저번이랑 똑같이 해줄 수 있어?”
“응, 잠시만...”
그녀가 손바닥 위에 홍옥을 올려놓고 마력을 불어넣자 붉은 기운이 서서히 차올랐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통로에 노을처럼 따스한 불빛이 기울고, 잔잔하게 맥동하는 취광이 훈훈한 온기를 피워올렸다.
“...갑자기 폭발하는 건 아니겠죠?”
“괜찮아, 아리엘하고 실험해봤는데 이 정도론 끄떡없더라.”
“그래요?”
“응, 이런 건 처음 봤어! 마석하고 비슷한 성질인 것 같긴 한데... 품고 있는 마력량이 차원이 달라. 이 안에 담긴 마나가 전부 흘러나오면 베라스틴은 잿더미가 되고도 남을걸?”
“그럼 엄청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음... 아마 괜찮을 거야. 정말 어지간히 강한 충격을 가하거나 별도의 가공을 거치지 않는 한 폭발하지 않을 테니까!”
“언니가 그렇다면 뭐...”
라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지만 아직 반신반의한지 구슬을 곁눈질하며 불안하게 로브자락을 매만졌다.
나는 그런 녀석을 잡아당겨 끌어안고는 귀를 어루만져주며 속삭였다.
“내일 중으로 다음 층에 들어가야 할 테니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둬. 아직 베라스틴까지 오는 동안 쌓인 피로도 다 안 풀렸잖아. 도착하자마자 많이 놀랐지? 언데드며 뭐며...”
“...막상 올 때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얼굴을 보고 나니 다른 의미로 놀랐지만요.”
“아, 아무튼 지금은 편히 쉬어.”
“고마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어요.”
라디가 배낭에서 칼날 달린 철조망을 꺼내들더니 통로 어귀에 늘어뜨렸다. 밤새 언데드가 습격해올 걸 대비해 임시 바리게이트를 치려는 모양. 낑낑거리며 철선을 잡아끄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던전에서는 곧잘 이렇게 야영하곤 했었는데...
“라디야, 도와줄까?”
“아 고마워요 언니.. 저기까지만 늘여놓으면 돼요. 날카로우니 조심하세요.”
“응!”
“....”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라디와 아리엘을 보자 어째선지 먹먹한 그리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배낭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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