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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68화 (168/375)

〈 168화 〉 진입 #6

* * *

[168] 진입 #6

“그러니까... 도란님과 아리엘 언니가 알게 된 지는 일 년 조금 안 됐다는 거예요?”

“응,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봄이었으니까...”

“봄? 여름 아니었어?”

“봄이 맞아. 올해는 워낙 무더웠으니까 그렇게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벌써 그렇게 됐나...”

소담소담 이야기를 나누며 수통을 기울였다. 식사를 마치고 잠에 들기 전, 제각기 배낭에 등을 기댄 채 모닥불처럼 따스한 구슬의 온기를 쬐고 있노라니 거품 이는 맥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라디가 나와 아리엘을 빠르게 번갈아 보더니 호기심이 동했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혹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도란님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열고 계신 분은 좀처럼 보지 못했거든요. 1년이 조금 안 됐으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사이 이렇게까지 가까워지신 과정도 궁금하고요.”

“으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하면 좋을까...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들었어?”

“죄송해요... 베라스틴에 믿을 만한 지인이 있다는 말 외에는 전혀...”

“그래...? 그건 좀 기분 상하는데... 내 얘기는 눈곱만큼도 안 했다 이거지?”

힐난하듯 째려보는 아리엘의 시선이 따갑다.

재빨리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변명했다.

“...알잖아, 나 옛날 얘기는 잘 안 하는 거.”

“...이쁜 여자친구도 사귀었겠다, 나랑 있었던 일은 전부 과거란 거야? 알겠어. 도란은 그런 사람이었구나.”

“도란님... 제가 봐도 그건 좀...”

“그,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구렁이 담 넘듯 슬쩍 넘어가려고 하다가 담벼락에 끼게 생겼다.

서둘러 배낭에서 등을 떼고 외쳤다.

“보, 보류!! 나중에 다 말할 생각이었어! 다만 시기가 안 좋다 보니...”

“너도 부끄러운 건 아나 보네?”

“....”

“...왜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빨리 말해줘요! 그때는 지금의 도란님과는 많이 달랐어요?”

라디가 가까이 붙으며 묻자 아리엘은 내 쪽을 흘겨보더니 맹랑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많이 달랐냐고? 당연하지! 얘 처음 만났을 땐 그냥 짐승이었어 짐승. 언어도 어디서 이상하게 배워가지고 말도 어눌하고, 성격도 진짜 더러운 데다가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그래서 반년 동안 열심히 상식도 가르쳐주고 옷도 사다 입히고 했는데 말도 없이 던전으로 사라지더니 그새 홀라당 여자친구나 만든 거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음... 일단 나랑 얘랑 처음 만났을 때가 정말 최악이었거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 아리엘 그 얘기는 다시 안 꺼내기로...!”

“도란님은 좀 조용히 있어 봐요. ...계속해주세요.”

“...도란이 나한테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야. 근데 얼마나 사람이 고달프게 살아왔으면 저럴까 불쌍해서 다 용서해주고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했는데 이게 웬걸? 어느 날 갑자기 모험가가 되었다면서 옷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내 앞에 나타난 거 있지?”

“그, 그 다음은요?!”

“나한테 은혜를 갚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는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했는데 애가 날이 갈수록 비쩍 말라서 오더라고. 알고 보니 맨날 모험가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의뢰를 망쳤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없는 환자도 지어내가며 약초채집 의뢰를 맡기곤 했는데...”

“자, 잠깐...! 지어내다니!! 필요해서 나한테 맡긴 거 아니었어...?!”

“설마. 그 많은 모험가 중 너를 콕 집어서 의뢰를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래서 일부러 보수도 훨씬 높게 책정했잖아.”

“.....”

마치 진실의 빨간약을 먹은 기분이다.

그간 내가 해왔던 아리엘의 의뢰가 전부 날 위해 꾸며낸 것이었다니...

“...그래도 가끔은 정말 큰 도움이 됐어. 기억나? 야간에 위급 환자가 나타났을 때 서쪽 들판에서 자라는 밤맞이꽃이 꼭 필요했는데 번거롭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던 와중 선뜻 다녀와 준 사람은 네가 유일했잖아. 정말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나타나서 도와준 적도 꽤 있었고.”

“그래도... 설마 스토킹 사건 때도 꾸며낸 거야?”

“무슨 소리야. 그때 도란 네가 범인 잡아줬으면서. ...그래, 사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어. 호위 핑계로 같이 주점 가서 내가 술 사줬던 거 기억나? 너 그때까지 술은 거의 입에도 댄 적 없었지?”

“...그렇긴 하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부턴 긴 마라톤의 연속이었으니.

어쩐지 마주보고 있기가 힘들어 멋쩍게 수통을 기울이자 아리엘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부끄러워? 우리 도란도 많이 순딩해졌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너 나랑 만나고 첫 세 달간은 입꼬리 미동도 안 했잖아.”

“시, 시끄러워. 너야말로 많이 변했잖아.”

“응? 내가?”

“그래, 이전보다 훨씬 밝아졌어. 너도 그때는 업무다 뭐다 하며 일에 쫓기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러게...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련한 미소를 짓는 아리엘에게 따스한 구슬의 불길이 기울어지자 부드러운 은발이 노을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는 새벽에 불침번 서야 하니까 먼저 잘게. 무슨 일 있으면 부담 없이 깨워줘.”

“부끄러워서 도망치는 거야?”

“그럴 리가...! 내일도 한참 걸어야 하잖아.. 너희도 적당히 떠들다 자.”

“알았어, 잘 자 도란. 좋은 꿈 꿔.”

“.....”

함정이 가득한 통로를 거닐며 꽤나 피로가 쌓였던 모양인지, 배낭에 등을 기대기가 무섭게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하지만 그 탓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라디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

“...내가 얼마나 잠든 거지..?”

찌뿌둥한 고개를 돌려 발치의 모래시계를 응시했다. 고운 적색 규사가 흘러내려 텅 비어버린 유리 안에서는 붉게 아른거리는 홍옥의 잔상만이 가득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곁에서 새근새근 단잠에 빠진 아리엘과 라디를 보자 안심이 된다.

“아무 일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리 피로가 쌓여있었다고 한들 불침번 도중 잠들다니, 간과할 수 없는 실책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자 관절 마디에서 뚜둑거리는 뼛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내버려 둘까.”

교대할 시간은 훌쩍 지나버렸지만 그녀들을 대신해 살짝만 더 수고하기로 했다. 두 녀석도 무거운 짐을 메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까. 어차피 잠들었다가 일어난 직후기도 하고.

다 떨어진 모래시계를 뒤집고 배낭에 기대자 새삼 뒤숭숭한 생각이 몰려들었다. 울시와 함께 위험으로 가득한 설원을 가로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베라스틴의 닥친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 납골당으로 향하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기구한 인생이다.

적적한 한숨을 내쉬며 수통의 물로 목을 축였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누군가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귀가 먹먹할 정도의 적막이 내려앉은 통로를 응시하고 있자니 희미한 숨소리 사이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조금 더 늦게 깨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칼집째로 장검을 걸머쥐고 어둠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뼈마디가 땅에 긁히는 스켈레톤 특유의 기척. 놈들을 상대로는 굳이 라디와 아리엘을 깨울 필요도 없다.

마석등을 내세우며 나아가니 얼마 머지않아 허연 인골 세 구가 나왔다.

차분하게 랜턴을 내려놓고는 삽시간에 약진해 칼집을 휘둘렀다.

­빠각!!

“...조용히 해결하자. 응?”

매끄럽게 이어지는 후속타. 새하얀 발동을 즈려밟으며 상체를 떠밀었다. 스켈레톤들이 바닥에 나엎어져 바둥거리자 자세를 고쳐잡고 검집을 높게 들어올려 내려찍는다.

단단한 칼집이 갈비뼈를 강타하자 뼛조각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덜컥! 딸칵딸칵...!

“입 다물어... 애들 깨잖냐.”

­콰직!!

정수리에 일격을 내질렀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골반을 밟아 분쇄했다. 질긴 버팔로 가죽 소재에 강철을 덧댄 부츠는 이 일을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최대한 신속하게 스켈레톤을 깨부수다 보니 어느새 비좁은 통로에 메아리치던 파쇄음도 멎어들어 거친 숨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움찔거리는 뼈다귀들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폈다.

“별것도 아닌 게...”

슬슬 스켈레톤이 출몰하는 걸 보니 내일부턴 본격적으로 언데드가 쏟아질 거다. 어쩌면 지금처럼 맘 편히 휴식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지. 쉴 수 있을 때 잘 쉬어두는 것도 모험가로서 요구되는 기량 중 하나다.

라디와 아리엘이 있는 장소로 막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누구냐.”

재빨리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들었다.

찰나, 분명 통로 저편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스켈레톤과는 상이한 기운. 언데드라기엔 이질적인 존재감.

마석등의 빛을 반사해 날카로운 광택을 드리우는 칼날을 전방으로 겨누며 경계하고 있자니...

­파스스...

“뭣...!”

조명이 꺼졌다.

마석등이 불길하게 명멸하더니 희미한 연기를 피워올리며 픽 나가버렸다. 그 미약한 소음을 기점으로 통로에 깊고 깊은 밤이 찾아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상대의 인기척을 쫓자­

“씨발!!!”

즉각 선회하며 검을 휘둘렀다. 놈의 숨소리가 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까닭.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게 놔둘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허나 은빛 호선을 그리며 나아간 장검은 새빨간 불똥과 함께 가로막혔다.

­까앙!!!

재빨리 후방으로 도약했다. 검을 맞잡은 두 손바닥이 얼얼하다. 완전히 수를 읽혀버렸다.

상대는 압도적인 강자.

­파앗!!

곧바로 맹돌했다. 울퉁불퉁한 노면을 딛고 질주했다. 놈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하는 바, 체중을 그러모아 장검을 내찔렀다.

하지만 칠흑의 물살을 가르며 엄습한 날끝은 허공을 갈랐고, 상대의 옷깃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잇따라 신속하게 장검을 횡으로 휘둘렀지만 이 역시 무위로 되돌아갔다.

“제기랄...!”

조급함.

쉬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간다. 검집으로 사선을 틀어막으며 은검으로 공간을 벤다. 건틀릿으로 놈의 허를 찌르고, 각반 덮인 무릎을 차올렸다. 이내 칼날을 뒤틀어 회심의 일격을 행했지만, 놈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자 허사로 돌아갔다.

‘...상급 기사인가?’

마치 인간답지 않은, 미지의 적수에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쓸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나와 내 동료의 안위를 위협한다면 해치울 뿐이다.

지면을 디딘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투구 속 두 눈동자에 아릿한 살기를 피워올리며 어둠 속을 주시했다. 미증유의 상대. 놈이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났는지, 와중에 왜 반격해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전투를 끝마친 다음에 생각해도 된다.

이런 장소에 무고한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나타나라.”

­츠츠츠츠츳...

[.....]

비좁은 통로를 최대한 활용한다. 장검을 버리고 두 자루 단검을 거머쥐었다. 나는 오감을 최대한 이끌어내 상대를 기척을 쫓았고, 시퍼런 코볼트 단검을 역수로 휘두르며 기민하게 단도를 중단으로 내찔렀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살수(?手).

­카가가강!!

“염병!!”

벽을 박차올랐다. 놈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어둠 속에 기척을 감췄다. 차가운 날숨을 내뱉으며 단검을 휘둘렀고, 단도를 내리찍어 들숨을 끊어냈다. 이윽고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놈의 배후로 쇄도한다. 호흡과 호흡이 맞닿을 간격을 유지하며 두 자루 단검을 난도질했다.

번뜩이는 불똥만이 선연한 칠흑의 공간 속, 나는 상대를 한쪽 벽으로 몰아세웠고, 놈의 등 뒤가 가로막힌 순간 크게 비약하며 칠흑의 단도를 심장이 위치한 곳에 박아넣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무슨...!”

괴한이 내 단도를 뺏어가기 전까진.

결정적인 순간, 지금껏 수도 없이 내 목숨을 지켜주었던 단검이 날 배신했다. 자석에 이끌리듯 날 떠나 상대의 손아귀로 향한 단도. 그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머뭇거린 순간 눈앞에서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귓가에 잔잔히 메아리치는, 기시감 어린 목소리.

[도란...]

“...넌 누구냐.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묻자 마석등이 깜빡이며 한 광경이 망막에 비쳐보였다.

빛을 등진 검은 형상의 소녀가.

[오랜만이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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