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지하 납골당 #1
* * *
[169] 지하 납골당 #1
일단 자리를 옮겼다.
어두컴컴한 통로 한구석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나는 힐끔힐끔 옆을 곁눈질하며 로브 단추를 매만졌다. 마석등의 불빛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옆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숨소리로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묻고 싶은 게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상황에 당면하자 머리가 굳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나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의식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부터 할게..요. 저번에 라디를 구해준 데다가 설원에서 두꺼비 마물한테 습격당할 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셨잖아요. ...전하는 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
끄덕.
“그, 그럼... 그쪽은 대체 정체가 뭐에요...? 아니, 애초에 인간은 맞는 거예요...? 듣자 하니 무슨 여왕이었다고...”
[....]
나와 그녀가 직접 만났던 건 지금까지 딱 두 번. 처음은 던전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동굴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7계층에서 두꺼비의 습격을 받았던 때였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내 그림자 속에서 존재감을 느낀 적은 있었으나 단지 그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명한 ‘호의’였다.
이전에 그녀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험가들을 쓸어버리던 순간에도 나와 내 일행을 살려주었고, 우리를 고대 유적으로 인도해 진귀한 보상을 안겨주었다. 위험한 상황에 나타나 여러 번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일단은 우호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내 결론.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이었다.
“그... 혹시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솔직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쪽은 제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 이곳과는 다른...”
끄덕.
“아니, 절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그쪽을 전혀 모르겠어요. 혹시 비슷한 사람을 착각한 건...”
[....]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도란은... 언제나 예전 모습 그대로네요]
“...그 말은 옛날에 저와 만난 적이 있다는 거네요.”
재빨리 과거를 반추했다.
모험가가 된 후에 만난 인물이라면 비교적 최근이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지고 숲 속에서 생존하던 한 해 동안은 목격한 사람 자체가 극히 드물었으니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은 건 공백의 반년 동안일 텐데...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인물이라면 내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유적에서 보았던 벽화나 기록은 그녀가 어마어마하게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뇌 속에서 엉킨 실타래를 잔뜩 만들어내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언제 어디서 그쪽을 만났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서...”
[미안해요... 말해드릴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름이라도...”
[미안해요 도란.]
“그, 그럼 그...! 저번에 라디한테 듣기를 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마물 고기를 먹으면 힘을 각성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
이상하다.
라디가 대화했을 때는 분명 말이 잘 통했다고 했는데...
“그럼... 오늘에서야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녀가 지금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원인. 라디는 그녀가 실체로 현현하려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굳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내 경험상 이런 건 보통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내 물음에 긍정했다.
[위험해요.]
“위험하다니... 이 장소가 말이에요?”
끄덕.
“아니 뭐... 예상은 했지만...”
정황상 이곳에 언데드의 원흉이 있는 건 틀림없다. 이제 와서 ‘여긴 위험해요!’라는 소릴 들어도 내뺄 수는 없는 노릇. 그런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애꿎은 마석등만 두드리고 있자니 그녀가 잔잔하게 입을 열었다.
[...도란도 환청을 들었죠?]
“그건 어떻게... 그쪽은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조금은요.]
“그, 그렇다면 혹시...! 베라스틴의 기사들이 이번 사태에 연루된 게 맞나요? 게다가 가면을 쓴 무리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던데 놈들이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게...”
[....]
“제길...”
말을 삼키며 혀를 찼다. 답변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 탓.
그녀는 내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지금 도란은...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어디까지 알고 있다니요?”
[스스로에 대해서요.]
“나?”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야 대뜸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곧바로 답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 이 타이밍에 이런 질문을 한 그녀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도란은... 제가 말리더라도 가실 거죠...?]
“네, 이대로 방치하면 베라스틴의 시민들이 몰살당할 테니까요.”
[그걸로 당신이 위험해지더라도요?]
“네.”
[.....]
그녀의 눈에는 이런 내가 어떻게 비쳤던 걸까.
잠시간 초대받지 않은 침묵이 찾아왔고,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같은 외견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극히 인간적인 그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자 그녀가 먼 방향을 바라보며 정적을 깼다.
[그래요... 도란님은 원래 이런 분이셨죠.. 그럼 당부 하나만 할게요.]
“...뭔데요.”
[앞으로 이 아래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눈여겨보지 마세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듣지도 말고요.]
“어째서...”
[그 편이 좋으니까요. 아직 도란에겐 너무 일러요.]
“....”
무엇 하나 명쾌하지 않고 모호한 답변에 되려 생각이 베베 꼬이는 듯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하고 있자니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벌써 가는 거예요...?”
[아쉽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거든요. 부디 제가 한 말을 잊지 마시길...]
“앞으로도 계속 제 그림자 속에 있는 거죠...?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는데...”
[...네, 당분간은 계속 그럴 거예요. 언젠가 기회가 또 있을 테니 조급해하지 말아요. 라디 언니랑 아리엘 언니한테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그럼 오랜만에 대화해서 즐거웠어요 도란.]
“네, 저도요.. 라디랑 아리엘한테도 꼭... 아리엘...? 잠깐!! 너 아리엘을 알고 있었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지만, 어둠 너머로부터 전해져오던 기척이 안개 속의 별빛처럼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너 마저 설명...!!”
[....]
재빨리 팔을 뻗었으나 허공만이 움켜쥐어 질 뿐.
깜빡.. 깜빡...
어느새 돌아온 불빛엔 갈 곳 잃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기울어졌다.
*
“그래요? 그 애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래, 나더러 이 아래에 위험한 게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어. 게다가... 아리엘을 이전부터 알고 있던 눈치던데...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
어수선한 머릿속에 잠을 설쳤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멀찌감치 배낭을 정리하는 아리엘을 눈짓하며 라디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녀석은 형형한 눈빛으로 내 투구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럴 수도 있죠. 괜히 혼란을 줄 수 있으니 아리엘 언니한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위험성에 대해선 알려야 하지 않을까...? 걔가 내 앞에 나타나서 경고까지 할 정도면 분명 뭐가 있긴 할 텐데...”
“음... 그래도 처음부터 위험을 각오하고 들어왔으니까... 정 걱정된다고 하면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될까요?”
“....”
이상하다.
왜 이렇게 차분하지...?
푸른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 애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정말로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긴 할 거예요. 저를 통해서도 아니고 도란님한테 직접 주의를 줬을 정도니까요. 원래 그럴 애가 아닌데...”
“...너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눈 거야.”
“저도 던전에서 이야기를 나눈 게 제일 마지막이었어요.”
라디가 새침하게 날 끌어안고 토닥이더니 아리엘을 거들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게요 언니.”
“아, 고마워 라디야!”
“....”
도둑이 든 방구석처럼 머릿속이 어지럽다.
석연치 않은 게 한가득이지만 이대로 가만히 서 있기도 곤란한 바.
나는 애써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고 발을 옮겼다.
그렇게 금일 소동은 일단락되는 성싶었는데...
“읏...! 도, 도란 왔어?! 댸화는 끝난 거야...?”
“...넌 또 왜 그래.”
아리엘의 반응이 이상하다.
묘하게 시선을 못 마주치면서 이쪽을 심하게 의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얼굴이 조금 붉은 데다가 목소리 톤도 높다.
감기라도 걸렸나...?
“...아리엘, 너 괜찮아?”
“으응? 뭐, 뭐가? 나야 다, 당연히 멀쩡하지! 왜...?”
“아니 너 좀... 안 되겠다. 일로 와 봐.”
“읏...?!”
아리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내 그녀를 한쪽 벽으로 몰아세운 다음 이마에 손바닥을 짚어보았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
진지한 표정으로 가까이서 그녀를 진찰하고 있자니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리엘의 고운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내리니 그제서야 그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파르르 떨리면서도 곱게 말려올라간 속눈썹, 생기 어린 뺨, 어쩔 줄 몰라 움찔거리면서도 살짝 물기에 젖어 촉촉한 입술까지.
‘뭐, 뭐야.’
이래선 마치 사춘기 소녀 같지 않은가?
그 생생한 반응에 당황하고 있자니 문뜩 어제 라디가 아리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전했던 것이 떠올랐다.
옆에서 철조망을 회수하고 있던 라디를 재빨리 구석으로 끌고 가 속삭였다.
“...야.”
“왜요 도란님?”
“너 어제 쟤한테 이상한 바람 넣었냐?”
“아뇨... 딱히...?”
“아니... 누가 봐도 뭔가 있는 눈치잖아.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는데...”
“글쎄요... 그냥 기분 탓이 아닐까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
녀석을 똑바로 주시하며 추궁했지만, 라디는 아리송한 미소로 화답하더니 마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도와 사이좋게 배낭을 어깨에 얹어주는 걸로 봐서는 둘의 관계가 틀어진 것 같지는 않은데...
‘알다가도 모르겠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하루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배낭을 짊어지고 통로 안쪽으로 발길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