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지하 납골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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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지하 납골당 #2
신속하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비좁은 통로를 나아갔다.
서늘한 공기를 헤치며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회반죽 뒤섞인 벽돌은 점차 단조로운 토벽으로 바뀌었고, 먼지 덮인 그림이나 손바닥 크기의 돌 조각상 등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곳곳에 엿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
이제는 다 닳아서 희미해진 벽화를 손으로 훑으며 읊조렸다.
“이건... 이곳에 살았던 옛 선조들이 그린 걸까...?”
“꼭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 같아...”
“...지하에서 태어나 평생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뭘 나타내고자 한 걸까요?”
“글쎄다...”
종이와 양피지가 귀한 세계. 한 시대의 사회상을 알고 싶다면 당시에 남겨진 벽화를 보면 된다.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장소일수록 대중에게 노출되기 쉽고, 그만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까닭에 귀족이나 정치인도 정치적 수단으로 벽화를 이용하곤 한다.
지구에서도 선거철만 되면 난리이지 않은가? 이곳에 민주주의가 들어설 일은 없지만 귀족이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중대한 공약이나 성명을 공표하기 위해 음유시인과 화가를 고용하는 일은 다반사다.
결국 이 세계에선 하찮은 길거리의 벽화일지라도 자세히 훑어보면 흥미로운 정보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잦다는 말이다.
“...이교도의 탄압에 관련된 내용인가 본데...”
“표정이 하나같이 전부 일그러져 있어요. 마치 웃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게다가 전부 단조로운 단색이야... 어디에서도 태양이 묘사된 장면을 찾아볼 수가 없어..”
“땅속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여기에도 산화철이 있으니 붉은색 정도는 낼 수 있었을 텐데...”
벽을 따라 길게 늘어진 벽화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걸었다. 돌과 점토를 갈아 제조했을 걸로 추정되는 염료는 색이 다 바랜 탓에 칙칙한 회색을 띠었고, 부분부분 무너져내려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만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해 기괴한 의식을 치르는 정체불명의 세력과 그림 전반에 걸쳐 묘사된 베라스틴 선조들의 고된 생활로 대략적인 과거사를 유추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미완성인 제단 아래에서 공사를 감독하는 집단을 목격하고 멈춰섰다.
“잠깐 이거... 내가 생각하는 거 맞지...?”
“그런 것 같은데요...?”
“응... 맞는 것 같아...”
가면을 쓴 사람들.
금이 간 벽화 구석에 가면을 뒤집어쓴 단체가 묘사되어 있었다. 기괴한 문양이 가미된 마스크. 설마 이때도 이들이 존재했을 줄이야...
“...토드 씨가 말했던 그놈들이 틀림없어. 아무래도 이 시대에 존재했던 무리가 그대로 이어져서 이번 사태의 배후에서도 암약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리엘, 얘네 이교도 맞지?”
“응... 구도를 보면 틀림없어. 게다가 여기 이 사람이 들고 있는 구불구불한 단검 보이지? 이건 플랑베르주라고 불리는 형식인데 화려하지만 실전성이 낮아서 의장용이나 제사용으로 많이 쓰여. 그마저도 필요 이상의 고통을 가한다는 이유로 정식 교회에서는 사용을 꺼리는 분위기고.”
“전문가시네요...”
“이교도를 판별하는 건 사제가 되려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 중 하나니까! ....어때 도란?”
“...잘했어. 덕분에 확실해졌네... 혹시 무슨 신을 모시는 녀석들인지도 알겠어?”
“으음... 그게 말이지...”
아리엘이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며 칭찬을 바라다가도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이교도의 종류를 식별할 때 가장 확실한 건 모시는 신의 상징물을 보는 건데... 이 벽화에는 마땅히 상징이나 표식이랄 게 없어. 그다음으로는 복식이나 제사상의 배치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건...”
“답이 없다는 건가요...”
아리엘과 라디가 어깨를 떨구었다. 이 시점에서 적의 정체를 파악해두면 대책을 마련하는 데 상당히 유용했을 터, 아리엘도 모든 이교도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 보고 이제 가자”
갈 길이 멀다.
미련이 남는 눈길로 벽화를 바라보는 아리엘과 라디를 재촉했다. 마치 우울함의 파도에 잠긴 듯한 복도를 지나 조금 더 걷자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힌 구획이 나왔다.
지조 없이 뻗어나간 회랑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전염병이 돌고 난 뒤의 마을을 연상시켰다.
품에서 꺼낸 지도와 대조해가며 올바른 길을 찾아가던 중, 아리엘이 기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토드 씨라고 했지? 그분의 조상은 어떻게 이런 지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하수도 관리인 직책이라곤 해도 이렇게까지 깊숙이 들어올 일은 흔치 않았을 텐데...”
“음... 아마 이교도의 박해를 받던 시절에는 이 땅굴을 정비하고 보수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그게 점차 변형되고 사람들이 양지로 나오면서 대중화된 직업으로 바뀐 거고...”
“그런가...? 그럼 토드 씨도 나름 유공자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러게... 뭐, 여러 의미로 감사하지.”
어쩌면 지도를 만든 당사자는 이 아래에 스켈레톤으로 변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계속 발길을 옮기던 도중 장애물을 맞닥뜨렸다.
“이건...”
“함정이네요. ...저희 말고도 선객이 있는 모양이지만요.”
노후되어 바스러진 반석과 자갈 섞인 흙 너머, 마석등이 발하는 환한 조명이 부자연스럽게 끊겨있었다. 통로 전체에 걸쳐 파인 수직굴 아래에는 날카롭게 다듬어진 석창이 돋아나 있었고, 번뜩거리는 갑주와 녹자색으로 변색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단순 시체라고 일축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그중 몇몇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세하게 손가락을 꿈틀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데드의 초기 증상... 피부가 급격하게 괴사하고 구더기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어... 이대로라면 곧...”
“꼴 좋네. 부패한 무뢰배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말로에요. 기사들이 이 길로 온 걸 보니 잘 찾아가고 있는 모양인데요?”
“.....”
라디가 꼬리를 빳빳이 세우며 냉소하자 아리엘이 흠칫 물러났다.
이내 조심조심 목소리를 낮추며 녀석에게 물었다.
“그... 우물가에서도 그렇고... 라디는 기사를 싫어하는 거야?”
“네, 마물이나 도적보다도 더요.”
“하, 하지만 잘 찾아보면 청렴한 기사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전 본 적이 없네요.”
라디가 땅에 끌리는 로브 옷깃을 획 잡아당기며 사납게 내뱉었다. 비강을 들쑤시는 악취와 날파리에도 살짝 콧잔등을 구겼을 뿐, 차가운 살의가 남실거리는 눈동자로 주검을 응시하는 녀석을 보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런 라디를 살며시 품에 끌어당기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진정해.... 구더기가 번데기로 변했어. 죽은 지 일주일 정도 흐른 것 같은데... 저기 함정 안쪽에 보이는 건 수레인가...?”
들끓는 구더기 사이, 부서진 판자 따위가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함정의 일부분이겠거니 생각했겠지만, 이곳은 땅속 깊은 지하. 정말 드물게 나무뿌리 같은 걸 보긴 했어도 목제 구조물은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조금 흥분이 가셨는지 라디가 내 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바큇살이 있는 거로 보아 수레가 맞는 것 같아요. 뭔가를 운반하려던 모양인데..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요. 아리엘 언니, 혹시 불 좀 비춰 줄 수 있어요?”
“으, 으응...! 잠시만...”
아리엘이 주문을 외우자 하얀 광채가 피어올라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를 기점으로 우글거리던 구더기가 뜨거운 열기라도 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덕분에 함정 내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건... 짐승? 사람 사체가 아니에요. 뿔이 있는 거로 보아 새끼 염소 같은데... 과일 비스무리한 것도 있어요.”
“그래, 저기 술잔하고 접시도 있네. 의식에 쓸 준비물을 옮기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이야. ...이쯤이면 기사가 이교도에 가담했다는 정황으로 봐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리엘, 어떻게 생각해?”
“응... 지하에 이교도 무리가 숨어든 걸 기사단이 알아채고 토벌 작전을 벌이는 중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쯤 되면 무리인 것 같아.”
“그럼 이제 관건은 영주까지 한통속인지, 아니면 그 산하의 누군가가 독단으로 꾸민 건지가 문제네... 아리엘, 넌 이전에 영주성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지. 그때 영주는 어떤 사람이었어?”
구덩이 옆으로 난 샛길을 신중하게 발로 디디며 묻자 아리엘이 걱정스럽게 쳐다봐오며 답했다.
“으음... 나도 잠깐 인사를 나눈 게 다라서... 그 당시에는 아주 평범해 보였어. 아마 독실한 베그디아교 신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하지만, 난 귀족 같은 게 아니라 사제 자격으로 초대...”
“그래, 아무렴. 함정 바깥쪽은 안전한 것 같으니까 이쪽으로 건너가자.”
“전혀 안 믿고 있잖아!”
아리엘이 뺨을 부풀리며 따질 기세였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후드를 푹 눌러주었다.
그렇게 투구에 들러붙는 쇠파리를 떨쳐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금씩 통로 구석에 떨어져 있는 도자기 파편, 돌로 된 식기, 검게 타버린 횃불 조각 따위를 지나치며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땅굴이 끝나고 더 깊은 지하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서늘한 냉기가 짙게 침체되어 푸른 색조를 띤 석제 계단을 내려다보며 멈춰서자 라디와 아리엘이 나직하게 침음했다.
“도란님... 이 밑에서 고약한 악취가 나요.. 언데드 특유의 냄새가...”
“...엄청난 사기가 올라오고 있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이야...”
“그래, 이 아래가 지하 3층이야. ...시신들이 안치된 장소이기도 하고.”
지도를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구태여 경고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아래에 끔찍하게도 불길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그럼 내려간다?”
“....”
“....조심해.”
마석등을 앞으로 드리우고 서서히 디딤판에 발을 디뎠다. 고대 성벽에서나 볼 법한 암석을 겹겹이 쌓아 만들어진 층계는 습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결로 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물방울이 벽을 적시고 흘려내려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극지방의 기록 보관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꼭 사람들의 악몽을 채워놓은 해저면 아래로 천천히 잠수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리엘, 축복 좀 걸어줘.”
“....”
마석등조차 광채를 잃고 한층 어두워졌다.
은빛 반사광을 발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내세우고 계단을 내려간 지 약 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내리막길에도 드디어 끝이 보였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내 신장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듯 육중한 석문이었다.
나는 그 아래 성인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 수 있을 법한 개구멍을 바라보며 검 끝을 내렸다.
“...스켈레톤이 어디서 기어나왔는지 알겠네. 들어가자.”
“....”
그렇게 우리는 구멍을 비집고 지하 납골당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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