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지하 납골당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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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지하 납골당 #5
잠잠...
“도란, 얘 조용해졌는데?”
“...뭐가 또 오려나 보다. 준비하자.”
“제 쪽으로 유인해주시면 저격해서 전력을 깎아놓을게요.”
“그래.”
제법 널찍한 복도 한복판, 서둘러 몸을 숨길 장소를 물색했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수북한 뼈 무더기 뒤에 숨자 통로 너머에서 해골 병사 두 마리가 나타났다.
짧은 단창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회랑을 가로지르는 엘리트 스켈레톤.
“...떼거리로 몰려들기 전에 해치우자.”
“네.”
라디가 쇠뇌를 2연 격발했다. 고농도의 염산 주머니가 달린 볼트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자 잠시 후 각목 더미가 쓰러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마석등 위에 덮어두었던 로브를 들추며 달려나갔고, 뼈 마디마디가 들러붙어 옴짝달싹도 못 하는 해골 병사 두 마리를 칼집으로 내려찍었다.
달칵! 달칵!
까가가각..!
“어우 씨 겁나 단단하네... 아리엘, 혹시 더 오는 놈은 없지?”
“응, 일단 다른 기척은 안 느껴져.”
“그래? 다행이네. ....혹시 같이 할래?”
“아니, 난 사양할게.”
“이거 은근 재밌는데...”
빠각!!
그르르르...
두 스켈레톤은 뼈마디가 완전히 작살이 난 뒤에야 침묵했다.
로브에 묻은 뼛가루를 털어내며 읊조렸다.
“이 짓거리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
그간 언데드가 득실거리는 지하 납골당 내부를 전전하며 알아낸 사실.
놈들은 빨리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수십 마리가 떼거리로 몰려든다.
개미들이 페로몬으로 교류하는 것처럼 언데드도 저들만의 의사소통 체계가 있는지 한 놈을 살려뒀다간 동료들이 득시글득시글 들이닥치곤 했다. 노획한 해골에 두꺼운 천을 감아둔 것도 그 때문. 놈은 평소에 모터가 달린 캐스터네츠마냥 시끄러우면서도 같은 언데드가 나타났다 하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으니.
‘그나마 그때처럼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지...’
상기 경우가 아니라면 전처럼 병장기를 장비했던 해골 전사를 대량으로 조우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보통 몰려다니기보단 두셋 정도만 짝을 지어 배회하는 편.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스켈레톤이 녀석들을 꺼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도를 마석등 불빛에 비춰보며 입을 열었다.
“...아리엘, 혹시 자아를 가진 언데드도 있어?”
“아니. 언데드는 일말의 자아도, 감정도 없어.”
아리엘이 단칼에 부정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했던 놈들은 명확하게 사고할 줄 아는 것 같았는데... 수준급의 연계를 해오질 않나... 분한 듯 무기를 두드리지 않나... 그건 뭐였어?”
“으음... 그건 말이지... 언데드를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밝혀낸 게 몇 가지 있어. 놈들은 지능이 없지만... 생전의 기억을 일부 가지고 있거든.”
“...무슨 소리야. 지성은 없는데 기억은 있다니.”
“음... 모든 생명체에 마나가 깃드는 건 알고 있지? 풀 한 포기부터 들짐승은 물론이고 인간도 마찬가지야. 언데드가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도 강력한 사념이 마력 때문에 구체화 돼서 그런 거고. 그런데... 이 사념이란 게 약간 모호해. 이게 강할 경우엔 생전의 습관이나 몸에 밴 버릇 같은 게 나타나기도 하거든.”
“그럼 우리가 봤던 해골 전사는...”
“응, 아마 살아있었을 땐 어마어마한 강호였을 거야. 지금과는 비교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간혹가다 엄청 강한 언데드가 태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신성력에도 끄떡없는... 데스 나이트 같은 개체 말이야.”
“만약 S랭크 정도 되는 실력자가 언데드로 변했다간... 재앙이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명망 있는 마법사나 기사가 죽었을 때 매장보단 화장을 권장하는 거야. 나라에서 장례 비용을 일부 부담해주는 것도 마찬가지고. 혹시라도 엄한 데 묻었다가 고위 언데드로 변하면 큰일이니까.”
“그런 깊은 뜻이...”
그렇다면 조금 납득할 수 있다. 놈들이 기민하게 내 공격에 대처했던 건, 찬란했던 과거의 잔재 같은 거겠지. 죽어서까지 그 정도의 무위를 선보이다니 살짝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럼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럼... 그 해골 전사는 전부 이교도 세력이었겠네? 주민 측에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이런 곳에 쫓겨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어...? 음... 뭐, 그렇겠지..?”
아리엘이 살짝 당황한 듯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신음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지도를 품에 넣으며 읊조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네? 뭐 말이에요 도란님?”
“지도에 따르면 이쯤에서 수직굴이 나온다고 되어있거든. 거길 이용해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
“아, 듣고 보니 어렴풋하게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할버드 전사의 두개골을 앞세운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지런히 복도를 나아가다 보니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미풍이 선명하게 체감될 정도로 강해졌다.
통로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유골의 숫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옷자락을 여미고 로브 틈새로 들이치는 추위를 틀어막으며 나아간 지 삼십여 분 정도가 더 흘렀을 무렵.
“...도착했네.”
마석등으로 반대편을 비추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와 마주쳤다.
발아래 도사린 시꺼먼 심연으로 후두둑 떨어져내리는 돌멩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깊은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만전의 상태로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보호막을 펼쳐둘게. 잠시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낭떠러지 아래에선 세찬 바람과 간헐적인 물소리만이 메아리칠 뿐, 팽팽한 적막으로 그득했다.
검집을 도로 허리춤에 위치시키며 발치의 돌멩이를 걷어차자 조금 뒤에야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오십 미터는 족히 넘겠어. 떨어졌다간 그대로 즉사하겠네.”
“지하에 이 정도 공간이라... 무슨 용도로 만든 공간일까요?”
“글쎄...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아리엘.”
“응!”
그녀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조명이 흘러나와 떨어졌다. 백색 광채가 절벽 아래로 천천히 낙하하자 울퉁불퉁하게 불거진 바위 굴곡, 암붕에 퇴적된 수많은 두개골, 그리고 여름철 단물에 꼬인 개미처럼 즐비한 뼈다귀를 비추었다.
라디가 로브를 움켜쥐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서, 설마... 저기 바닥에 깔린 게 죄다 사람 뼈에요...?”
“으... 어떻게 이런 수의 해골이...”
“...어딘가 내려가는 길이 있을 테니 잘 찾아보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자, 잠깐...! 여길 내려가겠다고요?!!”
라디가 총소리에 놀란 새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나는 멋쩍은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다독여주었다.
“...어쩔 수 없어. 지도에는 여기로 내려가야 한다고 나와있는데. 다른 길도 있긴 한데 거기까지 가려면 이틀은 더 걸어야 할걸?”
“그, 그래도... 혹시 지도가 잘못된 건...”
“.....”
“으윽...”
라디가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이 절벽을 내려가야만 할 운명이라는 걸 직감한 거겠지.
나와 아리엘은 마석등을 기울여가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고, 곧 낭떠러지 옆으로 난 위태위태한 층계 하나를 발견했다. 난간조차 없는 낙후된 계단. 심지어 발을 디딜 만한 공간도 손바닥 두세 뼘 정도 너비밖에 없다.
“함정은 아니겠지 도란...?”
“모르겠어... 지도에는 아니라고 나와 있긴 한데.. 불쑥 화살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워낙 많이 겪어서 말이지.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너희 둘은 멀찌감치서 따라와.”
“알았어, 보호막은 계속 유지해 둘게. ...라디야, 이제 내려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
붉은 후드 아래 두 푸른 눈동자가 바쁘게 좌우로 오갔다.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도란님, 잠깐만 손 좀 잡아주실 수 있어요...?”
“그래, 이리 와.”
차가운 라디의 손바닥을 녹여주었다. 녀석을 끌어안고 다독여 안심시킨 뒤, 배낭을 짊어지고 신중히 아래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고작인 협소한 계단은 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흥건하게 고여있었고, 축 늘어진 배낭의 무게와 주기적으로 상부에서 몰아치는 돌풍 탓에 균형을 유지하기 여간 쉽지 않았다.
절반 정도 내려왔을 즈음, 아리엘이 긴장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도란... 막상 도착했는데 저 뼈다귀들이 전부 언데드로 돌변해서 몰려오면 어떡하지...?”
“...어쩔 수 없지,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수밖에. 하지만 이 지하 납골당의 최심부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해.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길까지 돌아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거든. ...그리고 이 녀석이 시끄러운 걸 보니 당장은 괜찮을 거야.”
그륵..! 그르륵...!!
포대기를 들어올리자 할버드 전사의 머리통이 노발대말하며 이를 갈았다. 이내 잘근잘근 천을 씹으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마에 딱밤을 씨게 갈겨주자 곧 잠잠해졌다.
라디가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으... 그 해골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꺄아아아아!!!!”
“라디야!!!”
“제길!! 쫓아가자 아리엘!!!”
“응!!”
라디가 미끄러졌다.
녀석은 사낭 쥐 수인. 타고난 균형 감각 덕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어느 정도는 무사하다고 하지만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와 아리엘은 가파른 계단을 황급히 질주했고, 구덩이 밑바닥에 도착하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녀석에게 달려갔다.
“라디야 괜찮아?!!”
“라디야!!”
“으... 전 무사해요.. 그냥 꼬리를 살짝 삐었을 뿐이에요.”
“다행이다...”
수북하게 쌓인 뼈가 부서지며 충격을 완화해준 모양이다.
라디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표정을 찡그렸지만, 낙하 직전에 배낭을 떨쳐냈는지 크게 다친 부위는 없어 보였다.
아리엘이 손바닥을 펼치며 다가갔다.
“...치유해줄 테니 잠깐만 그대로 있어 줘.”
“괜찮아요. 치유의 힘을 쓰면 아리엘 언니가 지치잖아요.”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요. 이 정도면 하루 쉬어주는 것만으로도 회복할 수 있어요.”
아리엘이 난처하게 눈썹을 늘어뜨렸지만, 라디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걸까.
“....정말로 괜찮겠어?”
“네, 좀 놀라긴 했지만 그게 다예요. 덕분에 빨리 내려왔네요. ...그보다 여긴 대체 어떤 용도로 쓰이던 공간일까요? 지상도 아니고 지하에 이 정도 넓이라니...”
“...지도에 나와 있는 규모는 더 커다래. 이 밑으로도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있는 모양인데... 갈 데 없는 유골들을 방치한 곳이 아닐까?”
“잠깐, 원래는 이 밑에도 공간이 남아있다고요? 그럼 이 구덩이가 전부 다 뼈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에요...?”
“...아마도.”
라디가 발을 들어올리며 기겁했다.
나는 피식 웃은 뒤 옆에 떨어진 배낭을 주워들며 읊조렸다.
“그러니까 조심해. 자칫하다가 파묻히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못 빠져나올 테니까.”
“그런... 익사도 아니고 뼈에 파묻혀 맞는 죽음이라니... 최악이에요.”
“그러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쓰레기 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유골에서는 결로 현상으로 맺힌 물방울이 똑 똑 아래로 떨어져내려 망가진 실로폰처럼 기이한 음색을 자아냈다. 만약 이 아래에 빠진다면 모래 수렁에 갇힌 여행객처럼 꼼짝없이 질식사하고 말겠지. 수천 수만 해골 파도에 휩쓸려.
“한데... 이렇게나 많은 시체가 어디서 난 걸까? 베라스틴에 이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을 리 없는데...”
“...그만큼 이교도의 악행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는 게 아닐까? 이 근처의 사람이란 사람은 싸그리 다 납치해서 매장한 모양인데.”
“으음... 그럴지도...”
혹여나 발밑에서 창백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발목을 붙잡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나아가기도 잠시, 어느새 구덩이 반대편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밋밋한 석벽만이 있을 뿐, 나는 지도로 눈을 돌리며 침음했다.
“이상하다...”
“왜, 도란? 뭐가 잘못됐어...?”
“아니, 분명 이쯤에 다음 층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나와있는데...”
“...저도 좀 보여주세요.”
라디가 내 팔 사이로 쏙 들어와 지도를 살펴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음... 아무래도 탈출구도 해골 더미에 파묻힌 모양인데요?”
“파묻혔다고?”
“네, 여기 보세요. 문이 나 있는 위치가 밑바닥이잖아요. 저희는 이 중간쯤에 있고요.”
“...그러게, 이거 큰일이네.”
이래선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지도에 따르면 공동 윗부분에도 통로가 나 있는 모양이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외줄 다리가 무너져내린 탓에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도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아리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응, 장담하진 못하지만... 라디도 잠깐 와볼래?”
“....?”
그녀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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