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지하 납골당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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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지하 납골당 #6
아리엘이 제안한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도란님, 찾았어요...?”
“아니... 아직.”
“어렵네... 난 저쪽 둘러보고 올게!”
실제 이행 난이도는 별개라는 게 문제지만.
삽 대용으로 칼집을 움켜쥐고 해골을 퍼올렸다. 도중부터는 성에 안 차 양손으로 두개골을 끄집어냈다. 어느샌가 내 뒤로는 미끄럼틀을 타고 놀 수 있을 만큼의 뼈 무덤이 쌓여있었고, 거친 숨소리와 뼛조각이 쓸리는 시끄러운 소음만이 구덩이에 울려퍼졌다.
지반이 약한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그야...
“화약은 다 준비됐어요. 이제 말만 해주시면 언제든지 폭파할 수 있어요.”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줘.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가끔은 정공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지.
아리엘과 함께 수북한 해골을 헤집었다. 이 중 어딘가에 암석층이 얇은 장소가 분명히 있을 터, 그곳을 발파하면 다음 구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적어도 이 드높은 인골탑을 밑바닥까지 파 내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대안일 거다.
미네랄을 캐는 scv에 빙의해 산더미 같은 유해를 치워나가고 있자니 문뜩 의문이 들었다.
“...라디야, 근데 넌 어떻게 그런 걸 만들게 된 거야? 어디 책에 나와 있지도 않았을 텐데...”
“음... 저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새로운 독극물을 제조하던 도중에 스모키 모스의 분말이랑 그린 슬러그 진액을 배합하니 가연성 가스가 생겨나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 이것저것 실험해보다 보니 알게 됐죠.”
“그래? 대단하네... 그런 능력이 있으면 마물을 잡을 때도 유용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모반죄로 잡혀갈 수도 있으니 보는 눈이 많으면 못 써요. 더군다나 가스가 순식간에 흩어지면 불이 안 붙으니 바람이 많은 야외에선 무용지물인 데다가, 습기가 차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도 해야 하고요. ...무엇보다 엄청 비싸요.”
“그래도 뭐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값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덕분에 이번에는 편하게... 어?”
“...왜요? 뭐 찾았어요?”
“아니... 방금 발밑에서 뭔가 꿈틀거린 것 같았는데... 아리엘, 랜턴 좀 줘봐.”
“무, 무섭게 왜 그래...!”
그녀가 마석등을 들고 다가와 바닥을 비추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조명이 뼈로 가득한 공동을 비추자 공허한 해골의 눈두덩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건 아무것도...
“...내가 잘못 봤나?”
“뭔가 있었어?”
“응, 분명히 작고 반짝거리는 게... 젠장!!!”
찰나ㅡ
아리엘의 부츠 옆에서 푸르스름한 반사광이 번뜩였다. 다급하게 그녀를 잡아끌고 마석등을 전방으로 내밀자 그곳엔 자그마한 형체들이 바짝 꼬리를 세우고 있었다.
“래, 래서 스콜피온이다!!”
“라디야 이쪽으로 와!!!”
“가, 갑자기 어디서...!”
황급히 구석으로 물러났다. 랜턴을 지면 가까이에 드리우자 뼈와 뼈 사이 어두컴컴한 틈새에서 기어나오는 무수한 음영이 보였다. 검은 집게발을 딸칵거리며 빠르게 몰려드는 작은 악몽들이.
라디가 허겁지겁 발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도란님!! 아직 멀었어요?!!”
“찾고 있어!! 아리엘!!!”
“응!!! 성스러운 빛이여! 성화(?火)!!!”
카가가각!!!
화르륵!!
아리엘이 짧은 영창을 외치자 뻗어나간 백색 불길이 전갈을 불태웠다. 하지만 안도할 틈 따윈 없다. 곧 해일이 몰아치듯 마석등의 불빛이 닿는 너머에서 시꺼먼 파도가 일어났으니.
저건 마법으로도 못 막는다.
전갈로 이루어진 검은 장벽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도란님!! 시간이 없어요!!!”
“염병!! 나도 알아!!!”
허겁지겁 바닥을 파헤쳤다. 더 이상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해골을 들쑤실 때마다 전갈이 튀어나왔지만 부츠로 짓밟아 떨쳐냈다. 한 놈이 바지 속으로 기어들자 허벅지를 부딪쳐 터트렸다.
“으읏...!!”
“아리엘!!!”
“나, 난.. 괜찮으니까.. 빨리...!!”
“씨발!!!”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
정신없이 해골 더미를 헤집었다. 전갈 예닐곱 마리가 내 팔다리를 찔러댔지만 이를 악물어 감내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제발... 제발... 여기 어딘가에... 큭?!”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손을 놀리던 차, 돌연 차가운 물줄기가 뺨을 때렸다. 투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방울. 재빨리 옷소매로 떨쳐내고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희미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찾았어 여기야!!!”
“물러나세요!!!!”
라디가 달려와 내 옆에 주저앉았다. 녀석의 품에는 경고 라벨이 붙은 철제 깡통이 여럿 들려있었고, 나이프로 측면에 칼집을 내자 맹렬한 기세로 우윳빛 연막을 뿜어냈다.
라디가 벽 틈새에 절박하게 용기를 밀어넣으며 외쳤다.
“도란님!!!”
“그래!!!”
나는 서둘러 그녀들을 끌어안고 자리를 이탈했고ㅡ
아리엘의 손끝에서 피어난 불똥이 가연성 가스에 맞닿은 순간 거대한 폭발이 발발해 석벽 일부를 날려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ㅡ!!!!!!!!!
“크윽...!! 꽉 잡아!!!”
울려퍼지는 이명, 남실거리는 화염, 비강으로 들이차는 검은 연기.
무너져내리는 인골탑을 뒤로하고 우리는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는 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
.....
부그르르...
뽀글뽀글...
“...푸하!!! 뒤지는 줄 알았네... 다들 괜찮아?”
“으... 아퍼라...”
“읏...”
주변을 둘러보았다. 짧은 부유감 이후 떨어진 공간에는 청명한 지하수가 가득 차 있었고, 커다란 웅덩이 너머로는 널찍한 복도가 쭉 이어졌다.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신히 뭍에 다다랐다.
“...다들 다친 덴 없어?”
“네, 저는 무사해요. 윽...! 귀가 좀 아프긴 하지만...”
“나도... 가까이서 폭음을 듣는 바람에...”
“...그래도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여서 다행이야.. 라디야, 해독약 챙겨온 거 있으면 좀 꺼내줄래?”
“네, 잠시만요. 가방 안쪽에 넣어놨는데...”
밀랍을 녹여 배낭에 방수 처리를 해두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물자가 죄다 젖어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니.
라디가 배낭에서 꺼낸 나무곽을 비틀자 점도 높은 녹색 크림이 엿보였다.
“잠깐...! 그건 뭐야...? 냄새가 지독한데...”
“벌레에 물렸을 때 바르는 연고에요. 래서 스콜피온은 독성이 약하니 이걸로도 충분하거든요. 등에 발라 드릴 테니 옷 벗으세요.”
“...넌 안 발라도 괜찮아?”
“네, 전 독성에 면역이 있잖아요.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그럼 아리엘부터 발라줘. 난 아직 참을 만하니까.”
“읏... 난 괜찮으니까 도란부터...”
“괜찮기는... 잔말 말고 빨리 라디한테 봐달라고 해. 너도 독은 잘 치유 못 하잖아.”
“으... 알았어..”
두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로브를 벗어 말리고, 건틀릿과 각반을 분리해 그 옆에 늘여놓았다. 장검과 단검은 녹이 슬기 전에 꼼꼼히 물기를 닦아내고 오일을 도포했다. 한데...
뒤통수에 들러붙는 묘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라디와 아리엘이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 그야... 연고를 바르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자리 비켜줄게, 잠시만...”
“아, 아냐...! 혼자서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그, 그냥 있어도 돼...!! 천으로 가리면 되니까...”
“....”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
그간 혼성 파티의 가장 큰 문제점을 까먹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손을 내저어 엿볼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고는 마저 장비 점검에 몰두했다. 이렇게 습한 환경에서 젖은 상태로 무장을 방치했다간 금방 녹이 슬 수도 있는 바, 칼집을 뒤집어 안에 고인 물기를 털어내... 에라이.
“...야, 늬들 대체 뭘 하길래 그리 소란스럽...”
“보, 보면 안 돼!!!”
“....”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담으며 참고 있자니 지척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야?”
“이제 도란님한테도 연고 발라 드릴 테니 가만히 계세요.”
“내가 해도 되는데...”
“등은 바르기 힘들잖아요. 상의 벗어봐요. 뒤돌지 말고.”
“그래.”
단추를 풀어 셔츠를 탈의하고 등을 맡겼다. 어째선지 부산스러운 인기척을 의식하며 기다리자 잠시 후 환부에서 치덕치덕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아니 근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라디가 아니라 왜 네가 여기 있어?”
“앗...!”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 살색이 보여 재빨리 고개를 되돌렸다.
“....방금 봤지.”
“수, 수건밖에 못 봤어...! 아니, 근데 왜 라디가 아니라 네가 연고를 바르고 있는 건데...?”
내가 라디의 손길을 착각할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로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했는데 바로 알아맞히시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못 알아챌 줄 알았는데.”
“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함께 보낸 시간이 있는데.”
“그런가요... 솔직히 기분은 좋네요.”
라디가 내 투구를 콩콩 두드렸다.
반면 아리엘은 꿋꿋하게 내 등에 연고를 도포했고.
연인의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살갗을 훤히 내보이고 있다는 묘한 상황에 쿡쿡 찔러오는 불편함을 감내하기도 잠시, 아리엘의 손길이 스노우 타이거에게 당한 흉터에서 머물더니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새 상처가 또 늘었네..”
“모험가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지워줄까? 어렵긴 해도 도란한테라면 해줄 수 있는데... 같은 동료기도 하고.”
“괜찮아, 어차피 또 생길 텐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필요하면 말해 도란...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그녀와 피부를 맞대고 있자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늦은 시각, 어슴푸레한 가도에 기울어지는 가로등불을 맞으며 의뢰를 마치고 돌아와 치유소에 들르면 이렇게 단둘이서 상처를 치료받곤 했는데...
돈이 없는 날 배려해 아리엘이 다른 사람들 몰래 무료로 치유해주었으니.
“...등 다 발랐으면 연고 이리 줘. 나머지는 내가 바를게”
“정말로 더 안 도와줘도 되겠어...? 도란, 아까 너 무리하다가 많이 쏘였잖아. 나머지도 그냥 내가 발라줄 테니까...”
“...나 이번엔 중환자 아니야. 아직 그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거든?”
일부러 장난스러운 어조로 내뱉고는 재빨리 나무곽을 낚아챘다. 바지 밑단을 걷어올려 환부에 연고를 도포하고 셔츠를 갈아입자 짙은 피로감이 몰려든다.
공기 중을 맴도는 미묘한 공기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얼추 정비 마쳤으면 빨리 이곳을 뜨자. 큰 소란이 났으니 소리를 듣고 이상한 놈들이 꼬일지도 몰라. 이쯤이면 기사나 이교도가 나올 때도 됐거든.”
“네, 그게 좋겠어요. 언니도 마저 갈아입고요. 일단 지금은 젖은 옷이라도 걸쳐요.”
“...응. 근데 이대로라면 옷을 입어도 속옷이 보일 텐데 괜찮을까...?”
“....”
갑자기 뒤통수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짐짓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안 돌아보고 선두에서 걸을 테니까 걱정...”
““거짓말.””
“....”
아니 어째서...?
라디가 덧붙였다.
“...도란님 가슴 엄청 밝히잖아요. 저랑 연애 초기에만 해도 손 몇 번 잡았다고 흥분해서 이곳저곳 만지려 하질 않나... 악어 오일을 발라준다는 핑계로 스킨쉽을 하려고 하질 않나... 한 번은 말톤님이랑 불침번 순서까지 바꿔가면서 밤중에 제 잠자리로 기어들어와서는...”
“응... 도란은 우리 치유소에서도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어. 맨날 음침한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도 볼 수 없는데 근처를 지날 때면 매번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동료 치유사들이...”
“무, 뭣...?! 그, 그건 진짜 오해야!!! 단연컨데 난 그런 적이 한 번도...!”
“너 내가 진찰해줄 때면 힐끔힐끔 흘겨보는 거 다 알거든?”
움찔!
“그리고 너 예전에 나랑 주점 갔을 때도 도수 높은 술만 골라서 계속 먹이더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있었어요?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응,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나는 천장을 쳐다보며 애꿎은 한숨만 뻑뻑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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