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76화 (176/375)

〈 176화 〉 지하 납골당 #8

* * *

[176] 지하 납골당 #8

난 누굴까.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인간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의문. 성 아우구스티노가 제시했고, 르네 데카르트가 견고히 한 성찰처럼 논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응당 떠올렸을 질문이다.

하지만 그중 명쾌한 답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 확신한다.

나는 유독 심했다.

특이한 아버지 탓에 걸핏하면 생사를 오갔고, 오지에 고립되어 홀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레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수도 없이 자문했다. 과연 나라는 인간은 무엇일까 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평범했다.

이 세계엔 별의 숨결만큼이나 무수한 인생이 있고 나는 그들 중 하나.

아무리 포장해봤자 발에 채이도록 흔한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정체가 뭐냐고?”

“....”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적막이, 정적이 숨통을 조여왔다.

라디는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아리엘은 종잡을 수 없는 시선으로 내 투구 안쪽을 들여다본다.

굳게 틀어막힌 입을 열었다.

“...유도란. 이게 내 진짜 본명이야. 생소하지?”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봐. 적어도 이 비스마르크 왕국에 그런 성씨는 존재하지 않아. ...도란 넌 어디서 온 거야?”

“글쎄... 나도 묻고 싶네.”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벽안이 서리를 품었다.

늘상 날 따스하게 지켜보던 눈길은 의혹의 파도가 뒤섞여 암운이 드리웠다. 입가에 반짝이던 생기 넘치는 미소 또한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두 번 다신 녀석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말해줄 수 없어.”

“...너 정말로 그럴 거야..?”

“....”

“도란 제발...”

“미안.”

“....”

백조의 깃털처럼 우아한 속눈썹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표정이 잠시 무너지고 슬픔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결연하게 각오하더니 아리엘은 그간 참아왔던 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도란, 너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러니까 여태껏 허물없이 지내 왔고. 그런데 넌... 단 한 번도 솔직해진 적 없더라. 내가 뭘 물어봐도 항상 모면하기에 바빴어. 아니면 나는 너한테 그저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거야?”

“...그럴 리가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난 진심으로 너한테 감사하고 있어. 목숨을 빚진 걸 떠나서 지금 내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건 전부 네 덕이니까.”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 예전에 뭐라고 말했어. 흉터가 있어서 투구를 못 벗는다고 했잖아. 그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숨겨야 할 정도로 네 얼굴이 그렇게 중요해? 내가 너하고 보낸 시간이 얼만데 나는 내가 구해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보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래, 그건 일단 어떻게든 넘어간다고 쳐. 무지무지 열받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잘난 출신 하나 말해주는 것 하나도 그렇게 어려워? 북쪽 마을 태생이라는 어쭙잖은 거짓말이나 또 하고 말야. 아니, 애초에 네가 했던 말 중 진실된 게 있기는 한 거야...?”

“....”

격양된 어조. 상기된 피부.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색.

봇물이 터진 듯 아리엘이 말을 쏟아냈다. 분개하면서도 서글픈 색채를 띤 눈동자는 내 뇌리에 박혀 선연하게 기억된다.

그간 쌓여온 게 많을 만도 하다.

지금까지는 그녀의 상냥함에 기대어 덮어오기 바빴으니. 결국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리엘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이제 거짓말은 안 된다.

아리엘이라면 어떤 감언으로 포장하든 전부 꿰뚫어 볼 거다. 지금까지 의문을 표하지 않았던 건, 모두 그녀가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한 발자국 뒤에서 양보해줬기 때문이니까.

나 또한 내 은인이기도 한 그녀를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부딪히자.

“...그래, 솔직해질게. 아리엘, 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

“뭘 더 놀랄 수 있겠어... 각오라면 이미 마쳤어. 널 처음 만났던 날에. 기억 안 나? 우리 첫 만남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참 기구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천천히 등을 젖히자 회랑에 그림자가 진다. 어둠에 가라앉은 마석등은 혼탁한 광채를 자아낸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자 망양한 복도에 짧은 침묵이 찾아왔고,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운 그녀가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내 손등 위로 살포시 포개어진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정말 듣고 싶어?”

“....”

아리엘은 대답 대신 내 투구를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마치 쾌청한 여름날의 하늘처럼, 지중해의 푸른 연안을 담아놓은 듯 선명한 연파랑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근심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그녀는 내가 막 모험가에 입문했을 무렵부터 라디를 만나기 전까지 내 전부였으니.

저 안에 담긴 나는 어떤 인물일까를 상상하며 천천히 털어놓았다.

나의 유년 시절을.

“.....”

깊은 숨을 내쉬며 긴 문단에 마침표를 찍었다. 떨리는 심장을 다그쳐 오랜 비화를 이야기하고 나자 이전에 없었던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

불현듯 통로를 가로질러 온 손돌바람 한 줄기가 고운 은발을 살랑이고 난 뒤에야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라디도 알고 있었어?”

“....”

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리엘은 그런 나와 라디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입가를 가리고 고민에 빠졌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믿어주는 거야..?”

“...솔직히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건 알겠어. 너는 거짓말할 때 티가 확 나니까. 지금까지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

겸연쩍게 시선을 피하자 아리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기야... 이상하긴 했지. 도란 넌 아무리 타지 사람이라고 해도 아는 게 너~무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또 셈은 엄청 빠른 걸 보니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건 분명한데. ...신원을 감출 생각이라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통렬하네.”

“제가 이미 몇 번이나 주의를 드렸지만요...”

“.....”

라디가 나무라듯 읊조렸지만 나도 억울한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평소에 타인을 대할 땐 좀 더 신중한 편이니까. 어디까지나 상대가 아리엘이라서 그랬던 거지...

“그. 래. 서.”

한숨을 내쉬며 몸에서 긴장을 풀려던 찰나, 그녀가 맹금류처럼 눈매를 좁히며 흐름을 되돌렸다.

“벗어.”

“네, 네...?!”

“벗으라고 도란.”

“나, 나 임자 있어...!!”

“투구 말하는 거야. 내가 네 옷 벗겨서 뭐 하게. 라디 앞에서 수음 행위라도 도울 줄 알았어?”

“....”

평소의 아리엘에게선 상상할 수도 없이 적나라한 표현에 어버버하던 찰나,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아끌며 덮쳐왔다!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고아한 눈썹이 사납게 움찔거렸다.

“끝까지 안 보여줄 거야?”

“...방금 걸로 내 출신은 밝혔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

“그러면 그것보다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거야? 네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보다? 사람이 얼마나 비밀 투성이면 그래. 그렇게 가식에 파묻혀 살면 안 피곤해?”

“으윽...!”

아리엘이 신열하게 비꼬자 가슴이 시큰거린다.

이대로 가다간 영락없이 투구를 벗어야 할 기세였기에 나는 재빨리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며 읊조렸다.

“...내가 하나 밝혔으니 너도 한 가지 말해줘야겠어. 내 단도가 그 안디라.. 라는 신의 성물이라고 했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아리엘이 태연하게 어깨에서 손가락을 떼놓으며 답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저번에 골목길에서 강도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그 능력. 개미하고 지네를 불러...”

“걘 지내가 아니라 노래...”

“....”

­섬뜩!

아리엘이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노려보자 원인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그 오싹한 광경에 입을 틀어막자 그녀가 따끔하게 쏘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어둠을 다루는 게 안디라 신의 능력이야. 전승에 따르면 그림자 병사를 불러들이거나 식물을 소환해 대륙을 통째로 가라앉혔다는 설화도 있어. 그래, 네가 선보였던 그 힘으로.”

“....”

고개를 돌리자 말문이 막힌 라디가 보였다.

“...라디야, 너 알고 있었어?”

“아, 아뇨... 신 중 한 분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설마 그게 안디라 님일 거라곤...”

“..그분이 분명 대단한 존재라고 했지...?”

“네... 3대 주신 중 한 분으로 손꼽히는 분이에요. 아무래도 죽음을 관조하는 신이니까요. 하지만 누구한테도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는 탓에 아무도 그분의 성물을 다룰 수 없다고 들었는데... 설마...!”

로브에 뒤덮인 작은 입술이 열리며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스, 스파크...”

“제길...”

라디와 말톤이 단도를 만질 때면 발생했던 스파크. 나한테만은 그 반발 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내가 가호라도 받았다는 거야...?’

아니, 그건 분명히 아닐 거다. 지금까지 신과 얽힐 만한 행위는 벌인 적이 없었으니.

아니, 애초에 이 정도는 귀띔해 줘도 괜찮지 않았을까.

살짝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림자 안에 있을 녀석을 쳐다보자니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도란, 넌 그 단검을 던전에서 얻었다고 했지. 정확하게 어떤 경위로 얻게 된 거야? 자세하게 말해봐.”

“그건...”

솔직히 털어놓았다. 숨길만 한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이전에 론디니움의 대장간 앞에서 깡패 무리를 해치운 뒤에도 설명한 적이 있었으니까.

말을 끝마치자 아리엘이 턱을 괴며 읊조렸다.

“그러면... 넌 안디라 신하고 전혀 접점이 없다는 거네?”

“그렇다니까... 애초에 이 단도가 정말로 성물이 맞긴 한 거야? 넌 어떻게 확신했는데. 그런 전승이 있다고는 해도 네 말대로라면 안디라 신이 능력을 쓰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니잖아.”

“그렇지. 하지만 그분이 남기신 성물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거든. 나도 견학차 왕도에 있는 신전에 갔을 때 우연히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네 단검을 만졌을 때와 정확히 같은 느낌을 받았어. 나름 사제니까 신성력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그녀가 이전의 통증이 상기됐는지 손바닥을 문지르며 단도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납득이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 안디라 신의 성물을 다룰 수 있는 건데...? 말했다시피 나는 이곳에 온 지 몇 년 안 됐어. 도중에 신하고 만났을 리도 없고 신전 관계자 중 아는 사람이라곤 네가 유일해.”

“글쎄, 그건 도란 너만 알겠지. 정말로 짐작 가는 게 없어?”

“그러게 나도 모른다니까...”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단도를 기웃거리자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정황상 네가 그분의 가호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지금까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걸? 워낙 가호를 안 내리기로 유명한 신이니까. 어쩌면 출생이 달라서 신성력에 영향을 덜 받는 걸지도...”

“어쨌든 어느 쪽이나 확실하진 않다는 거네... 그러면 넌 왜 내가 악신의 힘을 사용하는 걸 알아챘는데도 그냥 잠자코 있었던 거야?”

고개를 들어 묻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통렬하게 쏘아붙였다.

“그야 당연히 너라서 그런 거지 이 멍청아. 그럼 내가 널 교회에 팔아먹을 줄 알았어? 여기 악신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니 잡아가라고?”

“....”

너무나도 신랄한 말에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고 있자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내 옷깃을 덥석 움켜쥐고 흔들며ㅡ

“그래서! 대체 투구는 언제 벗을 거야!!”

“자, 잠깐...! 진정해!! 일단 이것부터 좀 놓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궁금해하는 건데?!!”

“너야말로 왜 숨기는 거야! 나는 네 얼굴 한 번 못 봐? 너 그럴 거면 내가 지금까지 사준 끼니 다 뱉어내!!”

“치, 치사하게...!!”

서서히 뒷걸음쳐 물러났다. 하지만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등이 벽에 가로막혔고, 아리엘은 그런 내게 최후통첩이라도 하듯 내뱉었다.

“너... 계속 그러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나한테 했던 짓 라디한테 다 말할 거야.”

“....!!!”

“그래도 돼?”

“아, 아니 잠깐!! 그때 일은 암묵적으로 함구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네가 제멋대로 정한 거지. 게다가 내가 왜?”

“저...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도란님이 이렇게 쩔쩔맬 정도로...”

아리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라디야. 숲을 거닐다가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던 도란을 발견해서 고생해가며 간신히 목숨을 붙여놨는데 되려 날 죽이려 드는 거 있지?”

“...야, 아리엘.”

“그게 다면 말도 안 해. 비쩍 말라서 거적때기 하나만 입고 있는 꼴이 불쌍해 밥도 주고 심지어 옷까지 가져다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내...”

“야, 야!!”

목청을 높이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내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왜, 부끄럽긴 한가 봐?”

“...그땐 나도 정상이 아니었던 거 잘 알잖아.”

“언니, 도란 오빠는 무시하고 계속해 주세요.”

“...라디야, 너한테는 나중에 따로 설명할...”

“도란님은 잠시 조용해주세요. ...계속하세요.”

라디가 손을 들어올려 내 말을 틀어막더니 뒷말을 재촉했다.

“...혹시 도란님이 언니한테 무슨 짓을 했어요?”

“응, 도란이 내 목에 칼을 겨뉘면서...”

“알았어 벗으면 되잖아! 벗으면!!”

거칠게 투구를 움켜쥐며 외치자 우뚝 말소리가 뚝 멎었다. 이내 아리엘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에 손을 짚고 당당하게 쳐다봐온다.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올 줄이야.

하지만 절대로 여기서 약하게 나가선 안 된다.

“야, 아리엘. 아무리 그...”

“야?”

­깨갱!

“아, 아리엘 사제님...?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살짝 필요한데... 조,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 여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김빠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시선을 맞추고 선언했다.

“그럼 약속해. 여길 빠져나가면 두 번 다시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기로. 그 칙칙한 투구도 벗고.”

“.....”

“약속해 도란!!”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약속...”

고개를 떨구며 개미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완전한 패배. 이 정도까지 오면 체념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출신까지 들킨 마당에 이게 뭔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뼈저린 한숨을 내쉬며 약속의 증표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지만, 어째선지 아리엘은 내 손과 얼굴을 빤히 번갈아 볼 뿐이었다.

라디가 지근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읊조렸다.

“도란님... 분명 말씀해드렸을 텐데요. 여기서 그 손동작은 노예한테 복종을 강요하는 의미니 함부로 쓰지 말라고요... 저번에 저한테도 그러시더니...”

“...아 젠장.”

황급히 손을 거두려는 찰나 아리엘이 내 손가락에 덥석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멍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자­

“이제야 도란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알겠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

골칫덩어리가 더 늘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냥 다 까버리죠?”

“.....시끄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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