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이교도 광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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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이교도 광장 #3
“으음... 언니, 이 방법이 정말로 먹힐까요..?”
“글쎄... 솔직히 조금 불안한데...”
“지금이라도 말리는 게 어떨까요...? 혹시 도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쉿... 둘 다 조용히 해 봐.”
“....”
형형하게 눈동자를 빛내며 통로를 주시했다. 강바닥에 잠복해 먹잇감을 노리는 메기처럼 횃불이 자아내는 축축한 응달 아래 숨죽여 기회를 엿본다.
‘제발 딱 세 놈만 걸려라...’
내 목표는 이교도 무리. 정확히는 로브를 강탈할 계획이다. 놈들의 의복을 훔쳐 입으면 자연스럽게 광장 안쪽으로 침투할 수 있을 터, 도중에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중요 시설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할 거다.
라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란님... 정말로 괜찮겠어요...? 제 발로 적진에 걸어 들어간다니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게... 차라리 입구를 무너뜨려서 가둬버리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이교도가 잠든 사이에 몰래 할 일만 하고 빠져나온다던가...”
“그건 무리야. 어차피 지하라 밤낯 구별도 없을 테고, 통로를 봉쇄해도 저 인원이면 힘들이지 않고 돌무더기를 치워낼 테니까. 그리고... 의식을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끝장이야.”
악신이 강림하면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이 왕국이 파멸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할 뿐. 그때가 되면 피난을 갈 곳도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것만은 막아내야 한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인적 없는 통로를 응시하자 아리엘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이교도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잠입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닐 텐데...”
“그건 그때 생각해봐야지. 일단은 군중에 섞여들어서 적의 전력부터 파악하고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리면 되지 않을까? 놈들에게도 약점 하나 정도는 있을 테니까. 제단에 접근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잘 됐으면 좋겠네.”
“물론이지. 애초에 이게 최선... 쉿.”
입술에 검지를 세우며 뒷말을 틀어막았다. 멀찌감치서 일렁이는 횃불이 어둠을 밝히며 다가온 탓.
이윽고 세 남성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너희 그거 들었어? 제사 준비조의 절름발이 더글러스 알지? 요 며칠 사이 안 보이던... 걔 사실 죽었대! 의식에 쓸 피를 구하려고 처형장으로 몰래 불러내서 슥삭했다던데.”
“에이 설마.. 내가 듣기로는 아파서 병가 내보냈다고...”
“야, 너 그 말을 믿냐? 의식이 한창인데 내보내긴 어딜 내보내! 제단 위치가 들통나면 다 죽는다고 상급 기사도 밖에 못 나가서 투덜거리는데 걔가 무슨 수로 바깥 땅을 밟았다는 거야!”
“드,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잠깐!! 저, 저번 점심에 고깃국 나왔잖아! 안 그래도 요즘 물자가 모자라서 밥도 시원찮았는데... 호, 혹시...?!”
“끔찍하네... 우리는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묻어가다가 콩고물만 먹고 빠... 자, 잠깐!! 거기 누구냐?!!”
파박!!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한 놈의 배후로 쇄도해 단도로 경동맥을 절삭했다. 나머지 두 놈이 즉각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덤벼들었으나 라디의 볼트에 적중하자 무력하게 허물어진다.
남자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버티자 곧 바둥거림이 멎어 팔을 놓았다.
털썩!
“휴우... 재깍재깍 좀 다닐 것이지. 돌바닥에 쪼그려 있느라 추워서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첫 단추로는 괜찮은데?”
“그러게... 들키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는데.”
“일행이 오기 전에 마저 해치우죠.”
“그래.”
양어깨에 사내들을 짊어지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미리 파악해둔 길을 따라 아무도 오지 않을 외진 길로 들어선 뒤 확실하게 숨통을 끊고 바위 뒤에 시체를 유기했다.
사체에서 로브와 가면을 벗겨내자 아리엘이 안도하며 말했다.
“큰 소란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야... 마침 인원도 딱 세 명이라...”
“이게 다 착하게 사니까 복이 오는 거지. 나처럼 건실한...”
““.....””
“....알았어. 나는 무슨 농담도 못 하냐. 빨리 옷이나 갈아입자. 어디 보자... 제일 큰 치수가...”
“이거에요 도란님.”
“아, 고마워.”
라디가 로브를 들어올리더니 내가 입기 편하도록 소매 부분을 내밀어주었다. 이 세계의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내게는 살짝 작은 사이즈지만, 애초부터 펑퍼짐하게 고안된 디자인이라 입는 데 무리는 없었다.
한데 옷을 갈아입고 뒤를 돌아보자 아리엘이 가면을 든 채 생긋 웃고 있었다.
“....아 젠장.”
“빨리 벗어 도란. 이교도 사이로 잠입할 계획 아니었어?”
“...이번 일이 끝나면 보여준다고 말했잖아. 그때까지만 좀 참아...”
“그래, 다시 한번 약속한 거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내 가슴팍을 쿡 찌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물러났다. 이어서 라디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새하얀 살결 위에 이교도의 의복을 걸친다.
만일 신전 관계자가 지금 그녀를 보고 있었더라면 뒷목을 잡으며 쓰러졌겠지.
마치 타락해가는 천사를 보는 것 같아 살짝 배덕감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
불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서 재빨리 가면과 후드를 덮어쓰고 걸어나왔다.
“그럼... 슬슬 움직이자. 배낭은 여기 두고 가야 하니까 중요한 물건은 미리 챙겨둬. 탈출할 때 급하게 빠져나와야 할 수도 있으니까.”
“네, 전 다 꾸렸어요. 애초에 비싼 물품을 안 들고 와서 폭약만 챙기면 되거든요. 근데 좀 외람된 말일지도 모르지만... 언니, 이교도 복장도 은근히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가...? 고마워, 칭찬으로 들을게! 라디 너도 잘 어울려!”
“.....”
옷걸이가 좋으니 뭘 입혀놓아도 맵시가 산다. 수상쩍을 정도로 몸매가 좋은 이교도가 탄생하는 순간.
“크흠흠... 그럼 출발해볼까?”
우리는 이교도 A B C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서서히 앞길을 나아갔다. 마석등 대신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움켜쥐자 석굴 곳곳에 누런 불빛이 드리웠고, 서로의 창백한 가면이 시야에 비추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며 걷던 도중 돌연 전방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
빠르게 그녀들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긴. 너희 대체 뭐야? 우리 순번에 외부에서 복귀하는 인원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저벅...
바위틈에 숨어서 보초를 서던 이교도 두 명이 창을 겨누며 기어나왔다. 로브에 밴 체취 탓에 라디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
언제라도 달려나가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소매 속에 단도를 품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래? 이전 근무자들이 도중에 말하는 걸 까먹은 모양이네. 통로를 보수하러 갔다가 막 돌아오는 참이라서 말이지. 꽤 고생했다고.”
“보수? 웬 보수.”
“저번에 위쪽에서 큰 소란이 났잖아. 그거에 대한 사후조치야. 스켈레톤이 또 큼지막한 구멍을 뚫어놨더군. 그 망할놈의 새끼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굴던지... 꼬박 하루 넘게 걸렸지 뭐야.”
“아, 그런 거였냐. 그럼 지나가라.”
“그래, 너희도 수고하고.”
팔을 흔들며 두 보초 사이를 통과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한 모습을 가장했지만 실상은 식은땀에 등이 흥건해질 지경이다. 이 둘을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간 이곳까지 온 보람도 없이 내빼야 할 처지였으니.
놈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리엘이 어깨를 툭 치며 속삭여왔다.
“도란, 대단한데? 방금은 완전 진짜 같았어! 그렇게 능숙한 허풍은 어떻게 생각해 낸 거야?”
“그냥 저번에 이교도들에게 들었던 대화를 적당히 조합한 거야.”
“...여전하시네요. 이전에도 사칭부터 공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니...”
“으음... 사칭에 공갈, 사기, 살인에다가 저번엔 무단침입까지 한 걸 떠올리면...”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진짜 나쁜 놈 같잖아. 그리고 마지막 뒤에 두 개는 너랑 같이 한 거고. 앞뒤 설명 없이 그렇게 축약하면 곤란... 잠깐, 도착했어.”
적당히 떠들며 나아가던 도중 미적지근한 온기가 살갗을 데웠다.
좌우로 나립한 화롯불과 기사를 지나치자 세찬 돌풍이 불어와 로브자락을 휘날렸다. 넓은 공간에 들어설 때면 흔히 겪는 빌딩풍. 눈앞에 도래한 지하 광장에는 억센 사내들의 체취와 비릿한 병장기의 냄새,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의 소음과 웅웅거리는 군중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남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구석으로 이동해 두 녀석에게 속삭였다.
“일단... 전력 분석부터 하자. 일을 벌이는 건 그 뒤에 해도 충분해. 안전하게 빠져나올 대책도 마련해둬야 하니까.”
“네, 알겠어요. 시간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니 따로 조사하는 게 좋겠어요. 이왕 살펴보는 거 가마솥에 히드라 맹독 한 방울만...”
“...아리엘, 너는 라디랑 같이 가줘. 불안해서 도저히 혼자서는 못 보내겠다. 저러다가 또 사고 칠 거 아냐.”
“응! 나한테 맡겨! 둘이서 샅샅이 훑어보고 올게!”
“그래, 혹시라도 눈빛이 이상하다 싶으면 꼬리를 확 붙잡아버려.”
“도, 도란님 그게 무슨...!”
“문제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
“그래, 그럼 삼십 분쯤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라디의 손을 잡아끌며 걸어가는 아리엘을 뒤로하고 화롯불이 밝게 타오르는 광장으로 향했다.
적당한 보폭으로 군중 속에 녹아들자 놈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체계적인 놈들이네...’
곳곳을 서성거리며 두런대는 이교도들이 보인다. 가면의 색과 문양이 미묘하게 다른 건 지위를 구별하려는 용도겠지. 정말 드물게 검은 가면을 쓴 인원도 존재했는데, 고급스러운 장신구를 착용했을뿐더러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의식용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걸로 보아 지휘 계층이 분명해 보였다.
“실례합니다.”
새벽녘 수산시장처럼 북적거리는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이뤄지는 건 아닌지 광장 구석 이교도 수십 명이 몰려있는 장소로 향하자 그곳엔 노름이 한창이었다.
조용히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자, 자 걸어 걸어! 왼쪽 컵에 구슬이 있다 싶은 사람은 이쪽으로, 오른쪽은 저쪽으로, 가운데는 이 앞에 서시면 됩니다!! 한 번 참여할 때마다 2실링!! 정답을 맞히는 분에게는 두 배로 돌려드립니다!!”
“2실링? 한 번 해볼까...”
“야 이 사기꾼아!! 저번에 까봤더니 애초에 구슬이 없더니만! 이 새끼 베라스틴 남쪽 거리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야! 내가 이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복장이 터진다고!!”
“뭐야, 사기꾼이었어?”
“에이... 김샜네.”
“어허 사기꾼이라뇨... 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구슬이 있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이 새끼가 아직도 뻔뻔하게...!”
“....”
큰 소란이 일어 인파를 빠져나왔다. 아무리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광신적인 놈들만 있는 건 아니다. 개중에는 지인의 손에 이끌리거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해 사교 무리에 가담한 자들도 있을 테니까.
지휘 계층이 노름을 묵인한 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이런 지하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평범하게 농사나 짓고 살던 이들이 그런 상황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평소에는 생업이 따로 있을 테니까.
‘...아니, 아무래도 베라스틴의 주민 중 일부가 이교도로 전향한 모양인데...’
그토록 많던 시민이 사라진 건 비단 타 도시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만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정상참작 따위는 없다.
사교에 가담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면죄 받을 수 없다. 신이 실존하는 이곳에선 단순 치안을 해치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놈들이니까.
이교도는 병마에 따라붙는 신열과도 같아서 정세가 흉흉해지면 어디서나 속출하곤 했다.
“전염병 같은 새끼들...”
때문에 토드 씨 같은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보지 않았는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광장 중심에 다다랐다. 막사를 정비하는 무리 사이에 섞여 힐끗 곁눈질하자 고대 문명의 건축물처럼 불가사의한 제단이 시야를 가득 메꾸었다.
정체 모를 암석으로 지어진 제단은 간헐적으로 붉은 파동을 내뿜는 탓에 박동하는 인간의 심장을 연상시켰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
경비가 말도 안 되게 삼엄하다.
군기가 바짝 든 기사들이 경계하고 있는 탓에 어지간하면 제단에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의식을 주도하는 요인을 하나하나 색출해 암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리고.
물자를 나르는 행렬에 뒤섞여 자연스럽게 광장 외곽으로 빠져나오자 약속했던 장소엔 이미 익숙한 신장의 이교도 두 명이 도착해 있었다.
그녀들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접근하자 아리엘이 곧바로 날 알아보고 잔뜩 울상이 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란...! 어떡하지? 생각보다 경비가 너무 엄중해... 도무지 기회가 보이지 않아...”
“...음식에 독을 타는 건 무리겠어요. 취사장도 기사가 지키고 있어서 접근하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 거예요. 어떻게든 놈들을 박멸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앞길이 막막한 상황.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 난국을 파훼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와 이교도를 상대할 방법도, 의식을 방해할 수단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베라스틴에 악신이 강림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할 상황.
벽에 등을 기대며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찰나
“...잠시만요 도란님. 저기서 뭔가 하려는 모양인데요?”
사람들이 광장 중심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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