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81화 (181/375)

〈 181화 〉 이교도 광장 #5

* * *

[181] 이교도 광장 #5

전황이 돌변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제단에서 발발한 폭발이 살점을 흩트렸다. 제사 음식 속에 숨겨둔 기화성 폭약. 서서히 스며나오던 유백색 가스가 한계에 다다랐고, 일렁이던 촛대의 불꽃과 맞닿은 순간 드높은 화염 기둥을 피워올렸다.

나는 굉음과 함께 돌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크윽...!”

얇은 가면 너머로 차가운 지면이 느껴졌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시꺼먼 잔해가 로브 위로 떨어진다. 살갗을 구워버릴 듯한 열기와 충격파가 전신을 훑자 뇌진탕을 입었을 때처럼 이명이 귓가를 잠식해 구역질이 치밀었다.

폭풍우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땅을 짚고 일어서니 혼란에 빠진 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폭발이야!! 제단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하, 하필이면 제단에서...”

“침입자가 여기까지 들어왔다!! 이 무능한 기사 새끼들은 뭣들 하는 거야!!!”

“팔... 내 팔이..! 끄허억...”

“....”

이로써 주사위는 굴러졌다.

이제 이 망할 장소에서 탈출하는 일만 남았다.

“...비켜.”

­퍽!

갈팡질팡하는 이교도를 밀쳐냈다. 제각기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제단으로 달려가는 인파를 비틀비틀 거슬러 나아간다. 아직도 광장 중심에서는 시꺼먼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고, 제사에 쓸 향유 따위에 불길이 옮겨붙어 아비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라디가 가지고 온 폭약을 죄다 때려박은 탓.

최대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야 한다. 화제에 이목이 팔린 사이...

“고, 고든님...? 괜찮으십니까?!”

“쿨럭...! 난 괜찮으니 당장 저놈을 쫓아!!”

“알겠습니다! ...저 새끼다!!! 저 새끼가 제단에 폭탄을 설치했다!!”

“쫓아라!!!”

“치잇...!”

전력으로 질주했다.

사지에서 호소하는 통증을 무시하고 내달렸다. 폐부로 들이차는 뾰족한 공기를 토해내었다. 정체가 탄로 났지만 못 벗어날 건 없다. 폭발의 전화에 휩쓸린 기사들은 아직 회복하지 못했고 이교도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니.

“다 꺼져!!!!!”

번뜩이며 은빛 검광을 발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앞세워 성난 황소처럼 질주하자 놈들은 내 앞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 기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콜록...! 저자를 붙잡는 자에겐 포상으로 금화 백 파운드를 내리겠다!!”

“배, 백 파운드...?”

“금화가 백 개면... 잡아라!!!”

“씨발!!! 저 능구렁이가!!!!”

고든이 내 뒤통수에 대고 외치자 공기가 급변했다. 가면 너머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선명한 살의가 깃들고, 하나둘 무기를 거머쥐어 앞길을 가로막는다.

어느새 광장의 유일한 출구로 가는 경로에는 소란을 듣고 몰려든 이교도로 복작거렸다.

“이런 줏대도 없는 새끼들...!!”

지면을 디디며 멈춰섰다. 단검을 움켜쥔 이교도 무리가 엎치락거리며 옥죄어든다. 핏발 선 놈들의 안구에선 맹목적인 믿음이 느껴졌고, 압도적인 금전은 가짜 신앙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도 남부럽지 않게 살 거야!!!”

“저놈만 죽이면... 백 골드...”

“내가 먼저다! 얌전히 내 양식이 되어... 끄아아악!!!”

­푸확!!

장검을 내질렀다. 어깨로 들이받아 균형을 무너뜨리고 칼날로 복부를 꿰뚫었다. 한 합에 두 명을 관통하자 로브 아래로 비릿한 내장이 흘러내렸고, 칼날을 비틀자 놈들은 끊어지는 단말마를 흘리며 절명했다.

“겁 없는 새끼부터 뒤질 줄 알아!!!”

전방위로 검을 휘두르자 불쾌한 손맛과 함께 피보라가 일었다. 발치의 머리통을 걷어차자 내 뒤엣 놈이 주저앉는다. 발걸음부터 근육을 쓰는 방식까지, 칼자루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초짜들.

사교에 가담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농부였던 이가, 물레방아를 다루던 방직공이 지금 이 순간 적으로 돌변하여 내 앞에 섰다.

“궁수들은 활을 쏴라!!!”

“잠깐!! 지금 발사했다간 동료가...”

“침입자를 처단하는 게 우선이다!!! 우리의 숭고한 의식을 방해한 자를 절대로 살려서 돌려보내지 마라!! 궁수, 발사!!!”

­촤라라라락!!!

상공에서 날카로운 화살벽이 쇄도했다. 일렁이는 불길을 반사해 노을처럼 붉게 달아오른 화살촉. 저것들이 지상에 당도한다면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한다.

허나 너무 뻔했다.

“자, 잠깐 이거 놓... 크아악!!!”

이교도 한 놈을 붙잡아 방패막이로 사용하자 손아귀에 둔탁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차마 막아내지 못한 화살 한 발이 허벅지를 스쳤으나 상관없다.

“저, 저 새끼 잡아!!!”

“....”

화살 세례에 휩쓸린 이교도 시체를 뛰어넘어 질주했다.

화로를 엎어 불길을 일으켰다. 칼날을 휘둘러 물꼬를 텄다. 지금쯤이면 라디와 아리엘은 무사히 빠져나갔을 터, 출구에만 도착한다면 우리 모두 살아나갈 수 있다.

갈 수만 있다면.

­슈화아아아악!!!!

“뭐, 뭐야!!!!”

돌연 발밑에서 검은 빛줄기가 쇄도했다. 통발을 휘감는 문어처럼 끈적하게 늘어지는 기운. 흉물스럽게 꿈틀거리는 어둠 다발의 근원지에는 수정구를 손에 쥔 사제들이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곧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다.

“젠장할!!!!”

저주(?).

이교도 사제가 까다로운 이유.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데 정신이 팔려 간과하고 있었다. 축복을 구사하는 아리엘과는 반대로 놈들은 흑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걸.

결함이 생긴 엔진처럼 망가져 가는 폐를 부여잡고 호흡을 고르자 어느새 내 주변엔 은빛 방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설치는 건 거기까지다 침입자.”

“귀한 몸... 납셨네..”

화려한 공작새 깃털 투구를 쓴 기사 한 명이 아밍 소드를 뽑아들며 다가왔다. 강자 특유의 기척. 빈틈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발놀림과 검을 중단으로 내세운 자세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묵직한 은검을 들어올렸다.

열에 구겨진 비닐처럼 일그러지는 시야와 불규칙한 호흡. 아무리 포장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순순히 투항해라 침입자.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겠다.”

“피라미한테는 볼 일... 없으니까.... 꺼져!!”

“그 몸뚱이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포기해라.”

“크윽...”

놈이 항복을 권고하자 발치의 돌멩이를 차올려 안면을 가격했다. 놈은 곧바로 내 멱을 꿰뚫어 화답했고.

재빨리 검날로 빗겨내자 새빨간 불똥이 치밀었다.

­까아아아아앙!!!

“별것... 아닌데...? 이것도 기습이라고... 한 거냐...”

“반응은 나쁘지 않군. 최소한의 실력은 갖췄어.”

기사가 판금 부츠를 차올렸다. 황급히 정강이로 틀어막자 각반이 우그러든다. 통렬한 아픔에 시야가 흐릿해진 사이 놈은 폼멜로 정수리를 찍어왔고, 재빨리 물러서자 로브 자락을 붙잡혔다.

놈이 내 로브를 난폭하게 잡아당기며 투구로 머리를 내려찍었다.

“크아아악!!!”

뼈저린 일격. 붉게 명멸하는 시야. 단단한 가면이 없었더라면 즉시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수(手).

피가 흘러나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돌격했다. 칼자루를 짧게 쥐어 급습에 대처했다. 상단에서 내려찍히는 검날을 좌로 도약해 회피했고, 텅 빈 하단으로 쇄도해 은검을 휘두른다.

“썩 쓸만하군. 하지만 경험이 모자라.”

“읏...?!”

놈은 경이로운 속도로 사선에 검을 내찔러 궤도를 비틀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시선으로 쫓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움직임. 하물며 저런 중갑을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허윽...?!!!”

은빛 호선이 질주한다. 시퍼런 눈동자에 푸른 살기가 남실거렸다. 신속의 칼날이 뺨을 베고, 목젖으로. 황급히 고개를 젖혀 피하자 놈이 허벅지를 짓밟고 상체를 비틀어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이어서 몰아치는 연격. 상단에서 하단으로. 하단에서 측면으로. 급류의 흐름처럼 불규칙하게 휘어오는 검날.

나는 놈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한 반면 그에게선 불쾌할 정도의 여유가 엿보였다.

이윽고 뒤로 쭉 뻗은 양날검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모여든다.

“비스마르크류 아밍 소드 제2 초식...”

“씨발!!”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 보지만...

“선풍베기!!!!!”

일순간ㅡ

칼날로부터 비롯된 마력 폭풍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돌바닥에 선명한 상흔을 아로새기며 육박해온 검기(??). 황급히 검집을 분리해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일격.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핏물이 울컥 치밀었다.

“멧돼지처럼 튼튼한 놈이군. 이 기술을 받아내고도 두 발로 서 있다니. 죽이긴 아까운 인재야.”

“좆... 까!!”

실력의 격차가 너무 크다. 놈의 견갑을 수놓은 미려한 문양으로 미루어보건대 기사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등급이겠지. 단순히 마나를 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앞의 기사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존재했다.

마지막에 와서 이런 놈에게 가로막히다니...

“제기랄!!!!!”

“...그래, 여흥은 여기까지다.”

도신을 치켜세우고 질주했지만, 그는 내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검날을 지면에 드리운 채 기다릴 뿐. 이내 날카로운 바스타드 소드의 첨단이 심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놈은 능숙하게 흘려내 겨드랑이 사이에 칼날을 끼우더니, 내 목을 움켜쥐고 차차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뿌드드드득...!

“커흐흡...!!”

“마나도 못 쓰는 인간치곤 제법이야. 저주에 약화된 상태라는 게 안타까울 정도군. 잠깐의 유흥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 잘 가라.”

“....”

놈의 첨예한 한손검이 내 가슴을 파고들려는 찰나­

“크윽...?!!”

“넌... 말이... 너무 많아..”

놈의 옆구리 틈새에서 코볼트 단검이 자라났다.

나는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기고는 그의 등 뒤에서 목을 휘감았다.

“다들 물러서!!!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왔다간 즉시 이놈의 숨통을 끊겠다!! 다 꺼져!!!!”

“윽...! 듀, 듀크 님...!!”

기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왔으나 칼날로 멱을 찢어발기자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무리 사교에 가담한 쓰레기들이라고 할지라도 한솥밥을 먹고 지내온 동료 앞에서까지 냉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내게 사로잡힌 남자가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난 상관하지 말고 빨리 죽여!!”

“죄송합니다 듀크 님!!”

“죽어라!!!”

“제기랄...!!”

기사들이 검을 앞세워 질주해왔다. 이용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닫자 나는 즉시 기사의 목을 꿰뚫고는 전방으로 내던지며 달려나갔다.

“쫓아라!!! 듀크 소대장을 해친 저 새끼를 가만두지 마라!!!”

“의무병을 불러와!!! 숨이 끊기기 전에 듀크님을 구해야 한다!!!!”

“쇠뇌를 장전해!!!”

“시발...!! 시발!! 시바아알!!!!!!”

사방에서 격발음이 울려퍼졌다. 반짝거리는 은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쇄도한다. 살의를 담은 화살촉이 피부를 찢어발겼고, 맹렬한 고통이 전신에 몰아쳤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

“사제들은 다시 흑마법을 준비해!!!”

“입구를 틀어막아!!! 절대로 살려서 돌려보내면 안 된다!!!”

“다들 움직여!!!!”

“....!!!”

죽음이 코앞까지 당도했다. 날 관통하기 직전의 날붙이가.

그렇다면ㅡ

“백은보(白??)!!!!!!!”

온 힘을 쥐어짜 기척을 감추고 도약했다. 이를 악물어 치밀어오르는 핏물을 삼켰다. 부상당한 몸으로 구사하기엔 부담이 많은 기술이지만,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저 출구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저곳에 도달하면 라디와 아리엘이 폭약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순식간에 포위망을 벗어나 출구까지 단 몇 발자국을 앞둔 순간­

“아직까지 이런 쥐새끼 하나 못 잡다니... 요즘 기사 수준도 많이 떨어졌군요... 역시 직접 나서야 하는 걸까요오?”

“시발!!! 넌 또 뭐야!!!!!”

중년 여인. 호박처럼 펑퍼짐한 체형의 사서장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양옆에는 중무장한 호위 기사가 방패를 들어올렸고, 살집 두툼한 손바닥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촤르르르륵...! 콰직!!

반려견처럼 목줄을 찬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시감 드는 칠흑빛 표지. 금서고에서 보았던 살아 움직이는 서적.

중년 여성이 책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이런... 우리 에르고모프가 많이 화났구나? 그래.. 저렇게 못된 아이에게는 벌을 줘야지. 자 가렴, 오랜만의 식사란다.”

­콰르르륵...! 카칵!!

사슬이 풀려나자 놈이 책장을 게걸스럽게 펄럭거리며 다가왔다. 동시에 포위망을 좁혀오던 기사의 발걸음도 멎었다. 그 사실에 위화감을 품기도 잠시, 왜 그런지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망할....”

­콰드드드득...! 쿠르르르...!! 콰직!! 콰지직!!!!

책이 부들부들 몸을 떠는가 싶더니 점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버섯을 먹은 마리오처럼 급속하게 성장하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벙쪄 있자니 놈은 덩치를 불리고 또 불려서...

­콰라라라라라라라락!!!!!!!!!!!!!!!!!!

“....”

나는 거대한 그림자에 짓눌린 채 아연한 표정으로 놈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백과사전에 불과했던 놈이 이제는 건물 한 채에 비견될 만큼 성장했다. 어마무시한 질량의 종잇장이 펄럭거리자 억센 돌풍이 몰아쳤고, 화로에서 굴러떨어진 석탄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녀석이 오랜 친구만큼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고맙다.”

광장을 밝히던 장작이 돌풍에 주춤거린 순간.

이교도와 기사가 놈의 거체에 한눈 팔린 순간.

우유빛 날카로운 송곳니가 식탐을 드러낸 순간.

“백랑보(白??)!!!!!”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도약했고,

은은한 불빛이 비쳐오는 통로로 뛰어들었다.

“라디!!! 아리엘!!! 도착했어!!!! 빨리 입구를 폭...... 파....”

“성가시군...”

아...

피에 잠긴 갑주. 낭자한 혈흔. 나태한 목소리.

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너도 이 계집들과 한패냐.”

“기사... 단장....? 어떻게....”

“잠들거라.”

시야가 저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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