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행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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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행방 #1
“...님, 이 사람 슬슬 일어나려는 것 같은데요?”
“혹시 모르니까 잘 지켜보고 있어. 갑자기 덤벼들 수도 있으니까.”
“에이~ 팔을 묶어놨으니 괜찮겠죠. 설마 별일이라도 있겠어요?”
“...그렇게 안일하게 굴다가 이교도한테 붙잡혔던 거 기억 안 나? 네놈이 거기서 음식만 안 훔쳐먹었어도...!”
“으... 배고픈 걸 어떡해요. 그건 그렇고 검은 머리라니 불길하네요. 느닷없이 뿔이나 날개가 돋아나진 않겠죠..?”
“그런 미신을 믿냐 넌.”
“미신이 아니라구요. 저번에 메다올리눔 던전 2계층에서 어떤 남자가 시꺼먼 괴물로 변하는 걸 봤잖아요? 그런 악마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건 극비에 부치라고 했을 텐데, 로닌.”
“뭐 어때요 저희밖에 없는데. 근데 그건 그렇고 이 남자 거시기 한번 딥따 크네요.”
“....”
“아 눈 떴다.”
지근거리는 두통을 감내하며 일어났다. 뻑적지근한 몸을 가누자 첨예한 고통이 전신에 사무친다. 밤새 누군가가 드릴로 온몸을 공사한 기분.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토착병에 걸렸을 때가 이러한 느낌이었는데...
습관적으로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도중에 저항감이 느껴졌다.
재빨리 몸을 살피자 양 손목을 포박한 두꺼운 가죽끈이 보인다.
다급하게 몸부림치려는 찰나ㅡ
“진정하세요 모험가님. 여긴 안전합니다.”
“네 맞아요! 언데드가 우글거리고 전갈이랑 지네가 들끓긴 하지만 괜찮아요!”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로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버둥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둠 너머 어렴풋한 두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갈색 머리의 남성이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적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팔을 묶어둔 건 안전을 위해서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희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곧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놈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라디는 어디 있지. 아리엘은.”
“.....”
두 남자는 곤혹스러운 듯 서로를 마주보더니 나지막이 읊조렸다.
“죄송하지만...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상세한 인상착의를 말씀해주시면...”
“발뺌할 생각 하지 마.”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으며 도약했다. 오른발을 축으로, 묶인 두 손의 가죽끈을 이용해 타격...
“크윽...?!!!”
채 발을 떼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당신은 중상을 입으셨어요. 살아있는 게 기적일 지경입니다.”
그의 말대로 통렬한 고통이 온몸에 휘몰아쳤다. 뻑적지근한 고개를 내리자 찢겨나간 천옷 너머 흉측한 피멍 자국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칼로 도려낸 듯 정확하게 원형으로 파헤쳐진 가슴팍의 열상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울컥 게워나왔다.
남자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도와드릴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드리지요. 대신 모험가 씨도 저희에게 협조...”
“라디는 어디 있어!!!!”
“...일단 진정하시죠. 이곳에서 큰 소리를 내면 위험...”
“그냥 버리고 가죠 틋콩님? 뭐하러 굳이 신경 써줘요.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로닌 넌... 하아... 그냥 닥치고 있어. 상부에 말해서 징계 먹이기 전에.”
“그, 그건 안 돼요...! 그럼 탕비실 다과를 못 먹잖아요!! 서, 설마...! 자기 혼자만 다 독차지하려고!! 그렇게 치졸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닥쳐 로닌. 제발.”
눈앞의 사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다갈색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 라디와 아리엘이라고 하셨나요? 그분들의 인상착의를 말씀해주시면 제 기억과 대조해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혼란스러운 머리를 조금 가라앉힌 뒤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사낭 쥐 수인. 회색 머리. 뺨에는 붉은 문양이 있어. 다른 한 명은 은발에 아가사 신전의 사제고. 누군지 알겠어?”
기절하기 직전, 내가 목격한 게 맞다면 이미 그녀들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인물이군요. 그 정도 특징이라면 분명히 기억에 남았을 텐데...”
“.....”
머리가 하얘졌다.
깊은 절망이 시야를 검게 물들여 내면의 괴물이 스멀스멀 피어나던 찰나
“하지만 좋은 소식입니다. 제가 모른다는 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거든요. 아직 낙담하기엔 이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와 여기 있는 동료는 이교도의 동향을 꾸준히 감시해왔습니다. 그들이 이 지하에서 처형한 희생자들의 면면도 줄곧 봐왔지요. 당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제야 좀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 드셨습니까?”
“....”
대답 대신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이자들의 정체가 뭔지, 어째서 내가 기사단장과 조우하고도 살아있는 건지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녀들을 찾는 게 우선이다.
치미는 통증을 참아내며 기립하자 발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범벅이 되어 새까매진 맨발 아래로는 새하얀 인골이 즐비했고, 사방에는 뼈 무더기가 높게 쌓여 살풍경을 이뤘다.
“....이곳은.”
라디의 폭약으로 통과했던 유골 매장소와 흡사하다.
다만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 고역스러운 악취를 뿜어대는 살색 덩어리들을 응시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요. 구속구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좀만 다가와 주시면...”
“괜찮습니다.”
슈화아아악!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두 팔이 자유를 되찾았다. 위급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도움이 되어주던 단도. 날카롭게 잘려나간 가죽끈이 툭 떨어져내린다.
그 광경을 본 앳된 금발 소년이 눈물을 글썽이며 오열했다.
“앗...! 내 고급 와이번 가죽 벨트가...!! 아, 아직 할부도 안 끝났는데에....”
“.....”
“....”
“...나가면 새로 하나 사 드리겠습니다.”
*
두 사내를 뒤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해골이 가득한 구덩이를 벗어나자 구불구불한 토굴이 이어졌다.
일말의 특색 없이 복잡하게 뻗어나간 지형 탓에 헛갈릴 법도 하지만, 그들은 이 토굴을 몇 번 왕래라도 한 듯 능숙하게 길을 되짚어갔다.
그들을 쫓으며 머릿속에 가득한 의문을 하나하나 뱉어냈다.
“...여긴 어디죠.”
“이곳은 베라스틴의 지하에 위치한 공간입니다.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죠. 처음 보면 놀랄 법도 하지만...”
“몇 층인지를 묻는 겁니다. 이교도가 모여있는 광장 근처에는 이런 지형이 없었을 텐데.”
“....당신, 납치당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군요? ...안타깝지만 현재 위치를 상세히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저희의 은신처가 외부로 노출되면 큰일이니까요. 다만 이곳은 이교도가 있는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입니다.”
“....”
‘지하 3층과 4층 중간 즈음인가...’
지금까지 탐색해오며 이러한 토굴이 존재했던 장소가 3층, 유골 매립지를 마주쳤던 곳이 4층이니 얼추 맞을 거다.
“...내가 왜 이런 장소에 와 있는 거죠.”
“방금 시체로 가득했던 구덩이가 이교도들이 처형장으로 쓰는 곳입니다. 보통 불순분자나 의식에 쓸 희생자를 살해하고 남은 주검을 처분하는 장소인데 간혹 움직이는 것들이 떨어지기도 하더군요. ...대부분은 언데드였지만 말입니다.”
당신을 제외하고. 라는 말을 중얼거린 사내가 횃불을 비춰가며 통로를 비집었다.
“...그럼 이교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둘은...”
“보통은 재물로 쓰이지만 약간의 유예 기간이 있습니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버려지지만요. 당신의 일행은 아마 전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것 같군요.”
“....”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너희 둘... 대체 정체가 뭐야.”
“....”
그들에게서는 이러한 사건을 다루는 데 능숙한 티가 났다.
중간중간 절묘하게 악센트가 들어가는 세련된 어조는 왕도 특유의 억양이 틀림없다. 흘러내리는 바지를 부여잡으며 툴툴대는 금발 소년 또한 마찬가지. 행동거지가 가볍긴 하지만,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잘 관리된 눈썹은 그가 마나 사용자임에 더불어 귀족 태생이라는 걸 짐작게 했다.
적어도 이 2인조는 베라스틴 시민이 아니다.
틋콩이라 불리었던 갈색 머리 남자는 굳게 입을 다물더니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만은 답해 드릴 수 없겠군요. 미안합니다. 혹시 다른 질문이 있으시다면...”
“저희는 왕실 특무... 읍읍!!”
““.....””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난처하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읊조렸다.
“...고생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짙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금발 소년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 뒤로는 묵묵히 길을 걷다 보니 통로에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폭도, 높이도 일정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뻗어나갔던 토굴이 반듯하게 정렬됐고, 얇은 격벽으로 구분해둔 구획이나 깨진 도자기 파편 등 사람이 주거했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라디, 아리엘과 함께 지하 통로를 거닐면서 봤던 풍경.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혹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까?”
“헉! 이 남자 눈치챈 모양인데요...?!!”
“....”
몇 번째 반복되는 지형을 눈여겨보며 묻자 금발 사내가 허걱 하며 물러났다.
갈색 머리 남자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눈치채셨으니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저희도 아직 그쪽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로 가지요.”
사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금까지 맴돌았던 경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우리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여기가 바로 저희가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
주위를 둘러봤지만 비좁은 골목엔 오래된 쓰레기만 굴러다닐 뿐, 편의시설이라고 부를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언데드와 맞닥뜨리기라도 했다간 곤란할 텐데...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걸음 물러났다.
“그럼 로닌, 부탁할게.”
“에... 싫어요.”
“...뭐?”
“그야~ 요즘 절 너무 부려 먹고 있다는 생각 안 드세요? 던전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어두컴컴하고 습한 땅굴에서...”
“닥치고 문이나 열어.”
“넵.”
발치의 깨진 도자기 파편을 들추자 무언가가 반짝였다. 금발 소년이 그 물체를 발끝으로 디디며 한탄하자 밋밋한 흙벽에 희미한 빛줄기가 생겨났고, 그 선을 기점으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강한 진동이 일었다.
어느새 눈앞에 드러난 비밀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자 틋콩이 발을 옮기며 말했다.
“이곳이 저희의 은신처입니다. 기존에 있던 장소를 청소한 게 고작이지만요.”
“방금 건 어떻게 한 거죠...? 막혀있던 벽이 저절로...”
“마석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숨겨진 공간이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이 유적에는 간혹 이러한 기믹이 숨어있더군요. 이곳은... 저희가 세 번째로 발견해낸 장소입니다.”
“이런 게 있었다니...”
기억을 되짚어보니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둘이 아니다. 라디 일행과 함께 지하를 가로질렀을 당시, 마석등을 비추며 걷다 보면 가끔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리곤 했다.
그때는 단순한 광물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중 몇몇은 이처럼 숨겨진 통로를 여는 마석이었던 모양이지.
저벅...
두 남자를 따라 들어온 작은 단칸방에는 온전한 도자기 몇 점과 트롤이 한번 주저앉고 간 듯 푹 꺼진 침대, 낡아서 간신히 원형만 유지하고 있는 탁자와 등유 랜턴 등 간단한 생활용품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횃불 심지를 불리해 접시에 올려놓고는 퍼석퍼석한 빵과 수통을 꺼내 내게 권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이교도도 이 공간의 존재는 모르니까요. 이제 잠시 정보를 나눌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내민 음식을 눈으로만 쳐다보며 되물었다.
“...제가 모험가인 건 어떻게 안 거죠?”
“손을 보고 알았습니다. 검을 잡는 사람에겐 특유의 굳은살이 있으니까요. 열심히 단련한 흔적을 보니 제법 실력 있는 분이셨나 봐요?”
“...그냥 F랭크입니다. 제게 뭔가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인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F랭크라...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요. 뭐 괜찮습니다. 모험가님께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는 정보만 얻으면 됩니다.”
사내가 지성 넘치는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딱히 다부진 체격도 아닐뿐더러 사막의 모래알처럼 어딜 가도 흔히 있을 듯 평범한 외모지만 어쩐지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내가 알기로 국정원이 이런 인상이라 들었는데.
...이름은 좀 그렇지만 아마 가명이겠지.
“그럼 틋콩... 씨는 왜 이교도에 대한 정보를 원하시는 거죠? 그쪽이 얘기를 듣고 나서 돌변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습니까? 애초에 한패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그건 뭐라 답변을 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이 지하에서 현재 벌어지는 이교도의 흉계를 막지 못하면 머잖아 큰 재앙이 닥칠 겁니다. 모험가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교도들이 플루토란 악신을 강림시키려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의식이 막바지에 다다랐었다는 점도요. 하지만 제단은 제가 폭파했으니 이제 곧 와해될 겁니다. 저는 제 동료만 구출하면 됩니다.”
“.....”
찰나, 남자의 표정이 크게 무너졌다. 그는 턱에 손을 괴며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더니, 금발 사내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모험가님이 거기까지 알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평가를 한 단계 더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그게 무슨...”
“그야...”
“...제단은 파괴되지 않았거든요.”
사건의 행방은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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