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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83화 (183/375)

〈 183화 〉 행방 #2

* * *

[183] 행방 #2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단이 폭파되지 않았다니...”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놈들의 제단은 거대한 아티펙트와도 같습니다. 쉽사리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진행을 살짝 늦춰놓았을지언정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의식을 완전히 막기는 무리입니다.”

“....”

그럼 그간의 고생은 전부... 라디와 아리엘은....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놀랍군요. 이교도 사이에서 큰 소란이 발상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잠입해 제단에 폭탄을 설치한 게 설마 당신이었을 줄이야. 혹시 어떻게 했는지, 무슨 폭발물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음번에 이교도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교도의 의복을 훔쳐입어 제사 물자를 나르는 조에 합류했습니다. 기화성 폭약을 음식 속에 숨겨 반입했죠. 결국 들켜버렸지만...”

“굉장하시군요. 놈들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혹시 어떤 경로로 폭약을 입수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만약 한 번 더 제조해낼 수만 있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분명 라...”

아차.

재빨리 시선을 되돌렸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하는 사내가 있었다. 서늘한 이채가 감도는 밤색 눈동자와 굳게 다물려진 입술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저도 이교도를 처치하고 우연히 얻은 거라... 딱히 뭐라고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미안하게 됐네요.”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죠. 아쉽군요.”

남자는 턱 아래 모았던 깍지를 풀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환기했다. 내 변명을 믿는 눈초리는 아니지만 지금은 더 캐물어봤자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잠시 찾아온 팽팽한 긴장을 해소하며 대화에 완급을 두고 있자니 금발 소년이 내 앞의 빵을 덥석 집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그걸 안 물어봤네.”

“....말톤입니다.”

이 사람들의 꿍꿍이를 파악하지 못한 이상 본명을 대는 건 위험하다.

말톤이란 이름은 모험가 중에서도 흔한 이름이니 괜찮겠지.

“말똥이라... 특이한 이름이네요! 우물우물... 근데 저희 어디서... 꿀꺽! 본 적 있지 않아요?”

“...잘 모르겠군요.”

“그런가... 하긴 검은 머리카락이 흔한 것도 아니고. 혹시 양친 중 한 분이 마족이라던가...”

“로닌, 방해할 거면 제발 꺼져. ...넌 구석에서 장비나 점검하고 있어.”

“에이 재미없게... 궁금한데 좀 물어볼 수도 있지.”

그가 빵 덩어리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물러나자 틋콩이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동료가 무례한 소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까요.”

“....말톤 씨도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

그가 내 처지에 공감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어째선지 조금 낯익은 느낌이 드는 사내. 머리색 때문인지 트라함과 비슷한 인상인 것 같기도 하다. 한숨을 내쉬는 모양새도 그렇고...

그가 흐름을 되돌렸다.

“그럼... 말톤 씨는 이교도들의 제단을 폭파하고 빠져나오는 도중에 붙잡힌 건가요?”

“네, 사실 거의 다 빠져나왔었는데 마지막에 기사단장과 마주치는 바람에...”

“기사단장을 마주쳤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틋콩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이내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하더니 차분한 어투로 되돌아와 물었다.

“...정말로 기사단장을 만났습니까? 혹시 상급 기사를 잘못 착각한 게...”

“틀림없습니다. ...제 동료가 그놈한테 당했거든요.”

“으음....”

그는 자그맣게 신음하며 내 얼굴을 힐긋 쳐다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나고도 살아남다니... 말톤 씨는 절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군요. 솔직히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내용이지만... 아무튼 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 그에 대한 정보를 캐던 참에 이렇게 나타나 주시다니...”

“기사단장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베라스틴의 기사단장, 키론 경을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반란을 일으켜서 난 사단이니까요.”

“반란...? 이번 일은 영주가 벌인 게...”

“그렇게 오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영주는 이번 사태와 관련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지하수로에 사병을 보내왔을 정도로요.”

“....”

제단을 폭파하기 직전, 난입해왔던 정체불명의 무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완전히 떨쳐내기 어려운 위화감에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기자 틋콩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인 점이 있습니다. 기사단장은 원래 신앙심이 넘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교에 가담했던 정황도 일절 없었고요. 독실한 베그디아교 신자였을 텐데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이교도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는 건실한 척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맞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저희의 최종 목표는 그를 비롯해 이교도를 완전히 박멸하는 겁니다. 그래야 의식을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만일 말톤 씨가 지상에 올라가는 걸 원하신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이해관계가 일치됐군요. 당분간 함께하도록 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말톤 씨.”

“....”

그가 건넨 손을 맞잡았다.

*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있습니까?”

빌린 수통으로 목을 축이며 묻자 틋콩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식량을 구할 예정입니다. 저희도 이교도에게 한 번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뒤라 물자가 여의치 않습니다. 다행히 방법과 위치를 알고 있으니 반나절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 뒤로는 어쩌실 예정입니까.”

“저희는 이교도의 물자 창고로 침입해서 급습할 계획입니다. 문제는 그곳까지 도달하는 길이 순탄치 않다는 거죠. 언데드가 득실거리는 구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기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순간도 있을 거고요.”

“상관없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그...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처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게...”

그가 내 가슴팍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임시방편으로 천을 감아두긴 했지만 여전히 핏방울이 스멀스멀 번져나오는 열상을.

하지만 나는 그의 염려를 고갯짓 한 번으로 일축하고는 일어났다.

이깟 상처보다 그녀들을 눈앞에서 잃고 말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가슴을 더욱 시큰하게 파고들었기에.

차가운 격노를 눈동자에 갈무리하자 틋콩이 섬짓 숨을 들이켜더니 언데드에게서 노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한손검을 걸머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도착한 장소는 이미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여긴... 아까 제가 깨어났던 구덩이잖아요.”

높게 퇴적된 인골탑과 자작하게 깔린 해골. 잡동사니 대신 뼈가 쌓여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쓰레기장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곳에서 식량을?

“말톤 씨는 잠시 물러나 계셔도 됩니다.”

틋콩은 날 뒤로 물리더니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가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설마 싶어 쳐다보자 내 눈치를 읽은 그가 조곤하게 말했다.

“...아무리 위급 상황이라도 고인의 육신을 먹는 외도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이걸 보시죠.”

다갈색으로 변색되어 역한 악취를 풍겨올리는 살덩이를 검으로 들추자 거뭇거뭇한 형체가 황급히 달아났다.

“지네입니다. 전갈도 몇 마리 섞여 있고요. 모험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이곳에서는 귀중한 식량입니다. 그리고 먹이가 있다면 응당 다른 포식자도 몰려들기 마련이죠. ...로닌.”

“우욱... 냄새가... 우읍...!”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찾아.”

“느에엑...”

로닌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하더니 검을 뻗어 살점을 들쑤셨다.

그러자 잠시 후 큼지막한 쥐 한 마리가 시쳇더미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찍! 찌직 찌익!!

“로닌 잡아!!”

“으그허헑...”

“제길...!”

틋콩이 신속하게 외쳤지만 로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연거푸 칼을 찔러넣을 뿐, 도저히 말을 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쥐가 재빠르게 시야를 가로질러 뼈 무더기 아래로 숨어드려는 찰나ㅡ

­찌이이이이이익!!!!!!

손안에 든 단도를 내던져 등뼈를 관통하자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틋콩이 검을 늘어뜨리더니 아연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 말톤 씨는 투척술에도 능하시네요...? 이 거리에서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저분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우읍... 냄새... 으븝...”

­푸슉! 푸슉!

“...제가 가서 말리고 오겠습니다. ...로닌, 이제 됐으니 그만... ”

“우엑!!”

“야!!!”

소년이 틋콩의 바지춤을 붙잡고 속을 게워내자 그가 역정을 냈다. 철두철미할 거라 짐작했던 첫인상과 달리 부족한 점이 많은 듀오다.

‘아무리 봐도 왕실 측에서 부릴 만한 인재는 아닌 것 같은데...’

틋콩은 그렇다 쳐도 저 금발 소년은 모자란 점이 너무 많다. 만약 이게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처세술이라면 상당한 고단수지만.

잠깐 소란이 있고 난 뒤, 토실토실한 쥐 대엿 마리와 전갈, 지네 따위를 신발끈에 달랑달랑 꿰어서 은신처로 돌아오자 미미한 안도감이 들었다. 세 명이서 먹기엔 부족한 양이지만 허기만 때울 수 있으면 된다.

오는 길에 통로를 배회하며 간신히 긁어모은 목재로 작은 모닥불을 피우자

틋콩이 손질한 쥐 고기를 들고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뭐 그냥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그보다 동료분은 같이 안 먹습니까?”

“아 저놈은... 비위가 약해서 쥐고기를 먹을 바엔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하더군요.”

“....”

멀찌감치서 창백한 얼굴로 손사래치는 소년을 빤히 쳐다보자 틋콩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말톤 씨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까? 이 지하 공간의 존재를 포함해 이교도가 이곳에 은신해 있다는 건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텐데...”

“도서관에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베라스틴 어딘가에 옛 공동묘지가 있다는 건 지인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요. ...저도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틋콩님 일행은 이교도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고 했죠? 그때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겁니까?”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망쳐오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터인데.

“이교도가 포로를 수용하는 곳은 의식에 쓸 제물을 가둬두는 공간과 지하 감옥 이렇게 두 군데가 존재합니다. 저희가 갇혔던 곳은 후자고요. 그곳 역시 간수가 보초를 서고 있지만 광장에 비하면 탈출하기 훨씬 수월합니다.”

“...그렇다면 제 동료는 지하 감옥에 갇혀있기를 바래야겠군요.”

“으음...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틋콩이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지하 감옥이라는 게...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사람이 오래 버티기가 힘듭니다. 물론 사낭 쥐 수인은 독성에 면역이 있고 아가사 신전의 사제는 치유의 힘을 쓸 수 있을 테니 일반인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겠지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겠지요.”

“그렇다면 바로 출발해야겠네요.”

“앗 말톤 씨...! 그건 아직 안 익었는... 데...”

나는 모닥불 위에 방금 얹은 쥐 고기를 맨손으로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핏물이 뚝 뚝 떨어지는 선홍빛 살코기를 으적으적 씹어넘기며­

‘이교도라...’

이교도(??).

사교에 빠진 무리. 그릇된 신을 믿는 자들.

지금까지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 토드와의 약속이 있었다고는 한들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해가 되니까 해치울 뿐. 정녕 우리의 힘으로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베라스틴, 더 나아가 다른 왕국으로 아리엘과 라디를 데리고 피난을 가는 것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기필코 후회하게 하리라.

나는 전신을 옭아매던 가식의 족쇄가 한 꺼풀 벗겨지는 걸 느낀다.

반개한 사고가 시간을 역행하여 날 과거로 돌려놓았다.

거리낄 것 없던 그 시절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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