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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84화 (184/375)

〈 184화 〉 행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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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행방 #3

“그럼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준비되셨습니까, 말톤 씨?”

“예, 갑시다.”

짧은 휴식을 마친 뒤, 여정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은 단도로 깔끔하게 정리했고, 피범벅이 된 맨발은 긴소매 옷을 찢어 뜯어 동여매었다. 가슴팍의 상처는 여전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일 수는 있으니 상관없다.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쥐 고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식량은 이걸로 충분할까요?”

“네, 잘 찾아보면 가는 도중에도 간간이 곤충을 채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징그럽지만 어쩔 수 없죠. ...비위가 굉장히 강하셔서 다행이에요.”

“힘든 과거를 보냈거든요.”

말 그대로, 더한 것도 먹어봤다.

쥐고기를 익히며 나온 기름으로 제조한 횃불을 내세운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바위와 널빤지로 얼기설기 막아둔 격벽이 나왔다.

틋콩이 끙끙거리며 장애물을 치우더니 언성을 낮추고 속삭였다.

“조심하세요 말톤 씨. 여기서부턴 위험한 구간입니다. 언데드가 무리를 지어 출몰할 거예요.”

“...보통 몇 마리까지 나타납니까.”

“저희가 목격한 바로는 스무 마리가 함께 뭉쳐서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놈들 중엔 굉장히 강력한 개체도 간혹 섞여 있죠. 아무리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무시할만한 게 못 됩니다.”

“강력한 개체라...”

지난번에 봤던 해골 전사를 말하는 거겠지.

“제가 앞장설까요?”

“괜찮습니다. 위험한 건 저 녀석을 시키면 되거든요. 그러라고 있는 놈이니까요.”

틋콩이 냉정하게 눈짓했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는 로닌이 무딘 검 끝자락을 통로에 질질 끌며 앞서나가고 있었다.

원체 산만한 성격인지 통로 곳곳을 기웃거리며 실실 웃는 뒷모습에선 일말의 조심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계획대로 물자 창고에 도착하고 나면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이교도와 기사를 일망타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기사단장을 해치울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상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혹시나 말톤 씨가 이교도들에게 포로로 붙잡혔을 때 정보가 새어나가면 큰일이니까요.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틋콩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뒷말을 삼갔지만, 전장을 전전하며 단련된 눈썰미는 그의 손가락이 어깨에 멘 배낭끈을 움켜쥐는 걸 놓치지 않았다. 독약이라도 챙겨온 걸까?

한데 전방을 돌아보니 로닌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으로 묻자 녀석이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근데 말톤 씨는 F랭크라고 하셨죠?”

“네, 무슨 문제라도?”

“우와... 그럼 엄청 약할 텐데... 스켈레톤 상대로 싸울 수 있겠어요?”

“...제 몸 하나 건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쪽이야말로 조심하시죠.”

“에이~ 전 끄떡 없어요. 엄청 세거든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

냉소적으로 툭 내뱉었지만 그는 오히려 밝게 웃어 보일 뿐.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악의가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묘한 기척이 느껴진다.

“잠시만요.”

“...무슨 일 있습니까 말톤 씨?”

“혹시 이상한 느낌 안 들어요?”

“느낌...?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

대답 대신 자세를 낮추고 땅바닥에 귀를 가져다댔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각은 분명...

“...전투에 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뭔가가 오고 있어요.”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죠.”

틋콩은 반신반의한 분위기였으나 신속하게 행동했다. 묵직한 배낭을 지면에 내려놓더니 횃불을 바위 틈새에 고정하고 검을 빼들었다. 제법 빠릿빠릿한 모습.

문제는 이 녀석이다.

“에이... 나와봤자 고작 스켈레톤일 텐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 그냥...”

“로닌, 닥치고 말 들어. 부끄럽지도 않냐 명색이 사관학... 빨리 준비나 해.”

“네에...”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애초에 그에게는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발목이나 안 붙잡으면 다행이지.

잠시 후 뼈마디가 마찰하는 스켈레톤 특유의 소음이 석제 통로에 메아리쳤다.

“...말톤 씨 말이 맞았네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로닌을 시켜서...”

“그럴 시간 없습니다.”

“네...?”

머뭇거리는 틋콩을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단도를 뽑아 역수로 거머쥐었다. 지금 당장 라디와 아리엘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바, 이딴 잡몹에게 허비할 시간 없다.

어둑한 통로 저편에서 새하얀 형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육박해왔다.

“말톤 씨 조심하세요!! 저건...!”

“.....”

나는 대답 대신 단검을 뒤로 뻗었고, 반보 내디딘 앞발에 힘을 실었다.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놈들이 지척에 도달한 순간 단번에 터트린다.

커다란 개의 형상을 한 뼈 무더기에게.

­콰지지지직!!!!!!

“읏...!”

산탄처럼 뼛조각이 비산하자 틋콩이 경악성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연달아 진각을 내디뎠다. 때가 잔뜩 낀 이빨이 덮쳐들었지만 허리를 비틀어 흘려냈고, 체중을 실은 앞발이 가슴팍을 찍어눌렀기에 주먹을 박아넣어 응수했다.

­콰르르르륵!!!!

­까드드득!!! 카각!!

뼈대만 남은 본 하운드들이 기민하게 대응해왔다. 기다랗게 휘어진 갈빗대와 꼬리뼈를 날렵하게 가로저으며 사각에서 협공해온다. 놈들이 벽면을 박차오르자 흉골 사이로 이는 살바람이 날카로운 귀곡성을 자아냈고, 뼈마디가 돌바닥을 긁으며 불협화음을 형성했다.

제법 맹렬한 기세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콰가가가가각!!!!

일섬. 응축했던 힘을 폭발시킨다. 튀어나온 바위를 딛고 회전하며 난폭하게 깨부쉈다. 적의 숨결 속으로 파고들어 검격을 내지르고, 빗발치는 공격에 사양하지 않고 정면에서 분쇄했다.

­까락!! 까드드득..!

­크르르륵!!

“.....”

본 하운드들이 반 발자국 물러났다. 전략을 바꾸어 한 마리가 정면에서 대치하는 사이 나머지가 측면을 노렸다. 본능에서 비롯된 전술. 늑대가 사냥감을 사냥할 때 종종 봐왔던 모습이다.

그 말은 즉, 이미 질릴 대로 겪어봤다는 뜻이다.

검은 잔상을 남기며 약진했다.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순식간에 단도로 우두머리의 목덜미를 절삭했고, 머리 잃은 뼈 무더기가 상공에서 덮쳐오자 붕대 두른 발등으로 걷어차 석벽에 처박았다.

­크르르륵!!

사방에서 흙먼지를 뚫고 하얀 궤적이 쇄도한다. 횃불에 투영된 놈들의 치아가 벽면에 일렁이는 음영을 자아냈다. 놈들에게 마땅한 공격 수단이라곤 이빨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모조리 깨부숴주자.

“간다.”

­콰드드드드득!!!!!!

­.....!!

아래턱을 분쇄. 무릎을 찍어눌러 관절을 파괴. 삽시간에 약진하여 척추를 부수고, 제동하며 단도로 경추를 끊는다. 이어서 강습. 뺨을 스치는 뼛조각을 회피하며 맨손으로 강타해 응수하고, 선두에 선 놈을 걷어차 진형을 무너뜨렸다.

제아무리 단단한 뼈라도 세월이 흐르면 삭기 마련. 놈들이 아무리 날렵해도 내가 더 빨라지면 될 일이다.

발악.

한 녀석이 몸을 웅크렸다가 단숨에 뛰쳐들었다. 그와 발을 맞추어 두 놈이 하단에서 치달아온다. 나는 날밑으로 상악골을 베고 견갑골을 망가뜨렸다. 이내 뾰족한 이빨이 발목을 물어뜯었지만, 발뒤꿈치를 내려찍어 돌바닥에 처박았다.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뼈마디를 확실하게 짓밟아놓자 본 하운드 무리는 몸부림을 멈추고 완전히 침묵했다.

단도를 허리에 매달며 읊조렸다.

“...계속 가죠. 갈 길이 멉니다.”

“으음...”

출혈이 터진 가슴팍을 부여잡고 앞서나가자 틋콩이 멍하니 쳐다보며 말했다.

“말톤 씨... 굉장하시군요. 이렇게나 어둡고 협소한 공간에서 본 하운드 무리를 순식간에 격퇴하다니... 실제 모험가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F랭크입니다. 그보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죠. 소란을 듣고 찾아오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요.”

“아... 네... 하지만 그 단검의 정체는 대체 뭡니까? 갑자기 손에서 나타나지를 않나... 언데드의 뼈를 두부 자르듯 잘라버리지 않나... 로닌의 벨트도 상당히 튼튼한 물건이었는데...”

“....”

옷자락으로 태연하게 허리춤을 덮으며 말했다.

“그냥 좀 특수한 재질로 만든 검입니다. 이건 제 전력에 관련된 내용이니 묻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력 있는 모험가일수록 신중한 법이죠. 알겠습니다. 상당히 값진 물건인 모양이네요.”

틋콩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묘한 공기가 흘러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한데 왜 이런 곳에 사냥개 언데드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하에서 가축을 기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아, 그건 집행인이 데리고 온 얘들일 거예요.”

“집행인...?”

의외의 인물에게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로닌이 내가 쓰러뜨린 언데드의 잔해를 검끝으로 쿡쿡 쑤시며 말을 이었다.

“네, 그야 아주 오래전에 베라스틴에서 창궐한 이교도를 숙청하려고 왕실에서 집행인들을 보냈었잖아요? 그때 데려온 애들이 아닐까요?”

“....”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왕실에서 사람을 보냈다고요? 이교도를 처치하기 위해?”

“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긴데. 부모님이 안 말해주셨어요?”

“...그럼 그 집행인들이 이교도를 몰아내고 지하에 숨어들었던 시민들을 구원...”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뭔 사람들을 구해줘요. 베라스틴에 정상인이 한 명도 없었는데... 신이 역정 낼 일 있나.”

“네...? 그게 무슨 소리죠..?”

“로닌... 너 제발 그 입 좀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틋콩이 이마를 짚으며 로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뭐 어때요. 심심한데. 말톤 씨는 베라스틴 사람이 아니죠? 억양을 보니 다른 대륙 사람 같은데. 꽤 유창하시네요?”

“...네.”

“북쪽? 남쪽? 어디에요? 머리카락 색을 보아하니 혹시 마계...”

“그건 됐고. 방금 전 얘기나 더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라스틴에 정상인이 없었다고요? 그 말은 혹시...”

“네! 원래 이곳은 이교도들 천지였데요! 마을 목수도, 농부도, 요리사도, 매춘부도, 군인도, 영주도 싹 다요! 낮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밤만 되면 지하에 몰려들어서 의식을 벌인 모양이에요. 인육도 먹었다는데요?”

“...로닌.”

“그게 무슨... 제가 분명히 역사서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

“에이, 역사서? 요즘 그런 걸 누가 믿어요. 책이야 쓰는 사람 마음대로인데. 그럼 저도 제 자서전에 국왕이라고 적으면 왕족이게요? 적어도 검증된 자료인지는 따져봤어야죠~!”

“로닌.”

천천히 칼날을 들어올리는 틋콩을 손으로 제지하며 물었다.

“...그럼 왕실에선 어떻게 알아냈던 겁니까. 베라스틴의 시민들이 이교도라는 걸...”

“어떻게긴요. 행상인을 보내기만 했다 하면 사라지는데. 수백 년간 베라스틴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전부 합치면 딱 이 지하 무덤에 있는 유골 숫자만큼 나올걸요? 몇몇은 이교도들로 변절한 모양이지만, 대부분은... 아시겠죠?”

로닌이 보란듯이 혀를 씹는 시늉을 하며 장난기 다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혼자 깔깔 웃은 뒤 말을 잇는다.

“그런데... 집행인들이 이교도를 전부 박멸하지는 못했는지 많이들 도망쳤다나 봐요. 그 사람들이 지금의 베라스틴을 만들었고요. 결국 말톤 씨가 이 마을에서 마주친 사람 중 대부분은 인육을 먹고 자란 이교도의 후손이라는 뜻이에요.”

“....”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

시선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로닌이 두 팔을 능청스럽게 벌려보이며 웃는다.

“집행인들이 이교도를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이유가 이곳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래요!! 마을 주민을 고문해서 지하 예배당으로 가는 지도를 얻어내긴 했는데, 사실 이게 함정이었던 모양이더라고요! 분명히 들어갈 수는 있지만 빠져나올 수는 없는... 그런 엉터리 지도 말이에요! 참나, 얼마나 멍청하면 고작 그런 수법에 속았을까요. 경로 곳곳에 함정이 있는 시점부터 눈치챘어야죠. 안 그래요?”

설마.

창백한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지도는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아마...”

이교도의 후손 중 누군가가 다시 주워가지 않았을까요?

누군가에 의해 함정이 은폐된 지도.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지하 공간.

배회하는 해골 전사의 정체.

악마 숭배도.

이제야 알 것 같다.

“거기... 투구 쓴 모험가... 혹시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아니신가...?”

“네? 누구시죠...?”

“역시 자네가 맞았군!! 코볼트 킹을 쓰러뜨리고 소식이 없어 걱정했는데... 무탈해 보여서 다행일세!”

“아... 설마 ___씨? 오랜만입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럼 물론이지. 나 같은 늙은이는 어디 가봤자 받아주는 곳도 없지 않겠는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일세. 그때 자네가 구해 준 목숨은 덕분에 잘 쓰고 있다네.”

“....옆의 어여쁜 아가씨는 아내인가?”

그 미소의 정체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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