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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85화 (185/375)

〈 185화 〉 행방 #4

* * *

[185] 행방 #4

격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통로에 울려퍼졌다.

“─────!!!!!”

“지, 진정하시죠 말톤 씨. 여기서 큰 소리를 냈다간...”

“....”

섬뜩한 빛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알 수 없는 잡음이 귀를 갉아먹었다.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그림자의 속삭임이 활자를 이루어 날파리처럼 피부에 들러붙었고, 내면의 충동이란 충동은 죄다 일깨워져 사지를 앗아갔다.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저 믿었던 인물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만이 얼얼하게 사무칠 뿐.

가슴에서, 팔뚝에서, 언데드에게 물린 발목에서 피를 철철 내뿜으며 돌벽을 깨부수자 틋콩이 황급히 두 팔을 뻗어왔다.

“말톤 씨...! 상처가 도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

“제발... 진정하세요! 이러다간 생명이 위험...”

“와... 국물 줄줄 새는 것 봐. 뚜껑 한번 제대로 열린 모양인데요?”

“넌 닥치고 있어 로닌!! ...동료분을 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럴수록 침착해지셔야 합니다!!”

“.....”

서늘한 공기에 머리가 살짝 식을 즈음.

천천히 돌벽에서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이 맞다. 여기서 성을 내봤자 이교도가 원하는 데로 흘러갈 노릇. 감정의 객체가 되어 풍향에 휘말렸다간 이도 저도 되지 못한다.

이 분노는 오롯이 적에게 향해야 한다.

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차갑게 냉각해 심장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로서 미적지근하던 감정의 편린 한 조각이 빠져나간 걸 느낀다.

이것이 추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분명히.

“말톤 씨...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언데드가 몰려오기 전에 빨리 자리를 떠야 합니다. 저놈이 한 말실수는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혹시 남는 천 있습니까?”

“아 네, 네... 잠시만요... 배낭 어딘가에...”

틋콩이 등에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자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몸으로 배낭 안을 가리더니 낡은 상의 한 벌을 꺼내들었다.

“여분으로 남겨둔 옷입니다. 지금은 말톤 씨가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옷을 건네받은 뒤 걸치고 있던 천옷을 길게 찢어 상처를 동여맸다. 피부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단단하게 압박하고 셔츠를 뒤집어쓰자 퀴퀴한 냄새가 폴폴 올라온다.

희미하게 핏자국이 남아있는 목둘레를 잡아당겨 킁킁거리고 있자니 틋콩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그 속았다는 건 혹시...”

“지하수로 관리인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일면식도 있던 사이고 나름대로 인연도 있어서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자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베라스틴의 시민 중 사교에 물든 자가 존재한다는 정황은 이전부터 간간이 포착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곳 영주 또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해왔고요. ...설마 기사단장이 문제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두 분은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저희도 주워들은 게 전부입니다. 왕도에서 살다 보면 여러 소문이 들려오거든요.”

“그런 변명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입장이 입장인지라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말톤 씨도 본명을 밝히지 않았으니 비긴 셈 칠까요.”

“....”

눈치챘었나.

“...언제부터죠.”

“처음부터입니다. 직업 탓에 거짓말을 간파하는 건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하거든요. 말톤 씨도 저희에게 경계를 풀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충분히 상정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뭐, 뭐라고요...?!! 말톤 씨가 사실은 말톤 씨가 아니었다고요...? 와, 완전히 속을 뻔했네!! 그럼 말톤 씨가 말톤 씨가 아니면 이제 말톤 씨는 뭐라고 불러야...”

“...산만하니까 입 다물어 로닌. 너도 허사를 간파하는 훈련 정도는 받았을 거 아냐.”

“그런가? 전 이론 수업 때 그냥 졸기만 해서...”

“....”

틋콩이 한숨을 내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앞길을 재촉했다.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람이 저희 일행을 이곳으로 보낸 건지도 아십니까? 이교도 입장에선 저희는 골칫덩어리 같은 게...”

“동시에 아주 좋은 제물이죠.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모험가만큼 이용하기 편한 상대...”

“돼지가 사과를 물고 찾아온 격이네요!”

“사과를... 닥쳐. 그러니까...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실제로 제가 봐왔던 희생자 중에는 마을에서 납치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무장한 모험가도 있었습니다. 아마 소수에게 은근슬쩍 정보를 흘린 거겠지요. 어쩌면 말톤 씨처럼 가짜 지도를 쥐여줬을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이쁜 여자일수록 제물의 가치가 높아진다네요!”

“....”

배신감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발걸음을 멈추고 칼자루를 움켜쥐자 로닌이 히죽 웃으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말톤 씨.”

“...뭐가 말입니까?”

“그야... 동료 중 한 분이 아가사 신전의 사제라고 했었죠? 그럼 가장 마지막에 제물로 바쳐질 테니까요!”

“어째서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맛있는 건 아꼈다가 먹는 법이잖아요! 나라면 그렇게 할 텐데. 이교도가 제일 증오하는 게 아가사 사제이기도 하고.”

“로닌!!!”

“괜찮습니다 틋콩 씨.”

상관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낼 거다.

그래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말톤 씨... 괜찮으십니까...?”

“네, 왜죠?”

“그냥... 아까부터 말이 없으셔서... 어쩐지 사람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날카롭게 정제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전 괜찮습니다. 앞길 조심하시죠. 물에 젖어서 미끄러우니.”

“....”

틋콩이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봤기에 묵묵히 앞길을 재촉했다.

전운이 감도는 성채처럼 침묵한 채 지하수가 자작하게 깔린 통로를 나아가고 있자니 문뜩 로닌이 볼썽사납게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잠깐, 어디서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적이야?”

“음... 물소리 같은데요? 이런 곳에 수원이 있었나... 웅덩이가 나오는 데는 조금 더 아래 아니에요?”

“경계를 늦추지 마 로닌. 혹시라도 지형에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에이... 잔소리 안 해도 알아요. 그리고 암만 들어도 그냥 물소리인데... 물배라도 잔뜩 채울 수 있겠네요!”

“....”

조금 더 발길을 옮기자 로닌의 말대로 소음의 근원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친 건 오아시스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떨어진 광경이었다.

“제길...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 못했는데...”

수로.

눈앞으로 거대한 물길이 지나갔다. 반대편까지 십 미터가 족히 넘을 듯해 보이는 수로에는 시꺼먼 물살이 소용돌이쳤고, 천장까지 길게 뻗은 쇠창살에 가로막힐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을 유발했다.

틋콩이 심상치 않은 양의 탁류가 쏟아져나오는 상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상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수량이 급격하게 불어난 모양입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물살이 거칠긴 하지만 못 건너갈 정도는 아니다. 철창쯤이야 파괴하면 그만이고.

앞으로 나서며 소매 밑단을 걷어올렸지만, 그가 팔을 뻗어 만류했다.

“그건 무립니다. 원래 저 창살 밑부분에 개구멍이 있는데 수면 아래로 잠겨버렸어요. 무리해서 뚫고 나아가려고 했다간 분명 휩쓸릴 겁니다. 게다가... 정작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뭐죠?”

“그건... 바로 사기(??) 때문입니다. 말톤 씨도 베라스틴의 땅이 오염된 걸 보셨겠지요. 언데드가 내뿜는 부정한 기운과 진액, 사채 따위를 소각하고 나온 재 등이 이 물속에도 녹아들어 있을 겁니다. 언데드의 사기를 잘못 뒤집어썼다간 극히 치명적이고요.”

“.....”

마차를 타고 베라스틴에 도착했을 때 목격했던 보라색 들판이 떠올랐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우선은 이곳을 우회할 예정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여기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말톤 씨...!”

틋콩이 말을 마칠 시간을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시꺼먼 물살에 발을 담그자 요동치는 급류가 피부를 강타했다. 유리창에 번져나가는 서리처럼 서늘한 기운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고, 세찬 물보라가 옷자락을 적셨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은데요?”

“말톤 씨...! 위험하다니까 어째서...”

“시간이 없으니까요.”

목 아래까지 수위가 차올랐다. 살갗이 벌겋게 익어버릴 만치의 지하수는 차가울 게 분명했지만,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 버린 가슴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녀들을 되찾기 전까지는 다시 뛰지 않으리라.

­찰팍...! 찰팍!!

물살을 거슬러 더욱 나아갔다. 드센 격류가 몸을 밀어냈지만 묵직한 두 다리를 움직여 전진했다. 먹을 뿌려놓은 화선지처럼 새까만 지하수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까닭에 불길함을 가중시켰으나, 수면 아래 팽배한 죽음의 기운이 지금 내겐 너무나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스스로의 심층 의식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감각이었다.

머잖아 수로 한가운데를 틀어막은 철창에 도착하자 틋콩이 소리쳤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좀만 더 가시면 아래쪽에 구멍이 있습니다!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

묵묵히 단도를 들어올렸다. 차가운 칠흑빛 광택을 머금은 칼날. 마력을 구사하는 마물을 상대할 때가 아니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절삭력을 보여주었던 단검이다. 이거라면 손쉽게 철창을 잘라낼 수 잇을 터.

하지만 나는 창살에 칼날을 가져다대기 직전, 잠시 멈칫했다.

“말톤 씨,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시라도 위험하면 곧바로!”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니 거기서 지켜보고 계세요.”

“....”

성장했다.

미묘한 변화지만, 그간 매일같이 이 단도를 다루었던 나이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칼날의 길이가 미세하게 늘어났다는 것을. 여태껏 이 단도가 변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건 아니지만...

유적의 묘실 속에서 발견했을 때 이 단검은 여기저기 헤지고 낡아 있었다. 사용에 사용을 거듭함에 따라, 마물의 피로 날을 적셔올 때마다 녀석은 점차 생기를 얻어갔고 이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챌 만큼 신오한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날이 성장한 적은 없었다.

“말톤 씨...?”

“...잠시만요.”

틋콩이 의아하게 쳐다봤기에 잡념을 지우고 현 상황에 집중했다.

두꺼운 쇠창살을 단칼에 절삭해 성인이 통과할 수 있을 법한 구멍을 만들자 로닌이 멀찌감치서 감탄했다.

“우와...! 그 단검 엄청 날카로운데요? 무쇠를 힘도 안 들이고 베어버리다니... 얼마에 주고 사셨어요?”

“지인에게서 양도받은 겁니다.”

“저랑 바꾸실래요? 이 철검도 좀 낡긴 했지만 제법 쓸만한데.”

­캉캉!

“...틋콩 씨도 빨리 넘어오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틋콩이 옷을 탈의해 배낭에 넣고는 허겁지겁 수로를 건너왔다.

그가 무사히 건너오는 걸 시야 구석으로 확인하고는 다시금 통로를 나아가자 잠시 후 로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헉... 좀 기다려 주면 어디 덧나나... 따끔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네. 그쪽은 멀쩡한가 봐요?”

“...뭐 말입니까.”

“아니 저 물 말이에요. 저렇게 사기가 짙게 응축된 물에선 반나절만 있어도 좀비가 되어버릴 텐데. 근데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진짜 악마...”

“로닌!!!”

“.....”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앞길을 나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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