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행방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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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행방 #5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죠. 말톤 씨가 서두르려는 마음은 알지만 적당한 때에 휴식을 취해 주지 않으면 기사와의 교전을 앞두고 컨디션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르면 내일 오후쯤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으차차... 드디어 좀 쉬네. 어디 빵 남는 거 좀 있어요?”
“...넌 철 좀 들어라. 와서 불이나 피워. 주변에 널린 쓰레기 좀 치우고.”
“네에...”
로닌이 늘어지는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는 내팽개쳤던 장작을 끌어모아 주섬주섬 부채꼴 모양으로 쌓고는 검 끝으로 바위 파편을 툭툭 구석으로 밀어냈다.
틋콩이 바닥에 침구류를 깔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곳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 말톤 씨께서는 주변을 탐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몇 번 왕래한 장소긴 하지만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혹여나 언데드가 자리를 잡았으면 큰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문턱을 빠져나왔다. 통로를 전전하다 보면 이따금 이렇게 빈 공간을 발견하곤 했다. 의식이 길어질 때를 대비한 건지, 이곳에서도 사람이 살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그러니까 이게 다 이교도가 만든 거란 말이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알고 나니 모든 게 달라졌다.
통로를 메운 벽화. 그에 묘사되었던 수많은 죽음. 전에는 비탄에 잠긴 듯했던 시민의 얼굴이지만 이제는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보인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부뚜막의 솥에는 인간의 발꿈치가 빠져나와 있었고, 쇠스랑을 든 농부가 경작중인 흙밭에는 사람의 유골이 비료로 뿌려져 있었다.
“....”
벽화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길 잃은 두더지가 파내려간 땅굴처럼 복잡하게 꼬인 토굴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참호를 떠올리게 한다. 통로 중간중간 예고 없이 불어오는 한랭한 바람은 시나브로 체온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횃불을 내세우며 길을 나아가던 차, 문뜩 시꺼먼 음영 하나가 시야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재빨리 단도를 겨누며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뭐야... 너희들이었냐...”
찍찍...! 찍!!
흙벽으로 틀어막힌 굴 안쪽을 엿보자 득시글거리는 회색 생쥐가 보였다. 녀석들은 반달곰을 발견한 벌떼처럼 토굴을 다급하게 뛰어다니며 도망갈 구석을 찾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가로막고 선 길이 유일한 출구였던 모양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식량이나 좀 확보해둘까...”
적당히 굴 입구에 걸터앉았다. 작달막한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든다. 라디와 만나고 난 뒤부터는 쥐를 죽이는 게 살짝 꺼려졌으나 그녀 또한 아무렇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곤 했으니 상관없겠지.
“일단 하나.”
찌이이익!!!
단도를 투척하자 짧은 단말마와 함께 한 놈이 절명했다. 잇따라 섬세하게 손목을 돌리자 손가락 사이에 시꺼먼 외날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다시 반복. 손에 익을 대로 익은 단도를 능숙하게 내던지며 한 번에 한 마리씩 목숨을 앗아갔다.
그렇게 식량 확보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이어나가던 중, 잔해더미 아래에서 큼지막한 형체가 뛰쳐나왔다.
끼이이이이이익!!!!
“깜짝이야...”
고양이 정도 체구. 핏발 선 두 눈동자에는 붉은 안광이 흘렀다. 그뿐이었으면 그냥 덩치 큰 쥐라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놈에게는 유별난 점이 하나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동쪽 숲에 돌연변이 마물이 출현했다는 말도 있었지.”
뿌리.
녀석의 등에는 버드나무의 뿌리를 연상시키는 굵은 촉수가 자라나 있었다. 아마 사기에 오염된 영향이겠지. 나도 그 지하수 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면 이렇게 변했을까.
끼이익!!!
돌연 녀석이 뛰쳐들었다. 비대한 앞다리를 절룩거리며 덤벼드는 쥐 마물. 균형도 맞지 않는 비대칭 체구로 지금까지 살아온 게 용할 정도다.
푸욱!!!!
“....”
여유롭게 가슴팍을 꿰뚫자 금속 칼자루 너머로 미약한 심장의 박동이 전해졌다.
차츰차츰 맥박이 멎어가는 사체를 칼날에서 떼어내고 마저 쥐를 사냥하려던 차,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틋콩 씨?”
....
로닌인가.
칼날에 묻은 피를 돌벽에 긁어내며 돌아보려던 차
딱...!
“.....!!!”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으며 단도를 치켜들었다. 이 마찰음은 스켈레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 손에 든 횃불을 높게 들어올려 어둠을 밝히자 좁다란 통로 너머로부터 새하얀 반사광이 다가왔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경계하자
“너희는... 코볼트..?”
어린아이 크기 체구. 구부정한 등. 툭 불거진 손가락 뼈.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몬스터도 언데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어둡고 비좁은 환경은 코볼트가 제일 선호하는 장소고, 쥐나 벌레를 주식으로 삼는 만큼 먹이 또한 충분하다. 실제로 불과 석 달 전 즈음 이곳 상층에서 놈들과 조우한 적도 있으니.
하지만...
“...저건 뭐지?”
한 코볼트의 발목에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고리가 씌워져 있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특유의 파장은 분명...
슈우우욱!!!
“...!!”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한 놈이 날렵하게 팔을 휘둘러 온 까닭. 녀석은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접근해왔지만, 그 정도로는 내 감각을 속일 수 없다.
파가가가각!!!!!
....!!
기민하게 발을 차올려 손목을 분쇄하고 머리통을 붙잡았다. 천천히 손아귀를 들어올리자 녀석이 공허한 안와골로 올려다본다. 하지만 나는 무덤덤하게 놈을 돌바닥에 내려찍었고, 터져나간 뼛조각을 짓밟으며 바로 섰다.
감흥이 없다.
전투의 긴장감도, 파괴의 고양감도 그저 빈 방을 두드리듯 허무하게 어긋나갈 뿐.
돌진. 단도로 늑골을 절단했다. 이어서 정강이를 압박, 허리를 굽히고 경추를 단절. 한 놈이 육탄 공격을 감행했지만 날렵하게 돌려차 벽에 처박는다.
딱...! 따각...!!
따각따각따각!!
놈들이 뼈마디를 덜컥거리며 덮쳐들었다. 즉시 단도를 역수로 바꿔쥐어 흘려냈다. 밑날로 놈들의 광대를 쳐올리고, 주먹으로 쇄골을 깨부숴 떨쳐낸다. 신속하게 전환. 왼손 정수로 손잡이를 움켜쥐고 엄지로 칼날을 밀어넣는다. 난폭하게. 더 빠르게.
“....”
어쩌면.
지금이라면 불러올 수 있을까.
“와라.”
....!!!
콰르륵...
돌연 발밑이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지각을 뚫고 검은 아지랑이가 솟구쳤다. 젖은 나뭇단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무처럼 맹렬하게 밀도를 더해나가는 검은 기운.
뒤이어 통로 곳곳에서 튀어나온 개미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코볼트를 물어뜯었다.
이제 이 능력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안디라 신의 권능이라 했던가...”
이걸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이교도를 단신으로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텐데.
스켈레톤을 잘근잘근 씹어먹는 개미들을 바라보며 단검을 거둬들였다. 쓰임새에 따라서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위력적인 기술이지만,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게 문제다.
지금까지는.
어쩐지 이전과 다른 감각에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차, 시야 언저리로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그건 놔둬.”
크샷...?! 크샤샥!!
한 개미가 코볼트의 다리뼈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려 하길래 손을 뻗어 제지했다.
조금 힘을 들여 뾰족뾰족한 집게턱 사이에서 뼈를 빼내자 녀석이 시무룩하게 더듬이를 늘어뜨렸다.
“...금방 돌려줄 테니까 기다려.”
아직 찐득찐득한 살점이 남아있는 발목에서 푸른 고리를 빼내자 고약한 진액이 날실처럼 늘어졌다. 구역질 치미는 광경. 아무래도 스켈레톤으로 변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을까.
다리뼈를 허공에 내던지자 개미가 프리스비를 낚아채는 셰퍼드처럼 깡총 튀어올랐다.
나는 신나서 다리뼈를 먹어치우기에 여념이 없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손바닥에 든 고리를 내려다봤다. 싸구려 철체로 만들어진 단순한 장신구. 기능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미적인 가치는 전무했지만, 중앙에 박힌 자그마한 마석에서는 어렴풋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예 구속구.”
나도 한때 이러한 걸 찼던 적이 있으니 알고 있다.
명백하게 인간이 제작한 세공품이다. 적어도 코볼트 따위가 차고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다. 모험가에서 노획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이즈로 보아 코볼트에게 맞춰서 제작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더군다나 더욱이 마석을 감싼 철제 고리에서 미세하게 칠이 벗겨진 흔적이 엿보였다. 코볼트의 털 색깔에 맞추어 고리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함이었겠지. 언데드로 변한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발찌를 주머니에 넣고 야영지로 돌아가고자 마음먹은 순간...
“야, 야...! 뭐해! 멈춰!!”
크샥...?
“젠장... 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괜히 일 벌이지 말고.”
어느새 개미들이 침을 뚝뚝 떨구며 내가 사냥한 쥐까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해 서둘러 그림자 속으로 되돌렸다. 녀석들은 이게 문제다. 식탐이 너무 왕성한 나머지 잠깐만 틈을 줬다 하면 모조리 먹어치우려 드니까.
어떤 의미로는 언데드만큼이나 본능에 충실한 놈들.
단검을 허리춤에 고정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간단히 쥐를 손질한 뒤 여분 신발끈에 꿰어들고 일어서니 허리가 뻐근했다. 이 정도 양이면 당분간은 끄떡없겠지. 그런데...
“...넌 왜 안 돌아가냐?”
키샥..?
개미 한 마리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엿 살 어린아이만 한 크기. 덩치는 조금 작긴 하지만 욕망에만 충실했던 다른 개체들과는 달리 두 눈동자에 은근한 지성이 감돌았다.
잘 보니 집게 모양이 독특한 게 아까 다리뼈를 낚아챘던 그 녀석이다.
“야, 빨리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틋콩이 보면 어쩌려고...”
크샷...! 키샤샥...!!
“배고프다고?”
크샥!!
“...이거 줄 테니까 먹고 떨어져.”
툭.
크샤샤샤샤샥!!!
손질한 쥐 내장을 떼어 던져주니 녀석은 일주일은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고 통로를 나아가자니 머잖아 등 뒤에서 쫄래쫄래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사이 쪼르르 달려와서는 꿀떡 침을 삼키는 모양새가 썩 애교스럽긴 하다.
“따라올 거야?”
끄덕끄덕!
“...그럼 아주 멀리서 뒤따라올 수 있겠어? 일행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럼 같이 가게 해줄게.”
녀석은 잠시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더듬이를 뻣뻣하게 세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는 수 없이 그림자로 되돌리려는 찰나, 놈이 통로를 앞서나가며 내 쪽을 돌아봤다.
“...따라오라고?”
끄덕..!
“안내해 주려는 거야?”
끄덕끄덕!!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끄덕.
“너 길 모르지.”
.....
“...동행하게 해줄 수는 있는데 지금은 안 돼. 일행한테 들키면 큰일이거든. 대신 나중에 너만 따로 소환해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알겠지?”
더듬이를 격하게 흔드는 시꺼먼 개미를 바라보자니 어쩐지 울시가 떠올랐다. 녀석도 먹이를 던져주면 저렇게 꼬리를 좌우로 붕붕거리곤 했는데.
한숨을 내쉬며 야영지로 향했다. 이 녀석이 내 명령에만 잘 따라준다면 제법 유용할 거다. 은밀하게 상대를 정찰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은 이교도와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만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상황이니까.
어쩌면 틋콩 일행에게서 안디라 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쥐 뭉치를 달랑거리며 야영지로 되돌아오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늑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에는 손바닥만 한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얇은 모포는 그럭저럭 안락해 보였다.
틋콩이 화색하며 말을 건넸다.
“아, 다녀오셨군요. 그건... 방금 잡으신 겁니까? 굉장하신데요?”
“별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두 분께 물어볼 게 있는데... 로닌은 어디 있습니까?”
“아... 잠시 확인해볼 게 있다고 사라지더군요. 녀석이 그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잠시 후면 돌아올 겁니다.”
“뭐, 마침 잘 됐습니다. 잠시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이것만 마저... 로, 로닌!!!”
그때였다.
틋콩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진 건.
재빨리 그의 시선을 쫓자ㅡ
“미안해 말톤 씨.”
검광이 번뜩이며 날카로운 고통이 목덜미를 베어파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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