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87화 (187/375)

〈 187화 〉 행방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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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행방 #6

잠시 과거가 뇌리를 스쳐갔다.

혼탁해진 기억의 수렁에서 끄집어내조차 꺼리던 공백의 기간.

이세계에 떨어지고 숲에서 생존했던 첫 해.

그 말미에, 나는 노예로 팔려나갔다.

인간에게는 친화적이지 않은 곳이었다. 싱그러운 풀잎 따위 전무한 황야는 검게 메말라 고목의 밑동처럼 갈라졌고, 밤이면 밤마다 들짐승의 울음소리와 이루 말할 수 없이 해괴한 마물이 배회하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손을 피로 물들이게 된다.

이는 내 명예이자 오명이었다.

타인의 선혈을 짓밟고 걸어온 길은 상냥하지 않았고, 언제나 꼬리표로 남아 내 등을 장식했다.

그런 내가 그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조금 유별났던 한 녀석 덕뿐이었다.

“자, 잘 봐! 이게 포크고 이건 나이프야. 저기 하얀 건 냅킨이고! 어때, 이런 건 처음 보지?” “....” “그리고 이건 내가 제일 아끼는 인형! 원래는 안 되지만 특별히 ___한테 줄게! 이걸 껴안고 자면 잠이 솔솔 잘 온다구!”

그녀는 내게 식탁 예절과 사람의 온기, 이 세계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주었다. 상처 입은 내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고, 비가 새지 않는 거처와 안락한 침대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녀석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

지독한 럼주 냄새와 육중한 오크통, 썩은 나무판자와 쥐가 들끓던 지하 갑판에 숨어 푸른 바다 너머로 몸을 맡기기 전까지도.

그렇게 항구를 밟고 하염없이 걸어 도착한 장소는 외진 숲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각오를 마쳤다.

내가 살아왔던 숲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나를 품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를 거두어가길 바랐다.

하지만 하늘은 사신 대신 그녀를 내게 보냈다.

“저... 괜찮으세요...? 사, 상처가...! 이대로 가다간 곧 죽을 거예요..!!” “꺼져.”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제가 치유해줄 테니...”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꺼져.” “...일단은 얌전히 치료받으세요. 불평은 나중에라도 달게 들어줄 테니.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요?” “그쪽이야말로 명줄이 아깝지 않나 계집? 내가 네년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봐왔어요. 입은 거칠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겁쟁이죠.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상처입힐 줄밖에 모르는 겁쟁이요.” “내가 그들과 같을 거라 생각하나?” “네.” .... .... .... “...이름” “저요?” “.....” “아리엘. 그게 제 이름이에요.”

*

스며나오는 핏물. 찢어진 목둘레에서 흘러나온 혈흔이 셔츠를 적셨다. 단도를 뽑아드는 게 단 일 초라도 늦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일격.

설마 공격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반응이 늦어지고야 말았다.

목덜미를 지긋이 압박하며 차갑게 올려다보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금발 사내가 보였다.

“...왜.”

그가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네가 소환수와 대화하는 걸 봤어.”

“.....”

“두 달 전, 던전에 있었지? 절벽 위, 도적 무리, 거대 마물... 뭐 기억나는 거 없어?”

틋콩이 칼을 뽑아들었다. 언제나 감정보단 이성이 앞섰던 사내. 곳곳에 이가 나가고 녹슨 검이 둔중한 광채를 드리웠다.

나를 향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틋콩 당신마저.”

“죄송하지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이래 봬도 이 녀석 또한 나름 수사관이거든요. 아무래도 저희는 구면이었던 모양입니다.”

틋콩이 내 안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다갈색 눈동자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고, 나를 향한 적개심이 물씬 묻어나왔다.

과거에도 사람들로부터 줄곧 받아왔던 그런 시선.

나는 그런 이들을 똑바로 마주 보며 싸늘하게 냉소했다.

“그래... 그랬던 거지... 잠시나마 타인을 믿은 내가 어리석었어. 애초에 너흰 나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닙니다 말톤 씨. 저희 또한 당신과 대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해명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당신의 출신과 종족...”

“웃기지 마. 애초에 너희는 협력할 생각이 없었어. 단순히 이용할 상대를 원했던 거니까. 이제 필요가 없어지니 내칠 뿐이고. 그래, 이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었어. 나도 그간 너무 해이해졌네.”

“...말톤 씨가 설명만 해주시면 곧바로 검을 거두겠습니다. 저도 이번 일이 로닌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길 바랍니다. 분명 대화로 해결할 수...”

“틋콩 님, 이 남자 살기가 더욱 짙어졌어요. 대화로 풀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인데요?”

“말톤 씨...”

“....”

단검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시커먼 날끝 너머로 두 남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지적한 소환수. 틀림없이 개미를 말하는 거겠지. 놈이 코볼트 스켈레톤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흑마법사라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나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틋콩이 안타까움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정말로 저희가 대적하지 않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방법은 무슨. 입에 바른 소리 처하지 마.”

“죽일까요?”

“기다려 로닌. ...말톤 씨, 아직 되돌릴 수 있습니다. 분명 저희 관계는...”

“좆까.”

발치의 돌멩이를 차올렸다. 손가락 마디만 한 자갈이 틋콩의 미간을 관통할 기세로 육박했으나 로닌이 뻗은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그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돌멩이를 으스러뜨리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말톤 씨...”

“.....”

놈들과 손을 잡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한번 등을 돌린 사람은 절대로 신뢰할 수 없다. 배반자에게 기회를 주는 건, 날카롭게 날을 세운 단검을 칼집 없이 품 안에 넣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틋콩은 내 안구에 서린 각오를 확인하고는 검을 떨구더니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톤 씨. 저희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적대하는 일은... 최대한 없었으면 좋겠군요. 여전히 동료를 구하는 걸 목적으로 움직이실 예정입니까?”

“그건 이제 네 알 바 아니야.”

나는 그에게서 매몰차게 시선을 떼고 발걸음을 돌렸다. 모닥불을 등지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으슥한 바람이 피에 젖은 옷깃을 휘날렸고, 장작불을 꺼트려 검은 연기를 피어올렸다.

이제는 적대 관계가 되어버린 금발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냥 가시는 거예요? 전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는데.”

“....”

나는 잠시 그를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에 아릿한 살기를 담아­

“두 번 다신 그 낯짝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땐 내가 네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테니까.

그리 고했다.

*

­찰팍.. 찰팍...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로를 거닐었다.

복도에는 시꺼먼 암흑이 드리웠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 불안하게 명멸하던 횃불은 식었다. 앞길을 밝히는 조명이라곤 발치에 자작하게 깔린 지하수의 잔향과 그 위를 비추는 희미한 푸른빛이 고작.

손바닥 위에 놓인 철제 고리를 내려다보았다.

“.....”

마석(??).

마력을 품은 광석. 이보다 더 깔끔한 정의가 또 있을까.

예로부터 마석은 유용하게 쓰여왔다. 내부에 품고 있는 성질에 따라 메말라가는 논밭에 농업수를 공급하기도 했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장간의 풀무질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콤한 과실에는 으레 벌레가 꼬이기 마련.

이로운 역사만큼이나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든 것이 마석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치와 희소성에 많은 왕국이 마석 광산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명이 연표 저편으로 퇴장했으며, 소수의 귀족과는 달리 대부분의 평민은 편익을 누리지 못했고 이러한 불균형은 사회 계층 간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하였다.

선혈로 점철됐다기엔 너무나도 영롱한 푸른 광채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석 안쪽에 새겨진 정교한 룬 문자가 보였다. 내 짧은 식견으로는 해석할 수 없지만, 이 투박한 장신구가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노예라...”

노예 구속구로 마물을 길들인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다. 인간하고는 사고 체계가 달라서 효력이 없다는 내용을 어디선가 얼핏 봤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위치를 추적하는 정도라면 가능할 터.

날 이곳으로 오게 한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시체가 없어졌다고 했었지.”

코볼트 킹을 쓰러뜨린 다음 날, 그가 지하수로로 들어가 확인했을 땐 사망한 모험가들의 유해가 사라진 뒤라고 했다. 협소한 통로에는 미세한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었고.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유추해보면, 그때 조우한 코볼트는 이교도가 몰래 사육하던 마물이 아니었을까?

충분히 일리 있는 가설이다. 이 발찌는 관리를 용의하게 하기 위해 제작했을 터다. 어쩌면 불법 테이머가 한 명쯤 있었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지하수로 청소 의뢰는 영주성에서 하달한 거였지...”

지하수로는 영주성 관할 구역이다. 도시의 중요 시설을 사설 단체에게 맡겼다간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그날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평범한, 아니 평범 아래를 밑도는 신세였던 내가 덥석 의뢰를 받아들인 것밖엔.

상급 모험가가 그런 궂은일을 도맡아 하진 않을 터, 의뢰 수주 대상은 자연스레 나 같은 저랭크 모험가로 한정된다.

이는 사고사로 처리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고.

사람이 쉽게 죽어나가는 이 세계에서 F급 모험가가 몇 명 사라진다고 한들 소란을 피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잠시 입소문으로 오르내린다고 한들 반짝 성행하다 사라지는 유행처럼 금방 시들해질 게 분명했다.

다만 놈들에게 한 가지 오산이 있다면...

“감히 나를 제물로 삼으려 해...?”

그것도 두 번이나.

독한 증오가 위스키처럼 몸속을 타고 내려가 위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부상하는 감각을 자각하다 끝내 잇새로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금 몸뚱아리 하나만 남게 된 내 처지가 우스웠기에.

가증스러워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다.

­타각..! 타가가가각...!!!

­첨벙첨벙첨벙!!!

­키이이익!!! 키익...!!

돌연 수면 아래서 큼지막한 마물이 나타났다. 몸길이가 삼 미터는 족히 넘는 커다란 악어. 허나 놈은 내게 이빨을 벌려 보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녀석이 등을 보이며 도망가기도 전에, 칠흑색으로 일렁이는 개미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 살점을 뜯어냈다.

­.....키익!!

붉게 물들어가는 수면 위를 거닐자 한 개미가 다가와 내 발치에 턱을 문댔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며 읊조렸다.

“수고했다.”

­크샥!!!

곧 잔잔한 수면에 은연한 불빛이 비쳐온다. 저 멀리서부터 뻗어오는 어슴푸레한 조명이 시야를 밝혔다. 거대한 광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흑발을 나부꼈다.

이제는 단도라고 부르기엔 조금 기다란 외날검을 늘어뜨리며 뇌까렸다.

“내 가장 소중한 걸 뺏어가겠다 이거지...?”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잠시 다녀올 때다.

옛적, 투사의 악몽이란 이명을 떨치던 그 시절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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