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악몽의 재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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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악몽의 재림 #1
횃불이 새하얀 얼굴을 비추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고, 쥐들조차 접근을 기피하는 그곳에 창백한 갑주를 걸친 세 기사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본디 베라스틴의 치안을 수호해야 할 이들이지만 바위 뒤로 감춰둔 깨진 술병과 안주, 희생자로부터 갈취한 금품 따위로 그들의 방탕함을 유추할 수 있었다.
취기 어린 흥성거림이 지하에 울려퍼졌다.
“...그래서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곧바로 숙소로 되돌아와서 일정 내내 틀어박혀 있었지.”
“이야...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도 그런 마물 좀 보고 싶다. 내가 목격했던 제일 큰 놈은 와이번이었는데.”
“뭐, 와이번을 만났다고...? 베라스틴 근처에서?!”
“아니아니, 베라스틴은 아니고 저 멀리 파병 나갔을 때. 갑자기 머리 위로 시꺼먼 그림자가 지길래 올려다봤더니 집채만 한 마물이 떠다니고 있지 뭐야? 하마터면 오줌 지릴 뻔했지... 야 신참, 넌 무슨 재밌는 얘기 없냐? 가만히 있지만 말고 말 좀 해봐.”
“맞다, 넌 동쪽 해안가에서 왔다고 했지? 바다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거대한 마물이 득시글거린다던데... 뭐 없냐?”
“...정말로 궁금하십니까?”
“뭐, 뭐야 목소리는 왜 갑자기 깔고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다소 뻣뻣한 자세로 경계를 서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어촌 출신이라는 건 두 분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개중에서도 제가 살던 항구는 옛날부터 유독 기이한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중 제가 직접 겪은 일화 하나를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기이한 일이라...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아마 올해 초 즈음이었을 겁니다. 봄이 막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위화감이 들 정도로 더운 날이었습니다. 정오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바가지에 담아둔 물이 죄다 날아갔을 정도였으니...”
“해안가가 확실히 덥긴 하나 보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뭐랄까... 좀 이상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어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물고기가 떼로 죽어있지를 않나... 수산시장에 있는 생선이 죄다 상해버리질 않나... 하지만 그러면서도 파리 한 마리 꼬이지 않더군요.
...아무튼, 그날은 제가 하역 당번이라 선착장의 차양막 아래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정에 없던 배 한 척이 항구에 들어온 겁니다. 연식이 상당히 오래된 범선이었는데 폭풍우에라도 당했는지 돛이 죄다 찢겨져 있었습니다.”
“...계속해.”
“네, 꺼림칙하긴 해도 어쨌든 일은 해야 하니 점검표를 들고 서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다리를 안 내려주는 겁니다. 소리도 질러 보고 별짓을 다 해봤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취해서 곯아떨어진 윌슨이란 영감을 깨워다 같이 올라갔습니다. 맥주 한 병을 대가로.”
“잠깐, 어떻게 올라갔는데?”
“그분이 앵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좀 노망이 들긴 했지만 왕년에 불법 선박을 단속하던 사람이라... 아무튼 그렇게 간신히 선체에 올라섰는데... 전부.. 전부....”
“...전부?”
“.....”
과거를 되짚는 사내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전부 참혹하게 죽어있었습니다. 그 배에 있던 선원 모두가. 갑판 위는 찐득한 피로 흥건해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소금바람에 절여진 시체가 무참히 토막 난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서진 마스트에 꽂힌 시체는 갈매기한테 파먹히고 뙤약볕에 방치되어 도무지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박 어디를 둘러봐도 들끓는 악취와 쇠파리로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방금 지어낸 얘기지...?”
“제가 두 분께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해적에게 당한 걸까...?”
“...그건 아닙니다. 해적은 보통 세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저들만의 증표를 남겨놓는데 그 배에는 그러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물자도 전부 멀쩡했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의아한 점이...”
“...뭔데.”
“값비싼 향신료와 찻잎 같은 건 하나도 안 건드렸으면서 그 배에서 사라진 물건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선장실의 진열장 안에 있던 물품이었는데... 팻말을 보니 토착민 부락에서 강탈한 가면이더군요. 투구처럼 머리까지 완전히 덮는 구조의...”
“....”
“...이후로도 동네 장정을 죄다 불러모아 수색했지만, 결국 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항구까지 항해해 온 걸 보니 누군가가 타고 있었던 건 분명한데 말입니다. 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것처럼... 그렇다면...”
그때 빠져나온 건 뭐였을까?
“와아아아악!!!!!!!”
“깜작이야...!! 씨발 왜 짬찌가 선임을 놀래키고 그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뭐야 장난이었어?”
“아닙니다. 방금까지 말한 건 전부 사실입니다. 살면서 그렇게 끔찍한 건 처음 봤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이주해온 것도 선착장에 홀로 있으면 매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만도 하네... 나 완전 소름 돋았어. 여기 닭살 보여?”
“그러게... 얘기만 들어도 오싹하다. ...그나저나 후번초 근무자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교대 시간도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아, 호랑이 수인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누가 걸어오는데 말입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뛰... 어? 혼잔데...?”
“나머지는 화장실에라도 갔나 보지. 자, 슬슬 철수 준비... 끄허허헉!!!”
“제, 제길...!! 갑자기 뭐, 뭐... 개, 개미...? 커허헉!!!!!”
“사, 사람 살려...! 끄아아아악!!!!”
......
......
......
“수고했다.”
크샤아아앗...!
*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붉은 파문을 자아냈다. 나는 칼날에 눌어붙은 혈흔을 대충 문질러 닦아냈다.
바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기다리자 유독 나를 잘 따르는 개미 한 마리가 기사의 수급을 들고 다가왔다.
가벼이 턱짓하자 녀석은 환희로 몸을 부르르 떨고는 톱니로 투구를 으스러뜨리고 안에서 흘러나온 덩어리를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스물넷.”
지금까지 해치운 위병의 수.
순찰을 도는 녀석들은 대강 처리했다. 외각부터 차근차근 제거하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덕분에 인근 경비는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몰살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른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발소리가 여럿 겹쳤다.
유난히 내 뒤에 바짝 붙어 쫓아오는 한 개미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안내해.”
크샷!!
녀석은 빙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더니 통로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엉킨 실타래처럼 불규칙한 석굴을 거침없이 전진하는 개미 병사.
벽에 걸린 횃불을 하나하나 꺼트리며 나아가자 녀석이 발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야?”
크샥!!
“그래, 수고했어. 이제 나머지는 들어가 봐. 때가 되면 다시 부를 테니까.”
키킥!!
크샤앗...
얌전히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개미 군체를 지나쳐 서서히 발을 내디뎠다. 놈들이 일러준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나아가자 쪽문을 사이에 두고 선 두 기사가 보였다.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나가자 그들이 창을 겨누어왔다.
“정지 정지!! 손들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오면 즉시 적으로 간주하겠다!!”
“이 시설은 일개 교인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당장 소속과 신원을 밝혀!! 델타!!!”
“오 초 이내로 암구호에 답하지 않을 시 즉각 사살하겠다!! 델타!!!”
“.....”
나는 가면 안쪽으로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그래 나야 나. 고든 님이 보내서 왔어.”
“음...? 뭐, 고든 님의 심부름이라면...”
“야, 저번에도 누가 그런 식으로 제단에 접근해서 단체로 얼차려 받은 거 기억 안 나?! 아무리 상급자 명령이라도 절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아 맞다...! 시불, 그때 다리에 배긴 알이 아직도... 어? 어?! 네, 네놈 뒤에 그 시꺼먼 건 뭐냐?!!”
“젠장...! 즉시 비상벨을...!!”
“늦었어.”
콰과과과과과!!!!!
도약했다.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시커먼 외날 단검이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기사의 창대를 고작 미세한 저항감으로 절단했고, 그대로 밀어넣어 갑주를 꿰뚫었다.
“크윽...!”
사내가 필사적으로 내 어깨를 뿌리쳤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도 기민하게 대처해온다. 부러진 단창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묵직한 건틀릿을 가공할 속도로 내질러왔으나
서걱!
칼질 한 번에 두 팔이 송두리째 잘려나갔다.
단도로 무방비한 심장을 관통하자 사내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말단은 겨우 이 정도인가.”
스물 다섯.
“제길...!!”
나머지 기사가 퍼뜩 아밍소드를 뽑아들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투구 속 눈동자에 신묘한 이채가 깃들자 날카롭게 연마된 칼날에 희미한 전운이 감돈다. 나약해 빠진 인류를 막강한 몬스터와 대적할 수 있게 만들어준 힘.
하지만 그뿐이다.
“크읏?!!!!”
맹공(??).
발바닥으로 발등을 즈려밟고 어깨를 떠밀었다. 오른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며 단도를 내두른다. 복부를 옅게 그어 마력의 흐름을 훼방하고, 강습했다.
변변찮은 방어구 하나 없는 지금 상태로 일격을 허용했다간 어디 하나 떨어져 나갈 터.
그렇다면 틈을 주지 않고 더럽게 싸우면 되는 것 아닌가.
“젠장...!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
뒤꿈치로 발을 걸었다. 죽은 기사의 부러진 창날을 각반 이음매 사이에 찔러넣었다. 어깨를 움켜쥐고 연거푸 허벅지를 난도질한다. 기사가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리고자 했지만, 복부에 돌려차기를 때려박아 벽에 처박았다.
일전에 광장에서 합을 겨루었던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실전 경험이 모자라다고?’
천만에.
“잘 가라.”
“끄르륵...!! 끄흐르그...”
기사의 입을 틀어막고 연거푸 칼날로 복부를 헤집자 서서히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마지막으로 깊게 검날을 쑤셔넣어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시꺼먼 개미가 축 늘어진 기사의 사체를 중갑째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크샥!!
“.....”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피 웅덩이에 반쯤 잠긴 물체가 보였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작은 종. 놈들이 죽기 직전에 울리고자 했던 희망의 불씨.
콰직!!!
짓밟혀 찌그러진 금속 파편 위로 고개를 든다. 빗물에 번져가는 기름처럼 서서히 핏물이 흘러가는 방향에는 나무로 된 쪽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보초를 두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장소.
나는 이곳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고 있다.
‘지하 감옥...’
낡아서 경첩에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인 널빤지를 젖히자 끝없이 아래로 뻗은 계단이 나타났다.
“조금만 기다려.”
곧 구하러 갈게.
나는 암흑 속으로 발길을 향했다.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아래로...
이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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