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악몽의 재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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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악몽의 재림 #2
크샤아앗..!!
“그래, 나도 들었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자리에 멈춰섰다.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감지한 까닭. 이 얇은 피막이 서릿바람에 메아리치는 듯한 소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벽에 삐딱하게 기댄 채 기다리자 소음이 점점 짙어졌다.
“비행형 마물인가. 한 놈은 맡긴다.”
크샥!!
개미가 자신 있게 집게를 끄덕였다. 자세를 낮추고 더듬이를 추켜세우더니 톱니를 사각거리며 전투에 대비한다. 나도 팔짱을 풀고 단도를 거머쥐었다.
곧이어 차가운 횃불의 조명 너머로 큼지막한 박쥐들이 날아와 머리 위를 맴돌았다.
‘스몰 배트라...’
야외였다면 조금 성가셨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야트막한 층계 한복판. 놈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강하해왔지만 충분한 속력이 붙지 않았고, 이는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당한 표적이었다.
높게 치켜든 외날검에 납빛 형체가 차례차례 꿰뚫렸다.
찌이이이익!!!
끼이익...!!
치덕!
칼날에 꿰인 박쥐를 떨쳐냈다. 부들거리는 덩어리를 잡아당기자 질척한 창자가 쭈욱 늘어진다. 놈들의 날개는 학대라도 당한 듯 상처투성이였고, 발목에는 익숙한 푸른 링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강제로 고리를 잡아뜯어 품 안의 발찌와 대조해보았다.
“...같은 룬 문자.”
이로써 확실해졌다.
피범벅이 된 링을 내던졌다. 발찌가 튕긴 곳에는 한쪽 다리가 송두리째 뽑힌 박쥐가 비틀비틀 도망치고 있었다.
뿌쟉!!
몸통을 짓밟자 토마토처럼 터져나간 내장이 질펀하게 늘어졌다.
검붉은 살점으로 점철된 층계를 나아가자 머잖아 개미가 헐레벌떡 뒤따라왔다.
“앞으로도 마물이 나오면 알려줘. 마음껏 먹게 해줄 테니까. ...인간도 마찬가지고.”
키이이이익!!!
녀석은 격하게 고개를 흔들고는 쫄래쫄래 앞서나갔다. 이전보다 확연히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뒤꽁무니를 쫓아 전진하다 보니 발찌를 찬 박쥐의 습격이 수차례 이어졌다.
좁은 지형을 이용해 손쉽게 해치우며 내려가자 어느덧 기나긴 층계가 끝나고 육중한 철문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닥 고민하지 않고 검을 내리그었다.
까앙!!
“호오...”
예상과 달리 철문은 매서운 불똥과 함께 단도를 튕겨냈다. 방망이로 강속구를 빗맞혔을 때처럼 저릿한 감촉이 도신을 타고 올라왔고, 차갑고 어두운 지하가 불꽃으로 찰나 화해졌다.
“....”
검끝을 내리고 문틈 사이를 엿보자 희미한 광채가 비쳤다. 아마 마력 전도율이 높은 금속에 마석을 박아넣어 강도를 높인 거겠지.
“야, 너 이것도 먹어치울 수 있겠어?”
크샷!!
개미는 의기양양하게 집게를 세우며 다가가더니...
캬캭!!
“.....”
.....
“...됐으니까 물러나 있어. 다른 방법이 있겠지.”
크샤아앗...
아무래도 단도에서 파생된 능력이라 그런지 일부 특성을 공유하는 모양. 이 녀석도 마력에 취약한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혹시 칼이 성장할수록 녀석도 강해질까?
“맞는 열쇠가 필요한 모양인데...”
철문의 중간 부근에는 네모난 모양의 홈이 나 있다. 내부 요철에 부합하는 막대를 끼워넣기만 하면 되는 원시적인 형태의 잠금장치. 파훼하기 어려운 구조도 아니어서 철사 두어 개면 간단히 해체할 수 있지만, 지금 내겐 변변찮은 막대기 하나 없다는 게 문제다.
‘잠깐... 막대기?’
키킥...?
순간 개미를, 정확히는 그 위에서 움찔하는 더듬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도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룩...! 여기서... 크루룩.. 이상한... 소리가...
그릭..! 나도.. 들었닭... 그리릭..!
두꺼운 철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발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고는 있지만, 중간중간 묻어나오는 기묘한 억양과 성대를 부자연스럽게 긁어대는 듯한 음성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으나 두 평 남짓 층계참 밑바닥엔 숨을 공간 따위 존재하지 않았고, 찰팍거리는 물소리만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좁은 열쇠 구멍을 헤집는 나무 막대의 소음이 들려온다.
육중한 쇳덩어리가 서서히 움직이자...
크르르룩... 뭐야... 쿠룩... 아무도.. 없닭...!
그러게... 그리릭... 하지만 분명히...
“열쇠 고맙다.”
콰아아앙!!!!
즉살(?).
시뻘건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뿜어나온 피안개가 녹진하게 공기를 적셨다. 나는 문 뒤의 사각에서 걸어나오며 상대의 목을 절삭했고, 한 놈이 문턱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철판을 걷어찼다.
문틈에 끼인 두개골은 그것만으로도 놀라우리만치 손쉽게 깨져버렸다.
‘지하 감옥을 지키는 간수인가.’
철퍽...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을 살해하고 발치를 물들여가는 핏빛 수면 위에서 머리통을 끄집어올렸지만, 나는 도중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안면은 인간의 이목구비 대신 개구리와 어류를 합쳐놓은 듯한 외형을 띠고 있었으니까.
순간 마물인가 싶어 몸뚱이를 확인했으나 손가락에 난 물갈퀴를 제외하면 목 아래로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인 중에도 이런 놈들이 있었나?”
아니.
이들은 수인보다 마수에 가깝다.
지금껏 수도 없이 마물을 사냥해온 내 감이 말했다. ‘이건’ 절대로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적어도 조물주가 존재했더라면 이런 생명체를 창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려나간 절단면에서 배어나오는 끈적끈적한 점액질과 노랗게 끔벅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극렬한 불쾌감이 들끓었다.
어느덧 동태 눈깔처럼 총기를 잃고 흐리멍덩해진 머리통을 발치에 내던졌다.
“...너 해산물도 먹냐?”
아니, 개구리는 민물고기라고 해야 하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개미는 게걸스럽게 살덩이를 먹어치웠다. 보통 개미는 후각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지독한 비린내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 아니, 녀석에게는 이 또한 최고급 참치 회처럼 별미로 느껴질려나.
“아, 잠깐.”
녀석이 몸통을 다 집어삼키기 전에 손목을 베어내자 감방 열쇠와 핏기없는 손가락이 주렁주렁 딸려 올라왔다.
구부정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서 떨쳐낸 뒤 찐득한 점액질을 대충 문질러 닦아냈다.
“먼저 들어갈 테니까 알아서 쫓아와.”
키.. 키엑..!!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느라 여념이 없는 개미를 지나쳐 철문을 잡아당기자 머리 없는 시체가 축 늘어졌다. 주검을 넘어서 수면에 반쯤 가라앉은 방풍 랜턴을 주워들자 심지가 어렴풋한 광채를 드리워 자작하게 깔린 지하수와 일자로 뻗은 통로를 비추었다.
“지하 감옥이라... 듣던 대로 열악한 곳이네.”
귀퉁이에 금이 간 가면을 벗어던지자 탁한 물기둥이 차박 튀어올랐다. 바닥에는 익사한 쥐 사체가 둥둥 떠다닌다. 복도 어귀에 자리한 물곬은 찐득한 오폐물과 하루살이 유충이 들끓었고, 해조류처럼 뭉친 인간의 머리칼로 틀어막혀 전혀 배수가 되질 않았다.
지하에 고인 오싹한 한기가 체온을 앗아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좌우로 나립한 쇠창살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굵직한 쇳덩이 너머에서 퀴퀴한 죽음의 향기가 뻗어왔다. 감옥 안쪽에는 일찍이 부패한 주검으로 가득했다. 중간중간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양서류 알과 쇠사슬에 묶여 임종을 맞이한 고인은 아포칼립스 이후 세계를 연상케 했다.
“...고약하군.”
유골의 갈빗대에서 태동하는 정체불명의 녹색 생명체를 목도하니 아무리 나라도 속이 거북했다. 이런 장소에 오래 머물렀다간 틀림없이 머리가 이상해지거나 그 전에 질병에 걸려 죽을 터.
원래라면 신중하게 탐색할 예정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씨익.
검면으로 쇠창살을 긁으며 전진하자 요란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전원 기상!!!”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강!!!!!!!!!!
뭐, 뭐야...!! 쿠룩...!
침입자... 침입자닭...! 키룩..
침입자.. 를... 처단하라... 그르르룩....!!
그루루루룩!!!
의도했던 대로 사방에서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나는 헐레벌떡 단창을 걸머쥐고 나타난 간수들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이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다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
쿠룩...! 이, 인간...!! 뻔뻔하닭!!!
침입자... 저지한.. 닭!! 키룩!!
죽여... 라...!!
“그치, 구차하게 통성명할 필요는 없지?”
단도로 창살을 난폭하게 끊어내고 돌진했다. 수면을 미끄러져 쇄도하는 단창을 빗겨내고 날카로운 도신으로 뱃가죽을 헤집었다.
기다란 검날이 복부를 들쑤시자 상대는 담낭이라도 터졌는지 황녹색 체액을 내뿜으며 허물어졌고, 나는 잇따라 뒤엣 놈을 걷어차 자빠뜨렸다.
그 위에 올라타 보란 듯이 검신을 찔러넣자 간수들이 위압감에 밀려 주춤거렸다.
쿠륵...!! 이, 이 인간이... 웃는닭..!!
주, 죽여야 한닭!! 나쁜 놈이닭!!
나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창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곧추세웠다.
본디 동실력이라는 가정 하에 검을 든 병사와 창병이 겨루면 창 쪽이 훨씬 우세하다. 하물며 이렇게 비좁은 통로에서는 피할 공간도 없다. 긴 사정거리 탓에 쉬이 접근할 수도 없고, 마땅한 보호구도 없는 현 상황에서는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상이다.
게다가 나는 단검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입꼬리를 비틀며 검을 중단으로 들어올렸다. 날끝을 적에게 향하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파지했다.
날휨 없는 직도.
칠흑의 몸체가 기울어졌다. 과거보다 한층 심오해진 광채는 등불을 반사해 막 용광로에서 꺼낸 날붙이를 보는 듯하다. 공기조차 베어낼 듯 예리한 검날은 물을 머금는 스펀지처럼 점차 존재감을 더해갔다.
검신이 옅게 떨리며 기이한 시동음을 일궈냈다.
키이이잉...
자, 잠깐... 이상한 소리가... 케르륵..
공기가... 떨린닭!!
빠, 빨리 해치워랅!!
놈들이 내 단도에 서린 변화를 알아채고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장소에서는...”
개미보다 더 좋은 게 있지.
콰르르르르르르륵!!!!!!!!!!!!!
찰나, 단도에 맞춰 공명해오던 존재들이 암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인간의 몸통 두께를 웃도는 덩굴. 그 시꺼먼 줄기들이 경로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뻗어나갔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이, 이건 뭐냙!!!
괴물이닭!!!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닭!!!
도, 도망... 쿠르륵...!!
검은 머리... 악마닭...!! 플루토 님의 화신이 나타낡닭!!!
“....”
악마라...
왜 다들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간다.”
콰드드득...!
퍼져나가는 음영을 딛고 엄습했다. 솟구치는 줄기를 밟으며 전진했다. 반인반수의 간수들, 그 부정한 존재를 말살하고자 질주했다.
나는 발에 기운을 두르며 뛰쳐나갔고, 적 한복판에 나타나 일섬했다.
콰지지지지직!!!!!!
쿠르르륵?!!
이어서 회전. 넝쿨에 파묻혀버린 한 몸체를 절단했다. 상하가 토막 난 간수가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주위가 공포에 질린다. 나는 한 놈의 다리를 자르고 멱을 꿰뚫었다. 허물어지는 신체를 밟고 비약해 직도를 투척한다.
두 간수의 머리통을 한꺼번에 관통하자 검날을 되돌리고는 손가락으로 회전하며 내달렸다.
키리리릭!!! 이, 이게... 뭐다냙!! 쿠르그..!!
크샤아아악!!!
어느새 나타난 개미가 간수의 뒷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놈이 창을 내질러왔으나 나는 창대를 붙잡고 절단했다. 손아귀에 든 날붙이를 던져 진로를 틀어막고, 덩굴을 조종해 배후에서 접근해오는 육체를 관통했다.
느긋하게 거리를 벌리고 주먹을 움켜쥐자 그림자가 잠시 팽창을 멈추더니, 일제히 한 점으로 쇄도하며 감옥을 산산조각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
로브를 잡아당겨 머리를 덮자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천천히 팔을 내리니 커다란 크레이터로 빨려들어가는 수류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십여 명의 간수가 보였다.
“...이거 실내에선 조금 자중해야겠네.”
자칫하다간 지하가 통째로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다. 지금껏 내가 터득한 기술 중 가장 파괴력 높은 일격.
뼈마디에 사무치는 묵직한 피로감을 자각하며 뺨에 튄 핏자국을 훔치자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안디라...라고 했던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신전에라도 찾아가 볼까.
단도를 어둠 속으로 되돌리고 발을 뗀 순간
“거, 거기 누구 없소...? 방금 큰 소란이 났는데...”
“....”
누군가가 감옥 안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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