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악몽의 재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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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악몽의 재림 #3
“거, 거기 누구 없소...? 방금 큰 소란이 났는데...”
“....”
어디선가 힘없는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미와 잠시 마주 본 뒤 음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하자 자그마한 감방이 나왔다.
등불을 내세우며 철창 안쪽을 들여다보자...
“으, 으윽... 제발...! 아... 사, 사람이야!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
옥방에 주저앉아 있던 중년이 화색하며 일어났다. 나이는 한 마흔쯤 되었을까. 후덕하게 늘어진 살집으로 보아 최근에 급격한 체중 감소를 겪은 듯하다.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엔 꼬질꼬질한 땟국물이 가득해 도무지 봐줄 만한 몰꼴이 아니다.
남자가 휘청거리며 다가와 수척한 손으로 창살을 붙들었다.
“제, 제발 좀 구해주시오 나으리!! 일주일째 아무것도 못 먹... 거, 검은 머리...?!”
“마침 잘 됐다.”
“으극!!”
그는 내 머리칼을 보고 다소 놀란 눈치였지만, 철창 사이로 불쑥 손이 들어와 턱을 움켜쥐자 내색을 할 새도 없이 뒤뚱뒤뚱 물러났다.
목 언저리에 흑도를 들이댄 채 간수에게서 강탈한 열쇠로 감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의 눈동자에 은근한 기대와 두려움,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네게 물을 게 있다.”
“암요 암요!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전적으로 협조할 테니 제발 목숨만...”
“한 명은 사낭 쥐 수인. 다른 사람은 은발에 벽안. 둘 다 여성이다. 본 적 있나?”
“으음...”
남자가 희번덕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
목을 옅게 베어 독촉하자 그가 황급히 내뱉었다.
“히익...! 보, 본적 없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이 안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갇혀있었는데 그런 사람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예, 예!!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여긴 통로가 하나뿐이니 제가 못 봤을 리 없습니다! 새,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간수들이 소란을 피워대니 만에 하나 놓쳤을 리도 없고요!!”
중년이 눈물을 글썽글썽 흘리며 애원했다. 빠르게 내 얼굴과 단검을 왕복하는 눈동자는 이 상황을 벗어날 궁리로 필사적이다.
아마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터, 이 지하 감옥에 조금이라도 더 갇혀있었다간 우글거리는 모기떼와 물파리에게 자근자근 좀먹혀 죽고 말 거다. 이미 아슬아슬한 상황일지도 모르지.
남자가 탁한 숨을 들이쉬더니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나으리... 뭐든 할 테니 목숨..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집에서 절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
“예, 예 예...! 그러니 제발 자비를...!”
“알았다.”
검을 거두고 철창 밖으로 향하자 중년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감방문을 세차게 닫고 쩔그덕거리는 열쇠 뭉치로 좌물쇠를 잠그자 허겁지겁 달려와 창살을 붙들었다.
“이,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절 구해주시려던 게...!”
“내가 왜.”
“으, 으윽...”
남자가 눈물을 삼키며 오열했다. 빼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개미를 지나쳐 멀어지려는 찰나, 조급하게 내뱉어진 말 한마디가 우뚝 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두, 두 분이 어디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
차박 차박. 고요한 복도에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가 말없이 노려보자 중년이 시선을 피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쇠창살을 모조리 깨부숴 멱살을 움켜쥐고는 벽에 몰아세웠다.
“너, 무슨 뜻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거냐?”
“켁...! 케흡!! 저, 정말입... 커헉...!”
“당장 불어.”
“이, 일단..! 허흑...!! 이, 이걸 놓아..주... 시면..”
“....”
나는 대답 대신 오른손으로 천천히 허공을 움켜쥐었다. 다섯 손가락이 접히자 사신의 입김처럼 어두운 기운이 훅 밀도를 높혀와 남자의 주위에 원형 공백을 여럿 생성했다.
이공간 안에서는 군침을 질질 흘리는 개미 떼 수십 마리가 톱니를 찔꺽거리며 중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입장 차이를 깨달았겠지.
손아귀를 느슨하게 풀어주자 혼절 직전의 눈동자에 이성이 되돌아오더니 붓물 터진 듯 남자가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커허허헉!!! 이, 이교도가 모여있는 광장이 있습니다!! 그 구석에 제물로 쓸 포로들을 가둬두는 막사가 있는데 제가 위치를 알고 있...!!”
“넌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지.”
“제가 놈들에게 예속구를 제공했거든요...! 하, 하지만 상대가 이교도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예속구? 이거 말하는 거야?”
품에서 마석 발찌를 꺼내 들자 중년이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저는 베라스틴 서쪽 구획에서 노예 거래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고위 기사가 방문해 소인족용 구속구를 납품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큰 의심 없이 넘겨줬는데, 최근에야 제 상품이 불법으로 몬스터를 사육하는 데 쓰였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관청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더니 되레 저를 이곳에 가뒀습니다...!!”
“잘하는 짓이다.”
털썩.
“크흐흐흡...”
등등했던 살기를 지우자 중년이 목을 부여잡으며 고름 섞인 호흡을 내쉬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반파된 철창 너머로 발을 옮겼지만, 등 뒤로 조심조심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위압감을 실어 쏘아보자 중년이 바짝 움츠러들며 간청했다.
“제, 제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제발 도,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절대 귀찮게 구는 일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있겠습니다...!”
“방해된다 꺼져.”
“부, 부디...”
남자가 필사적으로 구정물에 머리를 처박으며 조아렸다. 제법 계산이 빠른 중년이다. 무력하게 죽어가느니 미약한 희망이나마 붙잡아 보는 거겠지. 이 기회를 놓치면 꼼짝없이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이교도에게 사로잡혀 가마솥 안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니.
극심한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숨을 고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과 동행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뭐지?”
“광장에 도착하면 포로들이 붙잡혀 있는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무려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전력에 도움이...”
“필요 없어. 혼자서도 충분해.”
“이, 이곳에서 나가면 저희 매장에서 노예를 무료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나으리가 원하는 모든 취향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합니다! 다부진 전투용 수인부터 지식 노예, 그리고 성노예까지... 만약 희망하신다면 값비싼 엘프까지도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부디 그러게 해 주십시오!!!”
“.....”
노예라.
언뜻 들으면 상당히 불건전한 울림이지만, 이 세계에서 노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아무래도 백성들의 식량 절반 이상을 농산물에 의지하는 만큼 농업의 중요성이 상당하고, 농사일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니까.
일반 가정에서도 조금 유복하거나 방앗간 등 특수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한두 명쯤 노예를 부릴 정도며, 생각만큼 대우가 나쁘지만도 않다. 범죄 노예가 아닐 경우엔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한 푼 두 푼 모은 재물로 자유를 사는 것도 가능하니까.
충절과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해방된 노예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심지어는 노예로만 이루어진 모험가 파티도 존재한다는 듯하다.
귀족의 흔한 취미쯤 되는 모양이라지.
내 침묵에서 한 줄기 희망을 봤는지, 남자가 서둘러 아첨해왔다.
“이건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제 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입니다만... 나으리가 저희 매장에 방문해주신다면 저로서도 매우 영광입니다! 나리처럼 잘생기신 분이라면 섬기고자 하는 여노예가 줄을 설 테니까요! 오히려 제가 비용을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초빙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노예 사기 진작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나도 한때 노예 신분이었던 시절이 있지만, 멀쩡한 인간을 잡아다 범죄자로 둔갑해 매각하는 노예 사냥꾼이라면 몰라도 단순히 노예를 취급하는 상인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나름 상품이랍시고 유용한 충고를 하거나 그럭저럭 사람다운 대우는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확인하고 가야 할 게 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물었다.
“...네가 다루는 상품 중에 불법 노예도 있나?”
“부, 불법... 혹시 납치해서 끌고 온 노예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남자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 매장에서 그런 노예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리가 누군가를 강제로 귀속시키고 싶으신 거라면...”
“그거면 됐어. 합격이다.”
발길을 돌렸다.
강력한 전투 노예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전력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겐 라디가 있으니까.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심지어 아리엘이라고 하더라도 파티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남자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며 반파된 철창 사이로 기어나오더니 처참한 복도를 마주하고 소스라지게 놀라며 읊조렸다.
“이, 이게 무슨...! 전부 나으리가 하신 겁니까...?”
“....”
나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비할 시간 없다. 서둘러 생존자가 있는지 탐색하고 여길 뜬다. ...너도 그 사람은 그냥 냅둬.”
키이익...!
“끄아아악!! 이, 이 녀석은 또 뭐야!!!”
“....”
살금살금 벽을 타고 남자의 목 뒤에서 접근하던 개미가 아쉬운 듯 쩝쩝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녀석은 더듬이를 까딱거리고는 다른 먹잇감이 있나 옥방을 기웃거렸다.
“으으... 당최... 나리의 정체가 뭡니까...?”
“궁금한가?”
“아, 아닙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제가 앞장서서 안내하도록 하죠!”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내키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간수의 손아귀에서 낑낑거리며 단창을 빼내 들고 내 눈치를 살피며 전진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 이곳에 있는 적들은 모두 처리했으니까.”
“하, 하기야... 그렇게 큰 소란이 났으니... 저...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모험가 등급만 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나리처럼 강한 사람이면 분명 하이랭커...”
“F랭크.”
“....비밀이란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
어깨를 으쓱이곤 비좁은 감옥 내부를 나아갔다.
희미한 등불에 의존해 옥내를 샅샅이 둘러봤지나 이곳에서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지막 감방까지 확인하고 감옥을 나서려는 차, 남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철창 안에는 물방개와 게아재비에게 잔뜩 파먹힌 시체 한 구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는 사람인가?”
“네... 저희 가게... 직원.. 이었는데... 저를 감싸려다...”
“....”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물러서.”
“네...?”
콰지지직!!!
검날로 철창을 잘라내자 그가 흠칫 놀라며 날 쳐다봤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 그에게 턱짓하자 중년은 단창을 바닥에 내던지며 달려나가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너무 가까이했다간 병이 옮을 거야.”
“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남자가 시체의 두 눈을 감겨주려 했으나 눈꺼풀이 파먹혀 불가능했다.
숨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기에 하는 수 없이 로브 밑단을 잘라내 안면에 덮어주었다.
남자가 멍한 눈길로 올려다봤다.
“...가자. 시간이 없다.”
“아, 알겠습니다... 당신.. 좋은 사람이었군요...”
“....”
그는 조금 달라진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감옥 바깥으로 향하는 내 등을 허겁지겁 쫓으며 물어왔다.
“그럼 이제 나리께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동료를 구할 거다.”
“그, 그럼 제가 그 천막 위치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지인분을 구출하시면 바로 이곳을 탈출하실 겁니까...?”
“아니.”
그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건 내 목표가 아니다.
내 목표는 시체 구덩이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전부 죽일 거야. 이번 일에 연루된 모든 인간. 이교도. 기사. 기사단장. 전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만약 낌새를 보였다간...”
변색된 피가 묻어 검게 변한 손가락이 중년을 향했다.
“너도 예외는 아니야.”
남자가 숨을 들이켰다.
그는 부패와 부식의 악취 속에서 선연한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공포라는 탁류가 얄팍한 감정의 댐을 깨부숴 이성을 앗아가는 것을 보았다.
극한으로 차갑게 응축한 격노에 습한 공기가 얼어붙는 걸 느낀다.
하지만 이는 비단 심상에 국한되지 않았으니,
수면 아래 움츠린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태동했고
눈앞의 흑발 사내의 발치로 모여들며 한 형상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이교도의 벽화에서 목격했던 악마와 조금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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