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악몽의 재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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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악몽의 재림 #4
“나, 나으리...! 뭔가 옵니다!!”
“알고 있다. 물러서.”
“히이익...!”
중년 남성이 허둥지둥 내 뒤로 붙었다. 그의 말대로 층계 너머로부터 희미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흑도를 늘어뜨리며 느릿하게 앞서나갔고, 어둠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박쥐 다섯 마리를 시야에 담았다.
“귀찮게...”
파사삭!!
손안의 단도를 신속하게 내두르자 놈들은 날개가 양단되어 추락했다.
발치에 떨어진 푸른 링을 주워들었다.
“이 구속구를 제공한 게 너란 말이지?”
“아... 예, 예!! 하지만 전 정말로 놈들이 이교도인 줄...!”
“그건 됐고. 무슨 마물이 있는 줄 아나?”
그는 열심히 기억을 헤집더니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면... 코볼트랑 놀, 스몰 배트, 그리고 포이즌 프로그 정도일까요...? 저도 간수한테 주워들은 게 다라서...”
“대단한 몬스터는 없군.”
“네... 제가 기사에게 납품한 예속구는 전부 효과가 미미한 싸구려들이라서요... 마물한테는 효과가 없고 수정구로 대략적인 위치를 특정하는 게 고작입니다. 아...! 무, 물론 나리께 드릴 상품은 전부 최고급으로...!”
“필요 없어.”
검에 들러붙은 체액을 닦아내며 전진했다. 횃불이 깜박이며 어둑한 조명을 드리우자 다소 생소한 모습이 비쳐보였다. 중년 노예 상인과 이교도의 의복을 입은 흑발 청년, 그 뒤를 졸졸 쫓아오는 먹보 개미의 조합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겠지.
지하 감옥으로 뻗었던 계단을 벗어나 구불구불한 석길을 따라 걷던 도중 전방으로부터 세찬 돌풍이 불어왔다.
“...곧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나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나리님이 굉장한 실력자라는 건 잘 알지만 그곳에는...”
“기사가 기다리고 있어. 나도 알아.”
저번에는 크게 데였지.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를 거다.
남자가 인도하는 방향대로 나아가자 점차 통로가 밝아졌다. 모퉁이를 돌자 벌겋게 불타오르는 화로가 나타났고, 벽에 뚫린 커다란 환기 구멍으로 왁자한 소음과 너른 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하지만 선객이 있었던 모양인지.
두 기사가 나란히 검을 뽑아 겨누었다.
“너희는 뭐냐. 이곳은 접근 금지 구역일 텐데.”
“복장은 우리 일원이 맞는데... 왜 가면을 안 쓰고 다니지? 게다가 뒤엣 놈은 아무리 봐도 우리 교원이 아니군.”
“으윽... 여기서 중급 기사를 마주칠 줄이야...! 저, 저번엔 분명 없었는데... 나리만 믿겠습니다..!!”
중년이 버둥거리며 황급히 바위 뒤로 피신한 반면,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숙였던 고개를 들며
“중급 기사라... 마침 잘됐네. 물어볼 게 좀 있어.”
“수상한 자와는 말을 섞지 않는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왔다간 즉시 처형하겠다.”
“일단 너희 둘을 구속하도록 하지. 순순히 체포에 응하면 거칠게 다루지는 않겠다고 약속하마.”
“.....”
거만한 어조. 기사 특유의 허영과 자만심이 묻어나오는 말투.
보아하니 견장이 좀 더 화려한 오른쪽이 중급 기사인가.
왼쪽에 있던 하급 기사가 포승줄을 꺼내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다가왔다.
“할 말이 있으면 사제장님게...”
“늦었어.”
“뭐라... 윽?!”
콰드득!!!!
일순간. 화로의 불길이 닿지 않는 천장에서 시꺼먼 형체가 떨어져내렸다. 사슴뿔처럼 독특한 톱니를 지닌 개미.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녀석이 소리 없이 하급 기사의 후방을 급습했고, 갑주를 철판째로 우그러뜨리며 집요하게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이, 이건 또 뭐야?!!!”
“네, 네 이놈!! 감히 우릴...!”
“시끄러워.”
즉각 심장을 꿰뚫었다. 썩은 통나무처럼 무너지는 시체를 떨쳐내고 보법을 밟아 나머지 기사의 배후로 쇄도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반사적으로 휘둘러온 칼날을 회피한 뒤 단도의 기운으로 가속하며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벽에 처박힌 기사의 아킬레스건을 검날로 내려찍고는, 입을 틀어막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시끄럽다고 했잖아.”
“읍!!! 으급?!!!”
기기기긱!!!
바닥까지 파묻힌 칼자루를 천천히 돌리자 강철 각반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팔에 힘을 실었고, 곧 거칠게 놈의 발목을 찢어발기며 목 아래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틀어막은 손을 떼고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게 좀 많아서 말이야... 혹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크헉...! 이, 이 빌어먹을 괴물!! 너 같은 새끼는 지옥에나 떨...!!”
“아직 기운이 넘치나 보네.”
철커덩!!!
“끄아아아악!!!!!”
이번엔 반대편 허벅지를 잘라내자 철퍼덕 피가 한 바가지 튀었다. 나는 얼굴 가득 묻은 선혈을 소매로 훔쳐내고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투구 속 핏발 선 안구가 총기를 잃어갔기에 복부를 연거푸 칼날로 헤집었다.
“그렇게 쉽게는 안 보내줘. 이제 내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됐나?”
“크, 크윽... 차라리 죽여!!”
“그래, 그건 걱정 말고... 한 명은 사낭 쥐 수인. 다른 한 명은 아가사 신전 사제. 얼마 전 이곳에 잠입하다가 걸렸을 거야. 아는 거 있어?”
“크흐흐흑...!”
검지로 칼자루 끝을 살살 문지르며 묻자 기사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마, 말할 것 같나...? 너 같은 새끼한테는...”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야, 너 이리 와봐. 밥값 좀 하자.”
크샷...?
개미가 하급 기사의 머리통을 툭 내뱉으며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어. 죽으면 안 되니까 내장은 건드리지 말고. 일단 이 다리부터.”
“너, 너 너...!! 대체 뭘...?!!”
“그러게 얌전히 대답하지 그랬어.”
“미, 미안하다...! 일단 아는 대로 대답할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남자가 다급히 외쳤다. 아무리 훈련받은 기사라고 할지라도 정체불명의 마물에게 신체가 잘근잘근 씹어먹히는 상황은 상정하지 못했겠지.
갈색 머리칼 사이로 비친 눈동자가 본능에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런 그를 외면하고 일어섰다.
“시작해.”
“끄아아아악!!!!!!!”
등 뒤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일상처럼 태연히 옷에 묻은 혈흔을 털어내고 구멍 너머로 광장을 내려다보자 노예 상인이 쭈뼛쭈뼛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
“왜.”
“그... 나리님은 악한에겐 정말 자비가 없으시군요... 그런데 저대로 놔둬도 괜찮겠습니까...? 소란을 듣고 다른 기사들이 몰려오는 건...”
“괜찮아.”
“네...?”
“이 주변 기사들은 지하 감옥까지 오면서 진작 다 처리했거든.”
“그, 그런...”
아연실색하는 그를 뒤로하고 광장을 유심히 살폈다.
한눈에 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넓은 광장은 의식을 준비하는 이교도로 분주했다. 얼마 전 큰 폭발이 발발했던 제단은 눈을 씻고 살펴봐도 파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간간이 맥박치는 검붉고 흉악한 기운으로 보아 의식이 끝마무리 단계에 다다랐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삼엄해진 경비를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네가 안내한다고 했던 장소는 어디지?”
“...저깁니다. 바로 저 푸른 천막이 포로를 수용하는 막사입니다. 저처럼 지하 감옥에 가두거나 즉결 처형하는 게 아닌 한 대부분 저곳에 감금한 뒤 제물로 바칩니다. ...이전에 고위 사제한테 직접 들은 거니 틀림없을 겁니다.”
“그래, 알았다.”
광장에서 시선을 떼고 일어났다. 행동하기에 앞서 추가 정보를 캐내고자 기사에게 다가가던 찰나, 나는 어느새 비명이 멎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혈흔이 낭자한 구석에는 사지가 유실된 채 싸늘하게 굳어버린 기사와 뜯겨나간 손가락, 선연한 손톱자국, 그리고 개미가 난처하게 더듬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놈을 내려다보며 추궁했다.
“내가 죽이지 말랬지.”
킥..! 크샤앗..!! 캭!!
“...뭐라는 거야.”
열심히 더듬이를 흔들며 몸짓하는 개미를 무시하고 단도로 기사의 턱을 들추자 하얀 거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맹독인가...’
어렴풋이 견과류 비슷한 냄새가 풍겨왔다. 보아하니 이빨 사이에 끼워둔 소형 독병을 깨트려 자결한 모양. 제법 치밀한 놈이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기습으로 쉽게 해치운 감은 있어도 중급 기사는 다르다는 건가.
키샥...
“괜찮아, 잘했어.”
물고 싶은 내용이 있긴 했지만, 그건 이제부터 직접 알아가도 충분하다.
나는 주눅이 든 개미의 머리를 쓸어주며 중년에게 고했다.
“넌 이제 가 봐.”
“네...?”
“볼일 끝났으니 가도 된다고.”
“아...”
그가 잠시 당황하더니 내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저는 이곳에서 끝까지 나으리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나리님이 없으면 지하를 벗어나기도 전에 언데드한테 죽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악신이 강림하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저는 나리님과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하자. 가까이 와.”
“에, 예...! 기꺼이!!”
중년이 허겁지겁 달려와 자세를 낮췄다.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자 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할 수 있겠어?”
“암요! 암요!! 그 정도라면 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게.”
“알겠습니다. 그럼 나리님은 이제... 가실 겁니까...?”
“그래. 더 끌어도 곤란하니까.”
“...무운을 빌겠습니다. 꼭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대답 대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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