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2화 (192/375)

〈 192화 〉 악몽의 재림 #5

* * *

[192] 악몽의 재림 #5

광장의 어느 한구석.

이교도 복장을 입은 한 사내가 끝내 짜증을 터트렸다.

“제기랄! 이게 뭐야!!”

­타각!!

그가 손안에 든 배급판과 식기를 내던지자 멀건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 제이콥... 뭐가 또 불만인데...”

“불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보리, 보리, 보리...! 대체 며칠째 보리죽이야!! 맛이나 있으면 뭐라고 안 해! 이렇게 밍밍한 건 우리 집 개도 안 처먹어!!”

“이, 일단 목소리 낮춰...! 사제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라고 해!! 그 사람들도 좀 알아야 해! 우리가 얼마나 갖은 고생을 치르면서 이곳에 와 있는데! ...안 되겠다, 가서 직접 따져야겠어!!”

“차, 참아...! 얼마 안 남았잖아..”

“....염병!!”

사내는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찬 뒤 씩씩거리며 바위에 주저앉았다.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각양각색의 인파가 보였다.

며칠째 연이은 부실한 식단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들을 예의주시하는 기사 집단, 부산스러운 소동에도 꼼짝 않는 고위 사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죽을 퍼먹는 동료까지.

이젠 전부 지긋지긋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제길...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제이콥은 석 달 전 일을 떠올렸다.

봉사랍시고 어여쁜 두 여사제가 집에 방문해 쌀가마니를 나누어줬던 때를.

물론 곧이곧대로 신뢰할 그가 아니었다. 제이콥은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자라며 여러 사람을 접했고, 대가 없는 호의가 무섭다는 걸 일찍이 깨우쳤으니까.

하지만 곧 주위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사람이 속출하고 이웃까지 미담이 퍼지면서 자연스레 그의 경계심도 허물어져 갔다.

한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녀들이 사라졌다.

모두가 아쉬워했다. 마침 곧 겨울을 앞둬 보리 한 줌이 귀한 시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솔선수범해 선의를 베풀어오는 사람을 싫어할 리 없으니까. 어쩌면 그 반반한 얼굴에 혹했던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그러던 중 그녀들을 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이콥과 주민은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소문의 장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여사제와 재회할 수 있었다. 다만 신전의 형편이 어려워져 이제부턴 같은 교인만 원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될 줄 몰랐다.

한 번, 두 번...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창고에 쌀가마니가 쌓여갔지만, 봄기운에 녹는 살얼음처럼 그들을 향한 경각심은 급격하게 옅어져만 갔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들이 나눠주는 물자보단 교리에 집중했고, 다소 엄격한 교율에도 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여사제가 거액을 벌 기회가 있다고 귀뜸해왔다.

바로 이 빌어먹을 의식 말이다.

“제길... 이번 일이 끝나면 당장 이곳을 떠야겠어. 다시는 사교 따위와 엮이나 봐라...! 처음엔 괜찮나 싶더니 이제 우리는 완전히 뒷전이야!! 이럴 거면 왜 우리를 이곳에 불러모아서... 뭐야...?”

“.....”

반응이 없어 옆을 돌아보자 동료는 숟가락을 뜨다 말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그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어... 왜 제이콥...”

“아니... 너 내 말 듣긴 한 거야? 위에 뭐 있어?”

제이콥은 동료의 시선을 쫓아 멀리 떨어진 천장을 살펴봤지만 그곳에는 밤하늘처럼 시꺼먼 어둠만이 가득할 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이런 지하에 뭔가 있을 리도 없으니.

동료가 어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방금 뭔가 꿈틀거린 것 같았는데... 커다랗고 기다란 무언가가...”

“잘못 본 거겠지. 지하에 한 달을 넘게 틀어박혀 있으니 머리가 이상해질 만도 해. ...안 되겠다. 나도 바람 좀 쐬고 올게.”

“....”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보리죽을 씹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음침한 새끼...’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제이콥은 식사 때문에 잠시 벗어뒀던 가면을 착용하고는 광장 구석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는 균일한 모양과 색을 띤 다용도 천막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었다.

보통 제사 물자를 저장해두거나 기사들의 군용 물품을 보관하는 막사지만, 제이콥은 이 천막이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의 근무처에서 가까운 장소라는 점에 더불어 사람의 발길이 뜸한 덕에 무언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며칠 전 보급 물자에서 빼돌린 훈제 육포를 떼어먹기 위해 은닉처로 향하던 중, 제이콥은 우두커니 서 있던 한 사내와 어깨가 부딪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남자는 표정을 구기는 일 없이 싱긋 웃으며 넘어진 제이콥을 부축해주었다. 의장대의 기수병처럼 커다란 장신의 사내. 후드 아래 드러난 입가로 미루어보건대 상당한 미남임이 분명하다. 로브 아래로 슬쩍 내비친 근육은 북쪽 거리의 귀부인들도 군침을 흘릴 정도로 탄탄해 보였다.

혹시 남창인가?

제이콥이 옷매무새를 추스리며 말했다.

“...이런 실수했군요.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맞닥뜨릴 줄은 몰라서... 가면을 안 쓰고 계신 걸 보니 그쪽도 식사 중이셨나 봐요?”

“네, 급하게 온 터라... 실수로 두고 와버렸네요.”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라다가 고위 사제한테 들키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요! 업무에 복귀하기 전에 다시 찾아오는 게 좋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내가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서둘렀으면 옷에 피가 흥건하다. 아마 해체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겠지. 로브 자락 끄트머리에 날카롭게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틀림없다.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옷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피 냄새가 좀 나죠?”

“아 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죠. 힘드시겠어요. 듣자 하니 해체 작업장에서 일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매일 제단에 바칠 산 제물도 준비해야 하고...”

“산 제물이라... 뭐 그렇다고도 볼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좀만 참아요. 이제 의식도 끝마무리에 다다랐다는 모양이니까. 우리 같이 한몫 두둑이 챙겨서 나가야죠. 지금까지 살면서 금화를 만져 본 적이 없었는데...”

“금화라...”

그가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자칫 동성마저도 홀릴 법한 웃음. 이야기로만 듣던 인큐버스가 실존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내 마누라가 봤다면 단박에 반해버렸겠군.’

제이콥은 속으로 눈앞의 사내를 남창으로 확신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해체 작업장은 이곳에서 꽤 떨어져 있을 텐데...”

“아, 저 파란 막사에 잠시 용건이 있어서요.”

“어...? 마침 잘됐네요! 제 담당 처부도 저곳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면서 얘기할까요?”

“감사합니다 제이콥 씨. 그럼 자리를 옮기죠.”

어...?

내가 이름을 밝혔던가..?

제이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내와 함께 포로 수용소가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광장 외각을 거닐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법 말이 잘 통했다. 대부분 제이콥이 서두를 꺼내면 사내가 맞받아치는 구조였지만.

“...그래서 이제 보수를 받으면 농사일은 때려치우고 어디 바닷가에서 낚시나 하며 사려고요. 그쪽은 뭐 정해놓은 목표가 있습니까?”

“아뇨. 전 딱히 없습니다.”

“그럼 빌헴 마을은 어때요? 거기가 좀 깡촌이긴 하지만 주민들이 친절하다던데.”

“빌헴 마을이라... 좋죠. 이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제 애인이 그 마을 출신이거든요.”

“아, 벌써 도착했네요.”

어느새 푸른 막사 앞까지 도달했지만 제이콥은 원인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이곳에서 봐온 사람 중 유일한 정상인을 만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마주했던 교인은 어딘가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 있거나 사회성이 결핍되어 있었으니.

아마 폐쇄된 지하에서 오래 머물렀던 탓이리라.

제이콥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이것도 인연인데 잠시 절 따라오겠습니까?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혹시 사유를 여쭐 수 있을까요?”

“아, 별건 아니고 수중에 육포가 좀 있거든요. 그쪽만 괜찮다면 같이 들면서 이야기나 나눌까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며칠째 날고기로만 배를 채워서... 마침 저도 그쪽에게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날고기...?’

텐트 가장자리, 단단하게 고정된 지주핀을 넘어서 구석으로 향했다. 제이콥이 육포를 숨겨둔 장소. 점점 더 깊이, 광장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으슥한 벽지로.

제이콥은 자그마한 바위를 들춰내고 구멍 안에서 천에 덮인 육포와 싸구려 벌꿀주를 꺼내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얼마 안 없어서 아껴 먹던 건데 내 특별히 선심 쓰는 거예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떡하죠?”

“에이 그쪽만 조용히 넘어가 주면 괜찮아요. 여긴 사람들이 절대로 안 오는 곳이거든요.”

“정말요? 아무도 안 온다고 확신해요?”

“물론이죠! 제가 근무지를 배속받고 매일같이 이곳을 드나들었...”

“잘됐군.”

제이콥이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후드를 젖히자 시커먼 흑발이 드러났기에.

눈앞의 남성은 그 머리색만큼이나 불길한 눈동자로 제이콥을 지긋이 응시해왔다.

“다, 당신 대체 뭐야...! 그 단검은 뭐고!! 다, 다가오지 마!!”

“....”

“오, 오지 말라고 했어!! 부, 분명히 말했다!!! 죽고 싶어?!!”

“....”

남자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더니 팔을 뻗으면 닿을 간극 앞에서 멈춰섰다.

이내 나즈막한 음성이 울려퍼진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광장에 있는 모두 곧 죽을 테니까. 너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갈 뿐이고.”

“제, 제길...! 당장 안 꺼지면 목을 베어버리겠어!!!”

“어떻게?”

“그, 그야 이 나이프로... 어...?”

제이콥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의 허리띠에는 부자연스럽게 잘려나간 가죽끈만이 존재할 뿐, 호신용 단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물어뜯기기라도 한 것처럼.

­타다다다다닥!!!

“뭐, 뭐야?!!”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발치를 스쳐지나갔다.

경로를 쫓아 고개를 들자 어느새 사내의 손으로 넘어간 육포 주머니가 보였다.

그의 발치에서 사냥개처럼 주인에게 아첨을 부리는 개미 한 마리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망연히 서 있던 찰나, 남자가 육포를 한 입 베어물며 고했다.

“시작해.”

“다, 당신은 대체... 으아아악!!! 이, 이건 뭐야?!!!”

­크샤아아앗!!!

­키킥! 캬캭!!

­까드드드득...!

순간, 폐타이어 수십 개를 한 번에 태우기라도 한 양 새까만 연기가 제이콥의 시야를 뒤덮더니 검은 공혈이 여럿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흉흉한 안광을 번뜩거리는 개미 떼거리가...

“다, 당장 빼내줘!!! 같은 교원끼리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지 지금 멈추면 장난으로 쳐줄게!!!”

제이콥이 팔다리에 들러붙는 개미를 필사적으로 발길질하며 외쳤지만, 검은 머리 사내는 그 참경에서 유유히 등을 돌렸다.

이내 물밀듯 몰려드는 검은 장벽 너머에서 하얀 주머니를 들어올리며­

“육포, 고마워.”

소름돋게도 웃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