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3화 (193/375)

〈 193화 〉 악몽의 재림 #6

* * *

[193] 악몽의 재림 #6

“수고했다.”

가볍게 내뱉어진 말 한마디.

단순히 노고를 치하할 뿐인 말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림자들이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 개미가 무리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키이이이...

“그래.”

나는 녀석의 집게 끄트머리에 매달린 열쇠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짤랑거리는 열쇠 뭉치를 품 안에 넣고 막사 사이를 걷다 보니 얼마 안 가 좀 전에도 들렀던 푸른 천막이 나왔다.

가림천으로 막아둔 입구에 다가가니 방수포에 가려진 사각으로부터 투박한 투핸디드 소드를 장비한 기사 두 명이 나타나 앞길을 막아섰다.

“멈춰라. 이곳은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장소다.”

“못 보던 놈인데... 왜 가면을 안 쓰고 있지?”

“....”

말없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왔다. 비켜.”

“비켜? 말이 짧군. 언제부터 네놈 교인들이 우리에게 말을 놓을 수 있게 되었지.”

“심심하던 차에 잘됐네.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망 좀 봐줘.”

“내 몫도 남겨놔. 이렇게 건방진 새끼들은 제대로 한번 쥐어터져봐야 제 분수를 깨닫는단 말이지.”

한 녀석이 뚜두둑 손뼈를 풀며 다가왔다. 투구 아래로는 가학스러운 미소가 스며나왔으며, 경박한 걸음걸이에선 사람을 헤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란 원래 이런 놈들이니까.

놈이 무방비하게 팔을 뻗어왔기에 팔꿈치를 송두리째 절단했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네, 네놈...! 갑자기 무슨?!”

망을 보던 기사가 달려들었지만 나는 이미 그의 지척으로 파고든 상태. 칼날이 칼집에서 채 모습을 전부 드러내기도 전에 단도로 목을 관통했다.

잘려나간 왼팔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기사 또한 후방에서 심장을 꿰뚫어 마무리했다.

“싱겁군...”

아무리 적이라고는 해도 사람이다. 이전의 나였다면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아니다.

나약함 따위 빈 가슴에 묻은 지 오래.

치명적인 맹독을 마시고 난 직후처럼 어렴풋한 갈증만이 느껴질 뿐 메말라 버린 감정샘에선 아무런 울림도 전해지지 않았다.

단지 이곳에 라디와 아리엘이 있을지, 없다면 또 어떡해야 할지 그것만이 걱정될 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개미에게 시체 처리를 맡긴 뒤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곧장 끔찍한 악취에 웃옷으로 입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군.”

철창. 철창. 철창.

어두운 실내에 익숙해지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빽빽하게 늘어선 강철 케이스였다. 24인 군용 텐트를 여럿 이어붙여 만든 양 거대한 규모의 천막 내부엔 짐승의 우리가 이중 삼중으로 쌓여있었다.

다만 그 용도는 가축 따위를 기르기 위함이 아니다.

“.....”

발치에 놓인 덧신을 신고 막사를 거닐었다. 수용소 바닥엔 흘러넘친 오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꺼운 실밥 사이로 새어들어온 희뿌연 조명은 시꺼먼 철창을 비추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일궈냈다.

우리 안쪽에는 검갈색 덩어리들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으며, 간혹가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것들도 심심찮게 엿보였다.

하지만 나를 경악케 한 건 따로 있었다.

막사 내부를 한 바퀴 빙 돌고 난 뒤 나는 망연자실하게 칼날을 늘어뜨렸다.

“어째서...”

없다.

막사 내 모든 철창을 살펴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라디와 아리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서글픈 상실의 자취와 비탄만이 존재할 뿐. 이곳에서 그녀들을 조우할 수 있을 거라 낙관했던 내 기대를 아득히 벗어나는 상황이다.

이곳에마저 없으면 라디와 아리엘은 이미...

어두컴컴한 생각이 가슴속으로 치미는 찰나,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살 안쪽을 들여다봤지만 바라던 사람은 아니었다. 얇은 천 쪼가리 하나만 달랑 걸친 여인. 금발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릿결은 잔뜩 떡지고 엉켜 있었고, 비쩍 마른 팔다리는 잦은 고문의 영향으로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더니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그 요청을 일축하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물을 게 있다. 혹시 이곳에서 사낭 쥐 수인과 백발의 여성을 본 적이 있나.”

“.....”

“그렇다면 포로들의 명단을 적어둔 장부는...”

“....”

혼탁한 눈동자가 내 옆구리로 향했다.

나는 등 뒤 책상에 놓인 양피지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잔잔하게 읊조렸다.

“그래, 알았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

여인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나는 품 안에서 꺼낸 열쇠로 철창을 열어젖혔다. 그녀의 요구대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고, 곧 아련한 속삭임을 전해들으며 눈을 감았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고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가요.”

“....”

여인이 내게 어렴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단도로 그녀의 급소를 꿰뚫어 고통으로부터 해방해주었다.

편히 눈을 감는 여인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가림천 너머에서 나타난 개미가 그녀를 먹어치우려 들기에 검을 내려 가로막았다.

­키샥...?

“놔둬.”

­...크샥!

“.....”

역시 이런 역할은 싫다.

입안에 담긴 씁쓸함을 칼날에 묻은 피와 함께 떨쳐내고는 테이블 위의 양피지를 주워들었다.

누리끼리한 양피에는 희생자들의 자세한 신상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반센 32남 인간

동쪽 성문 외각 농경지에서 일하는 농부.

남동지구 농민 밀집 지역 내 목조 가택 거주.

늙은 노부를 보필 중이며 자식 여덟 명 보유.

일과 후 늦은 밤에 귀가하던 중 납치.

고문으로 오른쪽 눈이 뽑혀나감.

건강 상태 보통.

사망 확인.

아나톨리아 29여 인간

베라스틴 서쪽 거리 재단사.

남서지구 오버트 광장 인근 회색 건물 2층 기거.

독신, 네비스 마을에 친척 거주.

공방에서 작업하던 중 납치.

금발, 왼쪽 가슴 위 점이 있음.

건강 상태 취약.

* 조기에 병사할 수 있으므로 자주 상태를 확인할 것.

위베르 24남 늑대 수인

메다올리눔 마을 출신 모험가.

동쪽지구 인근 길드 밀집 지역 벌꿀 여인숙 체류.

가족관계 불분명.

지하수로 내 유인 후 납치.

등에 큰 흉터가 있음.

건강 상태 매우 양호.

*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으므로 관리에 유의할 것.

사망 확인.

“...젠장.”

수북한 양피지를 넘겨나갔다. 페이지를 가득 메운 명단 중에는 취소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손이 닿은 자리에는 혈흔으로 된 지문으로 가득하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여기에도 없어...”

여전히 명부 그 어디에서도 라디와 아리엘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는 것. 몇 번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가명을 썼을 경우를 고려해 모든 내용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비슷한 인상착의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녀들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제물로 바쳐진 건 아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것 또한 아니고, 이교도들에게 처형당하지도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시체 구덩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테니.

적어도 죽음을 확인한 건 아니라는 안도감과 당혹감, 점차 묘연해지는 둘의 행방에 머리가 아득해져 오는 찰나­

­────!!!!!

별안간 외부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다급히 천막 밖으로 뛰쳐나온 내가 목격한 건, 두꺼운 암반을 뚫고 광장 곳곳에서 솟구치는 붉은 빛기둥이었다.

“...젠장할.”

거칠게 단도를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제단에서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단박에 알아챌 정도의 전조.

저 힘의 주인이 강림하면 이 대륙은 파멸한다.

“예정과는 조금 틀어졌지만...”

최종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개미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그가 이상을 눈치챈 건 다음번 석식을 조리하기 위해 막 창고로 들어섰을 때였다.

“어.. 젠장... 톰슨...! 너 당장 튀어와 봐!!”

“또 왜... 밥 짓는 건 번갈아 가면서 하기로 했잖아.”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봐봐! 텅 비었어!!”

“뭐가 비었다는 거야... 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취사장 부식 창고에서 두 남성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래 보리가마니가 그득하게 쌓여있어야 할 선반에는 어째선지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선반마저 깔끔하게 사라졌다. 마치 메뚜기 떼에게 죄다 갉아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무슨... 점심을 준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잖아?!”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누군가가 우릴 골탕 먹이려고 장난질한 건가...?”

“하지만 어떻게...? 취사 창고에 사람이 들어왔으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한두 명으론 어림도 없었을 테고...”

“그러게... 시발 우리 좆된 거 같은데 어떡하지? 기사들이 이걸 보고도 가만 놔둘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한 달 내내 밥 짓고 설거지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일단 당장 다음 끼니부터 해결하고 보자. 저번에 남는 보리 가마솥에 넣어뒀던 거 아직 있지?”

“그건... 우리가 몰래 먹으려고 숨겨뒀던 거잖아...!”

“야 지금 코가 석 잔데 그런 거 따질 때냐? 빨리 준비나 해! 제때 식사를 준비하지 못하면 놈들이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른다고!!”

“에이씨...”

사내가 홧김에 돌부리를 걷어찼다. 재빨리 앞치마를 동여매고 취사장으로 달려가 먼지 쌓인 방수포를 들추자 여분 가마솥이 나왔다. 배식용으로 나온 보리를 빼돌린 장소.

조급한 심정으로 무쇠 뚜껑을 연 순간­

“끄아아아아아악!!!!”

“토, 톰슨...! 대체 무슨 일... 커허어어억!!!”

......

......

­....크샥!

*

뭔가 잘못되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씨발... 미쳤어!! 이 새끼들은 전부 미쳤다고...!”

“이교도가 다 그렇지. 네가 이해해.”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이 광경을 보고도!?”

“뭐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기만을 기도해야지.”

“젠장... 젠장... 젠장...”

이자들은 전부 미쳤다. 어딘가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찧은 게 틀림없다. 어쩌면 악신을 강림시킨다며 사제들이 외우던 주문이 뇌에 악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어떻게 저런 걸 보고도... 기뻐할 수 있는 거야...?”

치솟는 빛기둥.

의식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표이자 초읽기. 교인들은 이 광경을 보며 환호했다. 얼마나 멍청한 작자들인가! 정녕 저 빛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 믿는 건가!

“...우린 속았어. 전부 죽을 거야. 이 광장에 있는 모두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잖아? 끝이 마냥 좋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래도 이건... 끔찍해.”

이제야 사제들의 의도를 깨달았다.

우린 전부 희생양이었다는 걸.

양피지를 얻기 위해 가차 없이 도살되는 양처럼 우리는 악신을 이 땅에 강림시키기 위한 주춧돌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해도 놈이 이곳에 부활하면 제일 먼저 할 일로 우리를 잡아먹겠지.

어쩌면 척추를 반으로 접어버릴지도 모른다. 혹은 즙을 짜내 코코 주스처럼 들이킬 수도 있고.

그 어디에도 우리가 살아나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둘러 소지품과 횃불을 챙기자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게?”

“...이곳을 벗어날 거야. 어디든지 최대한 먼 곳으로.”

“할 수 있겠어? 기사들이 출구를 막고 있을 텐데.”

“시도는 해 봐야지. 거새된 수퇘지처럼 얌전히 도축되기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부딪히다 죽을래. 어쩌면 기사들도 우리랑 같은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럼 같이 가.”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푸화악!!!!

“아...?”

찰나ㅡ

눈앞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굵은 핏방울이 흩날렸다. 뺨에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전하지 못한 친우의 마지막 말이 허공에 맴돌았다.

한발 늦은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을 맴돌고, 한결 가벼워진 몸통이 슬로우모션처럼 쓰러졌다.

마치 생명 없는 인형처럼.

“티, 티미엘...? 대, 대체 무슨 일이... 아....”

­.....

통증. 잇따라 부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시야 속 마지막으로 목도한 건­

진딧물이 들끓은 식물처럼 무수하게 꿈틀거리는 암반의 모습이었다.

*

“...의식이 끝마무리에 다다랐습니다.”

“나도 눈과 귀가 있거늘...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몸의 휴식을 방해한 겐가?”

“죄, 죄송합니다.”

“플루토 신님께 감사하게나. 금일 자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오롯이 그분의 강림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니. ...순찰은 순조롭게 되고 있겠지?”

“저... 그게...”

“설마 또!!”

­쨍그랑!!!

티 테이블에 앉아있던 노인이 찻잔을 내던지자 기사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노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탁자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또 또...!! 내 얼굴에 먹칠할 셈인가?!! 내가 그렇게 경고했거늘!! 전번에 저질렀던 과오를 벌써 잊은 겐가?!!”

“소, 송구합니다... 고든 님..”

“...그래, 어디 변명이라도 들어보지. 그 띨띨한 머리로도 그 정도는 가능할 테니. 최대한 간결하게. 당장!!”

“수, 순찰을 보낸 인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즉시 추가 수색대를 편성했지만 그 인원조차도... 하, 하지만 이번엔 중급 기사들로 구성해서...”

“당연히 처음부터 그리했어야지!! 그 목 위에 달린 건 장식인가?!! 내 지금 당장 네놈을 제물로...!”

“주,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예, 옙..!!!”

고든은 부리나케 막사에서 달려나가는 사내를 한심스럽게 응시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호화스러운 개인 막사엔 깨진 찻주전자로부터 차 흐르는 소리만 골골 들려올 뿐.

“...그 청년에게 일을 맡겼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천막 구석에 쌓아둔 그자의 바스타드 소드, 살라만더 가죽 갑옷, 금속 보호구와 정체불명의 붉은 구슬을 보자 미련이 남았다. 며칠 전 제단 근처에서 마주쳤던 청년. 그 녀석이었다면 필시 내 뒤를 잇고도 남을 텐데.

그자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마치 고위 악마가 현현한 것처럼 전신에서 칠흑의 사기를 뿜어내던 청년. 퍽 거친 삶을 살아왔겠지. 난 그자가 우리 일원이 아니라는 걸 첫눈에 알아채고도 묵인했었다.

설마 제단을 폭파할 줄은 몰랐지만.

“제길... 그런 괘씸한 짓만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 후계자로 임명했을 텐데...”

그놈이라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내 흑마법을 터득하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제단을 폭파한 전과가 있는데 살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에 기사단장 키론 경에게 당했으니 필시 죽었을 테지만.

‘속내를 알 수 없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고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사단장. 그는 이전부터 비밀리에 플루토 님의 부활을 획책하던 고든에게 접근해 대뜸 협조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왜 이번 일에 가담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야 그는 철저한 베그디아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 모두 거머쥔 불세출의 영웅 아닌가?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빼어날뿐더러 그가 선두에 나서서 격퇴한 적장의 머리만으로도 마차 두 수레를 채울 수 있을 거다.

그런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접근한 걸까? 애초에 내가 플루토 님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챈 것이고.

지근거리는 두통에 고든은 탁자 위에 올려둔 두통약과 냉수를 들이켰다. 답이 나오지 않을 고민을 반복하는 건 그답지 않다.

“에고... 늙으면 죽어야지..”

“그래?”

“크허헉?!!”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답변이 되돌아왔다.

동시에 길쭉한 무언가가 그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날휨이 없는 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불길한 신의 기운이 서린 칠흑의 도신.

울컥울컥 게워나오는 핏물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일전에 말벗을 요청했던 사내이자 시꺼먼 마물을 어깨에 태운 채 소파 등받이에 앉아 미소짓는 청년이 있었다.

이윽고 두 갈래로 등분되는 시야 속 그 남자가 이른 건ㅡ

“시작하지.”

곧 찾아올 파국의 서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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