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4화 (194/375)

〈 194화 〉 학살극 #1

* * *

[194] 학살극 #1

­펄럭!!

고위 사제를 상징하는 검은 막사를 젖히고 나왔다.

제단으로부터 발발한 기운은 곧 이 일대에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전에 모든 인간을 말살하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방안은 이미 마련해두었다.

“가자.”

­....스스슥.

식사를 마친 개미가 그림자 안에 숨었다. 나 또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땅에서 솟아오른 적색 빛기둥은 굴곡진 광장 바닥에 큼지막한 음영을 드리웠고, 이는 내가 활동하기에 최적인 환경이었다.

고든의 로브와 그의 개인실에서 되찾은 장비를 몸에 걸치고 발을 옮기자 잔뜩 기대에 부푼 이교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게 정말 되긴 되네... 나는 그냥 사제들이 지어낸 헛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금화를 받으면 뭐 할까... 일단 색시부터 구해볼까? 우히힛...”

“아서라, 그 낯짝으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어?”

“...왜 그래?”

“아니 방금 지나간 사제... 좀 이상하지 않았어...? 분명 그림자가 꿈틀대는 것만 같았는데... 잘못 본 거겠지?”

“.....”

나는 제단 인근 막사로 향했다. 적 중 제일 성가신 것. 그건 중무장을 한 기사도, 광장의 머릿수 대부분을 꿰찬 교인들도 아니다.

‘흑마법이라... 그건 좀 위험했지.’

사제들이 구사했던 마법. 폐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시야를 좀먹는 주술. 한때 내 전신을 주박했던 불가의의 힘이 아직도 피부에 선연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마법만큼은 피해야 한다. 만전의 상태로 전투에 임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제단 근처에 도달하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제들이 보였다.

나는 고든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그들 속으로 잠입해 대화를 엿들었다.

“...의식이 이제 다 끝나가는군요. 그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다 형제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타미르 추기경님.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의식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플루토님이 이곳에 강림하시고 나면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겠죠... 그분이 과거에도 그러했듯 부패한 현세의 신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새로운 정의를 세울 겁니다. 확실한 건, 우리는 그 순간 그분의 곁에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저 추기경님... 혹시 한 가지만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형제여. 어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 플루토 님은 악마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인간과는 대적하는 존재일 텐데... 괜찮을까요...?”

“해코지를 당할까 봐 두려운 건가요?”

“죄송합니다...!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습니다. 탐구심이야말로 인간의 본질 중 하나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플루토 님은 인간에게도 친화적인 분이라고 하니까요. 모든 악마가 야만인의 문화에 젖어 사는 건 아닙니다.”

“그런... 가요..?”

“그럼요. 아, 고든 추기경. 마침 시기적절하게 와주었군요. 이 파릇파릇한 신임 사제에게 조언이라도 한 마디...”

“열일곱.”

“열일곱? 무슨 뜻이신지.... 커허헉!!!”

“타, 타미르 추기경님?!! 다, 당신 대체 뭐... 끄아악!!!”

­.....

“열아홉.”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냈다.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금자수가 수놓아진 칠흑의 로브를 휘날리며 구덩이 안으로 녹아들자 흉흉하게 안광이 번뜩였다.

나는 곳곳에서 두런거리는 사제들을 시야에 담았고, 단도의 양식으로 삼았다. 악신의 강림이 머지않았음에 감사했다. 제단과 빛기둥에 한눈 팔린 이교도를 베는 건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수월했으니.

­키이잇...!!

차근차근 암살을 이어나가던 중, 내 그림자에서 머리를 내민 사슴뿔 개미가 안테나처럼 더듬이를 추켜세우며 모든 절차가 준비됐음을 알렸다.

사제의 숫자도 꽤 줄여놓은 바,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그래, 시작해.”

­크샤샤샤샤샤샤!!!!

개미가 환호성을 부르짖자 드넓은 광장이 어둠에 잠겨들었다.

“무, 무슨 일이야! 갑자기 불빛이...!!”

“누군가가 불을 꺼트렸다!! 범인을 찾아!!!”

“...그냥 당번이 화로에 석탄 넣는 걸 까먹은 거 아냐?”

“야 이 띨빡아!! 그렇다고 불이 한꺼번에 꺼지겠냐? 누가 일부러 엎은 거야!!”

“뭐... 그럼 다시 피우면 될 걸 뭘 그렇게까지...”

광장에는 피처럼 짙은 빛기둥의 불길한 광채만이 드리울 뿐, 순식간에 어두워진 시계에 놈들이 주춤거린 사이 내 계획은 실현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암벽 사이에서, 바위 아래서, 이교도의 발치에 늘어진 그림자 안에 매복했던 검은 병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키이이이이익!!!!!

­크샤아아앗!!!!!!

­캬캭...! 캬캬캬캭!!!

­크스스슷...!! 캬갹!! 캭!

녀석들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먹어치우자 광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뭐, 뭔가가 날 잡아끌고 있어...! 살려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인다!!”

“어, 어디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마물이다!! 언데드가 이곳까지 쳐들어왔다!!!”

“일단 신속하게 정비하고 진형을 갖춘다!! 기사들 전원 중앙으로 집결... 크헉?!”

““소대장님!!!””

찢어지는 비명.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검명음. 공포에 질린 먹잇감의 냄새.

아비규환(????).

“네 친구들도 제법인데?”

­키샥!!

어림잡아 백을 웃도는 규모. 붉은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간헐적으로 엿비치는 시꺼먼 음영은 가히 공포 자체다. 순식간에 처형장으로 변한 광장에선 자욱한 피안개가 만개해 시야를 물들였고, 처절한 단말마와 맞물려 지옥도를 형성했다.

나는 단 수 초 만에 도래한 참상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크샷샷샷샷샷!!

“.....”

­크샥?

“...아니다. 계속해.”

­키킥!!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궤도로 되돌렸다. 느긋하게 걸어나가며 우왕좌왕하는 사제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검을 되돌리며 뒤엣 놈을 참수했고, 유연하게 반원을 그려 세 명을 양단했다.

이교도들은 눈앞의 마물로부터 달아나는 데 급급할 뿐, 설마 내부에서 자근자근 죽어 나가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의심하지 못한 눈치다.

“사, 사제님..! 제발 저 좀 구해...”

­푸걱!!

한 사내가 로브 자락을 움켜쥐며 늘어졌기에 머리를 짓밟고 경추를 꿰뚫었다. 옆에 있던 이교도가 허겁지겁 달아났지만 개미에게 낚아채여 구덩이 안으로 끌려간다. 한 기사가 검을 내세워 돌격해왔으나 나는 놈의 손목을 비틀고 단도로 염통을 터트렸다.

망가진 심장으로부터 울컥울컥 뿜어나오는 선혈을 뒤집어쓰자 몇몇 놈이 눈치채고 덤벼들었지만­

‘허술하군...’

“처리해.”

­파사사사삭!!!!!

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호위병들이 삽시간에 붙들고 늘어지자 머잖아 잠잠해졌다.

“잘했어. 앞으로도 부탁한다.”

­크샤아아앗!!

수에는 수로 맞서는 법. 내가 아무런 대책도 준비해오지 않았을 리 없다.

놈들을 하나하나 정숙하게 살해하고 있자니 곧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외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생소한 마물이긴 해도 상대는 겨우 몬스터일 뿐이다! 침착하게 대처하면 물리칠 수 있다!!”

“의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플루토 님이 강림하실 때까지만 버텨!!”

“방패병!! 방패를 든 전사들이 선두에 나서서 공격을 막아라!!”

“....”

횃불을 높게 치들고 개미 군단과 맞서는 기사들. 들끓는 함성으로 전의를 고무하며 날붙이를 휘두르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과연 기사는 기사라는 말이 생각날 따름이다.

이쯤이면 적당하겠군.

­딱!

허공에 손가락을 울리자 돌연 전장에 적막이 내리깔렸다.

“창을 이용해라!!! 놈들이 파고들 거리를 내주지 말...! 어?”

“공격이... 멎었어?”

“대장님! 갑자기 마물이 보이질 않습니다! 전부 겁먹고 도망쳤나 봅니다!!”

“방심하지 마라!! 아까처럼 언제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몰라!! 대형을 유지해!!!”

“대형을 유지하라!!! 부상자를 중앙으로 모아!!!”

기사들이 긴장 가득한 얼굴로 사방에 횃불을 드리웠다.

나는 그들로부터 냉담히 등을 돌렸다.

‘...어디 열심히 찾아보라지.’

반쯤 부서진 창을 움켜쥐고 홱홱 주변을 둘러보는 이교도를 지나쳤다. 내장이 반쯤 파먹힌 참혹한 주검 역시 지나쳐 걸었다. 내가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광장 외곽.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이었으니.

곧 기사들이 밀집한 진형 한복판에서 거대한 화마(火?)가 작렬했다.

“끄아아아악!!! 폭발이다!!!”

“부, 불이야!! 다들 도망쳐!!!”

“어째서.. 갑자기...”

“다, 당장 천을 덮어 화재를 진화해라!!!”

“아, 안 됩니다!! 불길이 너무 거셉니다!! 다가갔다간 저희 모두 타죽습니다!!!”

“플루토 님이 노하셨다!!!”

“....”

나는 치솟는 불길을 보며 웃었다.

개미가 광장의 불을 끈 건 비단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적은 양으로도 고효율의 에너지를 발하는 소재. 놈들은 화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을 제 그림자 속으로 끌고 들어갔고, 광장 구석에서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적지 한복판에 나타나 취사장에서 공수한 기름과 석탄을 한데 던져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작전에서 제일 큰 변수는 개미들의 식탐을 억제하기 힘들었다는 것.

“수고했다.”

­키익...!

유달리 똑똑한 이 녀석이 무리를 조율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번 수단은 써먹기 어려웠겠지.

드높게 솟구치는 화염 기둥, 화산처럼 터져나가는 석탄 덩어리, 발치에서 자작하게 타오르는 잔해 위를 거닐자 불붙은 기사 한 명이 내게 달려왔다.

“사, 살려줘어!!! 부, 불이!!”

“잘 가라.”

­콰직!!!

복부를 관통하니 놈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나는 로브 앞섶에 기다란 손자국을 남기며 무너지는 시체를 떨쳐내고 계속 걸었다. 보금자리에 불이 난 산짐승처럼 뜨거운 열기를 피해 흩어지는 인파를 가로지르며 단도를 내지른다.

순식간에 구멍이 하나 늘은 사내들은 피범벅이 된 채 바닥을 구르며 비명으로 점철된 이 지하에 비참함을 더해갔다.

­스윽...

왼손으로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쓰자 올라간 입꼬리가 만져졌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큰 육체적 고통이 작열통이라고 했던가.

온몸에 화염이 옮겨붙은 채 허우적거리는 젊은 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갑주는 새우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주변 기사들은 팔을 뻗은 채 속수무책으로 그가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갑옷 내부로부터 새어나오는 끔찍한 비명은 마치 팔라리스의 황소를 재현해 놓은 듯하다.

나는 형장의 처형인처럼 혼란 속에 녹아들어 적의 요직을 하나하나 단죄해나갔다.

하지만 불길이 사그라듦에 따라 놈들도 차차 냉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염병... 마법병들은 대체 뭣들 하는 거야...!!”

“대장님...! 수속성 마석을 찾았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끄아아아아악!!!!”

“야 이 머저리들아! 불붙은 기름에 물을 끼얹으면 더 크게 번지는 거 몰라?!! 토속성 마법으로 땅을 덮어!! 당장!!!”

“네, 넷!! 다들 들었지!! 토속성 마법이다!!!”

“비옥한 대지여... 지금 이곳에...”

완드를 든 기사들이 대규모 술식을 준비했다. 그들이 주문을 읊자 지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됐고, 두꺼운 흙벽이 솟아올라 끓어오르는 기름을 뒤덮었다.

기다렸다는 듯 잇따라 고성이 울려퍼졌다.

“대장님!! 이 마물들, 마력이 약점입니다!!!”

“좋았어!!! 방패병이 앞으로 나서서 틀어막아!! 없으면 시체에서 주워서라도 써!!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으랴아아앗!!! 이 듀크 님이 나가신다!!!!”

“저, 저 머저리..!! 당장 듀크 소대장을 구해라!!!”

“잠깐!!! 저, 저놈은 뭐냐!!! 왜 고위 사제가 우리 기사를 죽이고 있어?!!!”

“저놈이 수상하다!!! 당장 포위해!!!”

“....”

기사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고 사방을 에워쌌다. 번뜩이는 칼날을 들이밀며 다가오는 은빛 장벽. 내 발치에 그득한 시체를 본 탓인지 걸음에 신중함이 그득하다.

슬슬 때가 된 건가.

나는 칼날에 꾀인 덩어리를 떨구며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툭 내던졌다. 정체가 들켰으니 더 이상 변장은 필요 없다.

천천히 로브를 젖히자 피에 젖은 흑발이 세간에 드러났다.

내가 준비한 두 번째 각본.

“대, 대장님...! 저, 저놈 웃는데요..?”

“무서워서 실성했나 보지!! 당장 저 새끼를 죽여!!!”

“죽어라아앗!!!!”

“....”

나는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기사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계획이 제대로 적중했음에 만족하며­

“내려와.”

천장에 들러붙어 있던 희미한 기척.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