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5화 (195/375)

〈 195화 〉 학살극 #2

* * *

[195] 학살극 #2

나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 그 사실은 극심한 차이를 만든다.

막 체육관에 입문한 아마추어가 프로 복서를 이길 수 없듯이, 마나 사용자와 일반인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 심지어 아리엘조차 신체를 강화하면 잠시나마 성인 남성을 웃도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니.

하지만 나는 그걸 다른 방법으로 극복해냈다.

“내려와.”

가벼운 한 마디. 하지만 그 단어가 초래할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앞의 기사들은 내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내 한 병사의 외침을 기점으로 공기가 반전되었다.

“아, 암벽에 뭐가 있다!!!!”

“뭐야 저건! 우, 움직여...?!”

“뭔가 큰 게 온다!! 다들 대피해!!!”

“어... 젠장...”

­....

재액(災?).

재앙을 형상화한다면 딱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기다란 형체가 암벽을 타고 내려왔다. 검은 외피는 화염을 반사해 붉게 반들거린다. 무수한 체절에서 튀어나온 다리는 대왕고래의 굵은 체모를 연상케 했다.

녀석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면에 도달해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무자비하게 기사들을 휩쓸었다.

­콰르르르르르!!!!!

“끄아아아악!!! 이건 또 뭐야!!”

“사람 살려!!!”

“데, 데스웜이다...! 왜 이런 곳에 데스웜이...!!”

“아냐 조금 틀려!! 저건...!”

“서, 설마...!”

“““지네다!!!”””

“....”

노래기 인마.

혼비백산이 나 달아나는 사내들의 등판에 검을 꽂아넣었다. 창날을 늘어뜨린 채 전의를 상실한 병사의 멱을 꿰뚫었다.

간신히 대형을 맞췄던 기사들은 노래기가 등장하자 와해되었다.

이전에 골목길에서 소환했을 때의 녀석은 내 키를 조금 넘는 크기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버스 네댓 대와 맞먹는 덩치로 성장해 정숙하게 꿈틀거리며 적들을 쓸어담았다.

단도의 성장으로 소환할 수 있는 개미의 수가 늘어난 반면 노래기는 단일 개체의 몸집이 커진 모양.

이내 그 몸뚱이가 크게 한 번 꿀렁이니 시꺼먼 기체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정체불명의 가스를 들이킨 병사들은 목을 부여잡고 뒹굴며 괴로워했다.

“끄윽...! 수, 숨이 안 쉬어.. 져..!!”

“커흐흑...! 허억...!!”

“으으... 살려... 줘..”

한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간절히 손을 뻗어왔다. 나는 강철이 덧대진 부츠로 그의 머리통을 짓밟아 깨부쉈다. 질척이는 뇌수가 뺨에 튀었고, 불쾌한 감촉이 밑창을 타고 전해진다.

바스러진 두개골 더미에서 발을 들자 개미들이 톱니를 사각거리며 내 명령을 기다렸다.

­키익?

“그래, 이제 마음껏 날뛰어.”

­캬캬캬캭!!!

승낙이 떨어지자 개미 떼거리가 공격 일변도로 전환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녀석들은 자욱한 독무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물 만난 날치 떼처럼 기사의 배후에서 튀어나와 공격하곤 다시 숨는 전술을 반복했다.

끝없는 식탐만 아니라면 단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천부적인 사냥꾼들. 심지어 치명상을 입어도 어둠만 있으면 언제든지 수복할 수 있다.

전세는 이미 크게 기울어진 상황. 다만ㅡ

“크윽?!!!”

돌연 으스러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해왔다.

지면이 다가왔다. 시야가 일그러진다. 격통이 세상의 소리와 채도를 앗아가 윙윙거리는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시체의 흉갑 위에 덮인 재를 손바닥으로 닦아내자 그곳엔 다소 생소한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이게... 뭐야..”

어둠.

왼쪽 눈동자 한구석에 짙은 어둠이 서려 있었다. 검게 일렁이는, 심연 너머에서 끔벅이는 안구처럼 극도로 불길한 기척.

‘젠장...’

나는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즉각 알아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옥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에 휩싸인 듯한 모습이 지금껏 줄곧 봐왔던 개미, 노래기, 그림자 소녀와 닮아 있었으니까.

이게 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면 언젠가 나도 그렇게 변하고 마는 걸까.

‘...왜 악신 취급을 받는가 했는데... 완전 또라이였잖아.’

이 단검은 편리한 물건 따위가 아니었다. 단순히 신의 능력을 빌려 행사하는 게 아니었다.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이는 나를 그와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어둠이 내 몸을 완전히 잠식하는 날엔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질척한 공포가 에덴의 뱀처럼 등골을 타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이자들을 처단하고 라디와 아리엘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지금은 악신의 저주든 뭐든 마음껏 이용당해주겠다.

나는 날카로운 검날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고, 손잡이를 굳세게 움켜쥐며 적진 한복판으로 도약했다.

­콰드드득!!!!

무릎으로 명치를 차올렸다. 기민하게 축을 뒤틀어 각반으로 찍어눌렀다. 단검으로 허리를 도려내고, 몸통으로 들이받아 한 점을 돌파했다.

­슈화아아악!!!

연격(?). 시냇물처럼 막힘 없이 동작을 연결해 검을 휘둘렀다. 갑주를 맹신하며 달려드는 기사의 복부를 철판째 절단했다. 단도를 투척해 그 너머 적을 꿰뚫었다. 수중에서 무기가 사라지자 한 이교도가 덤벼들었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삽시간에 돌아온 칼자루로 손목을 끊었다.

“....”

­철컥!

이제 이 전투 방식에도 익숙해졌다.

질주. 전장을 활보한다. 기사의 다리를 베었다. 칼날을 되돌려 승모근을 휘감는다. 반동을 살려 몸을 뒤틀었고, 기세에 저항하지 않고 회전하며 발꿈치를 차올렸다.

내게 복직근을 걷어차인 기사는 주춤주춤 떠밀리다 빛기둥에 파묻혀 타들어갔고, 나는 그를 지나치며 한 사제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내 로브를 붙잡고 늘어진 시체에 발이 묶인 사이, 두꺼운 천으로 호흡기를 틀어막은 중급 기사가 쇄도했지만­

“처리해.”

­키키키킥!!!

­캬갸갸갹!!!

내 그림자 아래서 대기하던 수호병들이 뛰쳐나와 목덜미에 엉겨붙었다.

톱날처럼 뾰족뾰족한 톱니에 사로잡힌 남자가 핏물을 내뱉으며 저주했다.

“이, 이 비겁한 악마가...! 지옥에나 떨...”

“누가 비겁하다고?”

“끄아아아악!!!!”

대퇴근을 갈라놓자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부글거리며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송장을 내려다보자 날카로운 파공성이 공기를 가르며 육박했다. 나는 신속하게 건틀릿을 내둘러 화살을 튕겨냈고, 저 멀리 기습의 근원지를 노려보았다.

시위에 화살을 먹인 궁사들은 흠칫 어깨를 떨면서도 내가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안도했으나­

얼마나 오만한 발상인가.

­삐익!!

휘파람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지자 잠시 정적이 도래했고, 거대한 무언가가 질주해와 내 앞의 기사들을 날려보내며 정지했다.

“잘 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지?”

­.....우옹.

노래기가 고개를 숙이자 나는 사뿐하게 도약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타자 모든 것이 작게만 보였다. 신속히 광장을 가로지르니 제법 노련한 기사들이 날렵하게 뛰어올랐으나 노래기가 내뿜은 독무에 스치자 비에 젖은 목화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한 궁수 무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전할 줄 알았나.”

“어, 언제 여기까지...! 죽어라 이 악마..!!”

“느려.”

“으아아아아악!!!”

그 잘난 손가락을 모조리 절단해 절벽 아래로 걷어차자 놈들은 수박처럼 바위에 머리가 터져나갔다.

허리를 곧게 펴며 숨을 돌리자 혼란에 빠진 광장이 내려다보였다.

“커흐흐흑...! 난 여기까진가...”

“도, 도망쳐!! 이건 재앙이야!!! 하늘이 벌을 내린 거라고!!!”

“플루토 님이 노하신 게 틀림없다!!”

“살려줘...”

만신창이가 된 기사가 개미에게 사지가 붙잡혀 구덩이 안으로 끌려갔다. 사제는 허겁지겁 잘린 팔로 바닥을 기어다니기 바빴다. 한 이교도는 비명을 내지르며 손에 든 무기를 무턱대고 휘두르다 옆에 있던 동료의 목을 베었다.

바닥에는 비명과 선혈이, 창공에는 사악한 개미의 웃음이.

바람직한 광경이다.

나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시야에 들어온 적을 참벌해나갔다. 내 검을 막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복잡한 전장 속에서 한 명의 불순분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고, 설령 발각되더라도 개미들을 맞붙인 뒤 배후에서 급소를 찌르면 되는 일이었으니.

어느덧 광장은 피와 시체로 뒤덮이며, 점점 선명해지는 빛기둥에 형체들이 흐릿하게 뭉개져갔다.

한데 막 여덟 번째 중급 기사의 수급을 취했을 무렵, 전례 없는 중압감이 전신을 짓뭉갰다.

피 웅덩이 사이에서 고개를 들자­

“.....”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잊을 수 없는 무력감을 내게 안겨줬던 사내.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의 정점.

베라스틴의 살아있는 영웅.

사태의 원흉.

기사단장.

그가 제단 꼭대기에 서서 나태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찾았다.”

­뿌드득..

이를 악물었다. 호승심이 들끓었다. 전투로 깨어났던 육체의 세포가 모조리 불살라지는 감각. 내 모든 신경이 목소리를 높여 아뢰었다. 그를 죽이라고. 그의 내장을 뽑아내 불태워 단죄하라고.

자세를 낮추고 도신에 집중하며 비장의 한 수를 먹이려던 찰나­

“.....”

­휙.

기사단장은 돌연 등을 보이며 터벅터벅 걸어가 제단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화려한 장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그가 나른히 광장을 턱짓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건가...’

자신에게 도전하려면 먼저 이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오라고.

“.....”

나는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를 당장 죽이지 않은 오만함,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각오하며.

한 기사의 목덜미를 찢어발겨 화답하자 마법으로 확성된, 꽤나 정감 가는 목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쳤다.

“아니이~ 이게 무슨 일인가요오? 잠시 지상에 다녀온 사이 이런 소란이 벌어지다니! 기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죠?!”

“저, 저놈입니다!! 저놈이 우리를 습격해왔습니다!!”

“오홍... 당신은...?”

“.....”

그래, 너도 있었지.

그리운 얼굴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네놈... 누군가 했더니 그때 제단을 폭파했던 침입자로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키론 단장님이 직접 해치웠다고 들었는데.”

“넌?”

“서, 설마 날 잊은 건가?!! 이걸 보고도 과연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겠나!!”

한 기사가 분노하며 목 언저리의 철갑을 뜯어내자 칭칭 동여매진 붕대가 보였다. 혈압이 오른 탓인지 스멀스멀 피를 흘리며.

가볍게 실소했다.

“아... 방정떨다가 나한테 인질로 잡혔던 기사? 죽은 줄만 알았는데 용케 살아있었네.”

“크윽...! 그런 모욕을 듣고도 그냥 넘어갈 순 없다! 결투다!!!”

그가 왼손 장갑을 벗어 내게 던졌지만, 빨빨거리며 근처를 배회하던 개미가 재빠르게 낚아채 꿀떡 집어삼켰다.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 하나 상대해주기엔 내가 적이 좀 많은 모양인데?”

“에르고모프, 일어나세요오...! 식사 시간이에요!!!”

­콰작!!! 콰자자자작!!!!

“사제들이여!! 플루토 님의 재림을 방해한 저자를 절대로 용서치 마라!!!”

“기사단!!! 생존한 자들은 전원 이곳으로 집결하라!! 소환수한테 놀아나지 말고 술자를 제거해야 한다!! 마법 분대는 즉시 정화 마법을 전개하라!!!”

“예속구를 찬 마물을 풀어!!! 코볼트가 개미와 맞붙는 사이 우리는 대열을 정비한다!!”

“대규모 마법 준비!! 화재를 진화하고 광장을 밝혀라!! 저 커다란 지네는 중상급 이상 기사들이 나서서 전담 마크해!!”

“저, 저놈이 있으면 보수를 못 받잖아..! 마침 사람도 줄었겠다... 금화는 모두 내 차지야!!!”

“.....”

광장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핏발 선 살기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시뻘건 날붙이가 번뜩이자 차가운 병장기의 소음이.

그들의 기척, 호흡, 신경이 모여 군체를 형성하는 걸 느끼고.

질량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밀도 높은 적의가 괴어드는 걸 느꼈다.

평범한 인간 한 명이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강대한 적개심이.

근데 그렇게 쳐다보면

마치 내가 악역이라도 된 것 같잖아.

나는 피식 웃었다.

늘어뜨린 직도를 들어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발치로 흘러든 핏물에 차박차박 잔물결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섰다.

자욱하게 깔린 독무를 깊게 들이마시며,

그림자에서 칠흑의 군세를 소환하여,

나를 노리고 선 모든 이들을 시야에 담아,

당당히 고했다.

“악마를 원해?”

너희가 그러했듯

너희가 자초했듯

너희의 소중한 걸 자근자근 짓밟아 주마.

제대로 한 판 붙어 보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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