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학살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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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학살극 #3
날카롭게 전방을 응시했다.
격렬한 불꽃의 잔재가 사그라든 광장에는 아직도 상당한 적이 남아있다.
모두를 향해 날끝을 들이민 채 대치하자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누구 하나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지만, 한 용감한 기사의 희생을 필두로 고착된 전황에 변화가 불었다.
“아, 아무도 안 가면 내가 간다!! 죽어라 악마여!!! 나는 베라스틴의 자랑스러운 하급 기사 카... 커흐흑...!!”
“.....”
붉은 선혈이 신호탄이었다.
“마법 전개!!! 일제히 격발하라!!!!”
“전우들!!! 나를 따르라!!! 포화가 멎으면 곧바로 진입한다!!!”
“듀크 소대장을 엄호해!!!”
“궁사 장전!!!”
콰작...! 콰자자작!!!!
얼음, 불, 번개, 바위, 화살 등.
사방에서 번뜩이는 섬광이 몰아쳤다.
하나하나 지독한 악의를 품은 살수(?手)가.
나는 단도를 치켜들고 공격을 방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슈화아악!!
검날로 유려한 반원을 그려 화살대를 절단했다. 건틀릿을 교차해 날붙이를 튕겨냈다. 턱밑까지 육박한 얼음창을 빗겨내자 뺨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고, 시간차를 두고 날아온 도끼날은 고개를 젖혀 피해냈다.
“발사!!!”
재차 마법이 쏟아졌다. 한 덩어리가 지면에 착탄하자 노란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첨예한 날붙이가 그 위를 가르며 쇄도한다. 푸른 꼬리를 그리며 매서운 각도로 휘어오는 얼음 알갱이를 약진해 떨쳐내자 이번엔 무형의 칼날 바람이 날아들었다.
독무가 흩어지는 방향으로 짐작해 기민하게 사선에서 벗어나니 토벽이 솟구쳐 진로를 가로막았다.
“발사!!!”
염화(?火). 커다란 뱀의 모습을 한 불의 고리가 나선형으로 사출되었다. 곳곳에 얼어붙은 얼음의 잔재를 남김없이 녹여버리며 강습해온 합동 마법.
불타는 구렁이가 내 머리 위에서 아가리를 쩍 벌려와 가까스로 굴러서 회피하니 등 뒤로 거대한 용암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발사!!!”
“젠장...!!”
마법은 끊이지 않는다. 흉흉한 마법진이 적진 한가운데서 떠올랐다. 영창 탓에 발동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마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 머스킷 탄환을 격발하는 전열 보병처럼 여러 분대로 나뉜 마법 병단이 시간차로 주문을 발동하여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마법진의 빛고리가 찬연히 빛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짙푸른 궤적이 날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낮췄지만, 회피가 무색하게도 얼음덩어리는 코앞에서 파탄하며 날카로운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
맹렬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랐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다. 첨예하게 응축된 냉기가 살갗을 갈랐고, 상처 속으로 파고들어 고통을 더했다.
핏줄 사이로 녹아드는 얼음 결정에 새어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드니 금 간 댐처럼 노도의 기세로 범람해오는 화살촉이 보였다.
황급히 주변에 나동그라진 시체를 방패 대용으로 막아내자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선홍빛 얼룩을 남겼다.
극심한 통증이 전신으로 내달린다.
“발사!!!”
숨 돌릴 틈은 없다.
“젠장!! 다 튀어나와!!!”
캬갸갹!!
킥!! 캭!!
널브러진 주검 사이에서 대방패를 주워들었다. 개미를 그림자에서 소환해 마법을 틀어막았지만 곧바로 장렬하게 산화했다. 두꺼운 철판 너머로부터 버거울 정도의 압력이 느껴졌고, 한 방 한 방 묵직하게 찌그러들며 육신을 떠밀었다.
“발사!!!”
“씨발!!!!”
마법의 포화로부터 벗어나려면 적의 한복판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나는 넝마가 된 방패를 떨쳐내고 눈부신 궤적 사이를 내달렸다. 화살이 날아왔지만 개미를 희생시켜 막아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파편에 각반이 얼어붙는다. 질척한 토사류가 발목을 붙들었으나 이 또한 어거지로 떨쳐냈다.
근접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
하지만 화염 장벽에 발이 묶인 사이, 눈부신 벼락이 지그재그로 치달아 건틀릿을 관통했다.
“크헉?!!”
타들어가는 고통이 작렬했다. 살갗이 익는 냄새. 아머 위에 걸친 로브가 불타며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극심한 통증과 어지러지는 시야 속, 간신히 눈을 뜨자 희뿌연 연무 사이로 은빛 호선이 번뜩였다.
필사적으로 단도를 치켜들자
카앙!!!!
“우리 기사단의 마법을 직격당하고도 살아남다니...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네 상대는 나, 듀크 배너렛 님이다.”
“제길...!”
적의 수비선을 고작 몇 발자국 앞두고 한 상급 기사가 뛰쳐나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목에 붕대를 두른, 썩 익숙한 얼굴. 하나 그의 눈동자엔 이전과 달리 냉철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막 신체 강화를 마쳤는지 전신에서 푸른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폭풍우처럼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검격을 간신히 틀어막고 있자니 등 뒤에서 얼음 쪼가리를 밟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뭐, 뭐야?!!!”
다급하게 돌아보니 그곳엔 잘게 조각나 흩어지는 개미 한 마리와
““.....””
안구를 섬뜩하게 빛내는 상급 기사 두 명이 내게 칼날을 밀어넣고 있었다.
“젠장!!!!”
즉각 자리에서 이탈했다. 과격하게 발목을 비틀어 상황을 모면했다. 무리하게 꺾인 발목 인대에서 통증을 호소했으나 악을 써 무시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세 명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들러붙으며 검격을 펼쳐온다.
“침입자여!!! 자네의 스승은 누구인가!! 검술 실력이 제법이군 그래!!”
“하지만 여기까지다!! 우리의 동료를 해친 죄! 달게 받아라!!”
“윽...!!”
은푸른 궤적. 마력을 둘러싸 진동하는 아밍 소드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단도를 밀어넣어 칼날을 튕겨내자 옆구리 방향에서 오싹한 영창이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각반을 내밀어 방어했으나 놈은 순식간에 후방으로 도약해 사라졌고, 뒤엣 놈이 교차하며 목덜미로 칼날을 내질렀다.
고개를 숙여 피하자 이번엔 듀크가 수평으로 아밍 소드를 내질러왔다.
다년간 합을 맞춰온 듯, 능수능란한 연계.
“우라질!!!”
건틀릿으로 칼날을 막아세웠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손목에 회전을 실어 궤적을 비틀었다. 나도 단도의 검면을 비틀어 간신히 막아냈지만, 곧바로 맹렬한 수도가 얼굴을 향해 파고들었다.
다리에 기운을 둘러 측면으로 선회하며 역습하자 그가 양날검을 내려찍어 가로막았다.
“제법이야. 상급 기사 세 명이 협공해도 버텨내다니. 너처럼 빠른 놈은 처음 봤어. 발에 두른 그 검은 연기는 뭐지? 마력이 아니군.”
“알까... 보냐!!”
코등이 싸움. 검날을 맞대고 팽팽하게 힘을 겨룬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기사의 완력을 이길 수 없었고, 그의 검에 체중이 실리기 시작하자 점점 균형이 무너져내렸다.
한순간이라도 힘을 뺏다간 목이 잘린다.
자세를 유지한 채 측면으로 물러나려는 순간, 등골이 쭈뼛 서며 본능이 경고했다.
황급히 개미를 소환하고 보법으로 물러나자ㅡ
슈화악!!!
“....”
방금까지 머물렀던 공간이 파열하며 두 사내가 가로질렀다.
개미를 붙여놓았던 두 기사의 기습. 잠시라도 검을 더 붙들고 있었더라면 분명 즉사였다.
“...이전엔 일대일 운운하더니. 겁먹었나?”
“그래,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호랑이 새끼도 이빨이 있다는 걸 깜빡했지. 자네를 호적수라고 생각하고 전투에 임하도록 하겠네.”
“과찬이야.”
젠장...
칼자루를 고쳐 쥐며 공격에 대비했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간 나머지 두 기사에게 협공당하고 만다. 일단은 어찌어찌 임시방편으로 틀어막고 있지만 이도 곧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놈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 시야가 닿지 않는 측면으로 우회하며 기회를 노렸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노련한 전사들.
기습에도 꽤 공을 들였는지 요란한 갑주를 벗고 석탄으로 검게 칠해 위장했다. 칼날에도 독극물로 추정되는 녹색 진액이 뚝뚝 떨어져 일격을 허용했다간 그대로 끝장이다.
듀크가 마력을 갈무리하더니 함성을 외치며 돌진했다.
“베라스틴 기사들의 저력을 보여주마!!! 이 더러운 마족아!!!”
“.....”
나도 일단은 베라스틴의 시민인데 말이지.
상단에서 내려찍히는 도신을 날밑으로 틀어막았다. 놈이 칼날을 뒤틀어 측면을 공략했다. 나는 손목을 쳐내 빗겨낸 뒤 복부를 차올렸지만 그는 훌쩍 물러났고, 동시다발적으로 사각에서 어두운 기척이 다가왔다.
“막아!!!”
키이익!!!
개미들이 지면에서 솟구쳤다. 두 기사는 곧바로 진로를 틀었다. 급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해 역동작을 건 뒤, 한 사내가 개미를 전담하는 사이 다른 놈이 날렵하게 도약해왔다.
“죽어라 침입자.”
“크읏...!!”
단도만으론 무리다.
재빨리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막았다. 사내는 담담하게 뒤로 물러나더니 짧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재차 저돌해왔다. 왼손에는 카타르. 오른손에는 스몰 소드. 상단에서 하단으로. 하단에서 측면으로. 교차. 엇박으로 타이밍을 흐려놓은 뒤에는 양손의 검을 바꿔쥐며 정교한 찌르기.
발치의 불붙은 석탄을 차올려 기세를 한 풀 꺾어내고 방향을 트니 난폭하게 공기를 헤집으며 다가오는 듀크가 보였다.
“제길...! 백은보(白??)!!”
나는 기척을 감추어 상대의 배후로 향했다.
숙련된 전사일수록 기척 읽기에 능하다. 이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 기술은 이미 질릴 대로 봤다.”
까아앙!!!
기사 한 놈이 내 검을 대신 받아냈다. 그는 완력으로 날 허공에 내동댕이치더니 자세를 낮추고 검끝에 기를 모았다.
마력의 대류 현상으로 그의 머리칼이 붕 떠오르고, 붉은 오라가 경장 틈새로 새어나온다.
“비스마르크류 스파타 소드 제4 초식...”
이내 용암과도 같은 검기가 널찍한 도신에 괴여들었고
“씨발...!”
“강진(?)!!!!”
일순간에 해방되어 쇄도했다.
화마가 작렬했다. 반원 형태의 불꽃이 대지를 가르며 육박했다. 불타오르는 홍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마지막 순간 제 몸을 바쳐 헌신한 낯익은 개미의 모습뿐.
하지만 희생이 허무하게도 불길은 녀석의 몸체를 뚫고 들어왔다.
내 몸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랬어야만 했다.
“네놈... 어째서 내 기술을 맞고도 멀쩡하지.”
“.....”
나는 고온에 달궈져 검게 유리화된 암반과 마그마 사이에 멀쩡히 서서 그들을 응시했다.
제법 태연한 스탠스를 취하고는 있지만 나 역시 의문이었다. 방금 일격은 기합 따위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뼈가 재로 연소하고 남았을 위력이었다.
한데 뜨거운 기류에 로브 앞섶이 살짝 벌어지자 옷감 사이로 적색의 레더 아머가 내비쳤다.
“그건... 살라만더의 가죽인가. 운도 좋은 놈이로군. 하지만 네놈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갑옷이 없는 부위의 내상까지 막지는 못했을 테니.”
기사가 내 팔과 다리를 손짓하며 서늘하게 웃었지만, 덕분에 나는 상황을 냉정히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어째서...’
레더아머 덕에 치명상을 면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기사의 말마따나 갑옷으로 보호하지 못한 나머지 부위는 화상을 입었어야 마땅하다. 현실은 온라인 게임과 달라서 갑주 하나만으로 전신을 보호할 순 없으니.
하지만 반파된 장비와는 달리 내 육체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타지 않았다.
시뻘겋게 달궈져 도신이 녹아내리는 바스타드 소드. 이음매가 융해되어 발치에 떨어지는 각반. 곳곳이 타버려 너덜거리는 로브를 내려다보던 중, 나는 품 안에서 맥동하는 희미한 존재를 눈치챘다.
‘설마... 이 구슬이...?’
홍옥(??).
유적에서 발견한 보구. 태양신 라를 상징하는 유물이자 혹독한 열기와 태양, 수호의 힘을 지녔다고 알려진 보석.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지만 이는 나중에 검증해도 충분하다.
‘일단 나중에 돌아가면 감사하다고 말이나 해둘까...’
지금도 굳건히 원형을 유지하며 심장과 장기를 보호하는 살라만더의 가죽 아머. 더 나아가 이를 선물해준 니아와 아델을 떠올리며 칼자루를 움켜쥐자 멀찌감치서 칼날에 마력을 휘어감는 듀크가 보였다.
“비스마르크 아밍 소드 제2 초식...”
“.....”
이전에 겪었던 기술명.
나는 즉각 검을 치켜들며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씨익.
하지만 그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려 보이더니 도중에 자세를 풀고 나머지 두 기사와 함께 자리를 이탈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씨발!!!”
도약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마법사의 영창이 멎었던 이유. 빛기둥에 가려졌던 천장을 쳐다보자 그곳엔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초대형 얼음 기둥과 형형색색의 마법진이 만들어져 있었다.
“듀크! 케일! 도긴슨! 수고했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라!!!”
“궁사 일제히 격발!!!”
“사제들이여!! 우리 플루토 교단의 힘을 보여주자!!
콰작! 콰자자작!
화살이 진로를 틀어막았다. 강력한 흑마법이 전신을 묵직하게 옭아맸다. 당장 자리를 벗어나야 했지만 팔다리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재빨리 노래기를 불러들이고자 시도했으나 녀석은 거대 서적과 맹렬히 대치하는 중이었다. 개미 군단은 전사와 마물의 난전에 갈팡질팡했고, 마법의 사정거리 밖에서는 내 목에 잔뜩 혈안이 된 이교도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내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이 떨어진다.
“발사.”
방아쇠가, 당겨졌다.
중압만으로도 압사할 것 같은 얼음 기둥이 강하해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다해 적을 노려보았다.
분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어리가 분했다.
적들의 술수에 말려든 어리석음에 분노했고.
강건하게 버티지 못한 육신에 노여워했으며.
이들을 처단하지 못하는 운명에 괴로워했다.
내 소중한 걸 빼앗아간 자를 단죄하지 못하는 것이.
사랑하는 여인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다.
지금 이 상황을 면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텐데.
마지막으로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갈 심산으로 칼자루에 힘을 실은 순간
“와... 완전 거지꼴이 따로 없네. ...도와드려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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