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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97화 (197/375)

〈 197화 〉 학살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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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학살극 #4

마법이 착탄하자 지축이 뒤집혔다.

잘게 조각난 빙설 파편이 시야를 하얗게 덧칠하고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마력의 격류가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흑발을 휘날렸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차츰 진동이 가라앉자 태연하기 짝이 없는 낯짝이 보였다.

“콜록 콜록...! 이 새끼가...!!”

­휘이이익!!

“까, 깜짝이야! 왜 갑자기 때리고 그래요?! 기껏 구해놨더니만...”

“좆까!!”

손을 쳐냈다. 자세를 바로잡을 겨를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로닌은 잽싸게 상체를 젖혀 피하고는 징글징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확실히 저희 사이에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자구요? 양쪽 다 서로 오해가 있기도 했고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

“이 씹새끼가!!!”

­슈화아아악!!!

즉각 단도를 소환해 멱을 꿰뚫고자 했으나 로닌은 골동품보다도 못한 철검으로 가볍게 막아내었다.

...싸구려 잡철에 마력을 싣는 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놈이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옷은 또 어디서 구했는지 하급 기사의 갑옷을 훔쳐 입은 모양.

“사실 저야 말톤 씨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지만... 죽게 내버려 뒀다간 틋콩님한테 혼나요. 위험해 보여서 가세하러 왔죠.

“이 새끼가 뻔뻔하게...!”

“진짠데... 저번 일 이후로 얼마나 꾸지람을 들었는지 아세요? 그쪽은 특별 관리 대상이라 절대로 적대해선 안 됐다면서... 그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놈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빙운(雲)이 가라앉자 그의 눈길이 맞닿은 곳에는 무수한 갈래로 조각난 얼음 기둥과 잔해가 진풍경을 이뤘다.

뜨거운 불길과 냉기가 맞물려 형성된 증기는 넓게 지면을 덮었고, 굴곡을 타고 흐르는 용암과 얼음, 공기를 떠도는 미세한 빙설(雪)이 붉은 조명을 반사하는 경관은 마치 종말이 다가오기 직전의 행성을 보는 듯했다.

그 이상야릇한 절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니 로닌이 마력을 방사해 입가로 치미는 독무를 흩어내며 말했다.

“와... 꼭 우리 동네 정육점 같네...”

“...닥쳐.”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목소리만 들어도 부아가 치미는 소년. 절대로 얼굴을 맞대기 싫은 유형이다.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죽이리라 다짐했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나쁘다.

살점으로 파고든 얼음 조각을 털어내기 무섭게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해치웠나? 죽은 거 맞지?”

“그런 모양인데...? 저런 마법을 맞고도 살아있는 사람이 어딨겠어.”

“와!! 우리가 악마를 무찔렀...!!”

“방심하지 마!! 사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즉시 수색대를 투입해서 사망 여부를 확인해!!”

“에이... 저런 걸 정통으로 얻어맞았는데 무조건 골로 갔겠지...”

“.....”

곧 얼음벽 너머로부터 꾸물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닌이 자세를 낮추고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음... 발소리로 봐선... 세 개 분대로 나뉘어서 접근하는 것 같네요. 상급 기사는 없는 모양이고... 전부 배첼러 급 기사나 스콰이어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프면 그냥 얌전히 누워 있을래요?”

“꺼져.”

비틀거리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호흡을 가다듬고 상처를 갈무리했다.

검게 타버린 옷감을 찢어 환부를 동여매니 자욱한 안개벽 너머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단도를 강하게 거머쥐자 로닌이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누가 더 많이 잡나 승부해요. 말톤 씨에겐 절대 안 질 자신...”

“.....”

나는 고요하게 연무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데로 익숙해진 동작. 스승님에게 배운 경험을 살려 기척을 지웠다. 설원을 거니는 늑대처럼 자작한 얼음 조각 위를 고요하게 활보했고, 기회를 엿보며 안개 속에 몸을 은닉했다.

입김조차 죽인 채 기다리자 곧 내가 있는 장소 근처로 뿌연 마석등의 불빛과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조부터 수색 진척도 순차별로 보고하라.”

“코요테 이상 무. 범위 내 미상 인원 없음.”

“송골매 이상 무.”

“흑곰 이상 없습니다!”

“알았다. 약간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보고할 것. 설마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열어두고...”

“...분대장님?”

“.....”

­철퍽.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냈다. 후방에서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 등 뒤에서 미간 사이를 꿰뚫으니 놈은 단말마조차 없이 절명했다. 상급이라면 몰라도 중급 기사는 내 적수가 못 되니.

잇따라 안개 너머로부터 동요가 전해져왔다.

“잠깐...! 저 시체는 누구지? 갑주를 입고 있는 걸 보니 그 악마는 아닌데...”

“견장 무늬를 보니 경비조인가 본데? 아까 마물이랑 싸우다 죽은 시체인가 보지.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둘러봤는데 안 보이는 거면...”

“아냐!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시체치고는 너무 멀쩡하잖아! 어? 방금...”

“이, 입꼬리가 올라갔... 끄아아악!!”

“으아악!!!”

불현듯 도처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무방비하게 발을 들인 기사들이 죽어나가자 피보라가 안개를 더욱 붉은 색조로 물들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단말마. 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광경이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기사들을 학살했다.

“아까는 잘도 마법을 날려댔겠다.”

“누, 누구냐...! 모, 모습을 드러내... 으아악!!”

­푸걱!!!

거울처럼 반짝이는 얼음 표면에 병사의 겁먹은 얼굴이 비쳐보였다. 나는 놈의 등 뒤로 쇄도했다. 뼈를 부수며 폐를 관통하자 파열음이 터져나왔고, 황급히 달아나는 기사의 뒤통수를 붙잡아 얼음벽에 처박았다.

놈은 얼음에 핏덩이를 질질 늘어뜨리며 무너져내렸다.

“셋.”

다시 안개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계까지 존재감을 지우고 상대의 기척을 쫓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놈들의 거동 하나하나가 충분하고 남는 정보를 가져다주었으니.

눈을 감고 집중하자 달그락거리는 판금 갑옷, 바스러지는 얼음 조각과 가죽 부츠, 추위와 두려움에 맞부딪히는 치아가 느껴졌다.

도중에 이 섬뜩한 웃음소리는 로닌의 것이겠지.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두리번거리는 기사들을 하나둘씩 도륙하자 전방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수색대!! 무슨 일인가?!! 제길...! 안개 때문에 보이질 않으니 당최...!!”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래, 듀크 소대장. 혹시 모르니 아까처럼 다른 상급 기사와 같이 가게. 대규모 합동 마법으로도 처치하지 못했을 줄이야... 확실하게 발을 묶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

마지막 순찰조의 숨통을 끊어내고 전황을 엿보자 이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세 인영이 보였다.

어느새 내 곁에 나타난 로닌이 말을 걸었다.

“이야... 이전부터 지켜봤는데 말톤 씨도 장난 아니네요. 마나도 안 쓰시면서 기척 지우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어디 산속에 틀어박혀 사는 기인한테 특훈이라도 받았나 봐요?”

“....”

“쌀쌀맞기는... 그나저나 상급 기사 세 명이라... 베라스틴의 기사는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네요.”

“...이길 수 있겠어?”

“글쎄요? 맞붙어 봐야 알겠죠? 그래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걸요?”

“.....”

이를 악물었다. 이 녀석과 손을 잡는 건 죽어도 싫다. 하지만 적을 물리치고 라디와 아리엘을 구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지금은 협력해야만 한다.

나는 치미는 살의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로닌. 일단 지금은 힘을 합친다.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에... 싫은데요?”

“뭐?”

“아니 그야.... 이렇게 마음껏 싸울 기회를 양보할 리 없잖아요.”

놈이 씨익 웃으며 즉답하고는 은빛 잔상을 남기며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이 씹새끼가!!!”

곧바로 뒤쫓았다. 로닌의 발길이 향한 곳은 포화 한복판. 피에 젖은 채 광인처럼 웃으며 나타난 그를 발견하고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짐작한 기사들의 마법이 착탄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로닌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검을 들어올리더니­

“강(?)!!!”

­콰드드드드드득!!!!!!!

무식할 정도의 검기로 마법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아, 아닛...!! 저, 저 저놈은 대체 누구야!!!”

“하, 하급 문양...? 고작 하급 기사가 어떻게...!”

“우리 일원이 아니다!!! 다들 조심해!!!”

적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만큼 로닌이 보여준 무위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으니.

막힘없이 질주하는 그의 앞으로 듀크를 비롯한 상급 기사 세 명이 달라붙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방금 그건...”

“...고등 기술. 왕실 쪽 사람인가.”

“어째서 왕실의 기사가 이곳에 있는 거지.”

세 일당이 험상궂은 시선을 보내왔다. 겨울철에 막 온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전신에서 살벌한 마력을 피어올리는 상급 기사 무리.

하지만 로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헐겁게 칼자루를 움켜쥔 채 실실 웃었다.

듀크 일행이 재빨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삼면에서 동시에 쇄도했다.

“고작 혼자서 우리에게 맞선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죽어라 이 꼬맹아!!!”

“꼬맹이라...”

로닌은 대충 걸머쥐었던 한손검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리더니­

“파(?).”

­콰르르르르르르르!!!!!

파도처럼 푸른 물결이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마력을 실은 검기. 안개를 갈라놓으며 물결친 파동은 삽시간에 쇄도해 기사들을 갈라놓았다.

이어서 로닌이 딛고 선 대지가 파열했다.

­콰과아앙!!!

­크윽...?!!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찰나. 녀석은 단걸음에 거리를 좁혀 묵직한 일섬을 박아넣었다.

검면을 내세워 간신히 막아낸 듀크는 시퍼렇게 아연실색하며 튕겨나갔다.

로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나머지 두 기사에게 검격을 이어나갔다.

“세 줄 무늬 견장이라... 소대장급인가 봐? 대단하네.”

“윽...!”

몰아치는 검강. 청량한 파랑색 궤적이 안개를 갈라놓았다. 두 기사도 검에 마력을 둘러 응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로닌은 난폭하게 도신을 들이밀어 공격을 봉쇄했고, 짓궂게 비웃으며 놈들의 발등을 찍어눌러 유착했다.

멧돼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해오는 검술에 기사들이 애를 먹으며 필사적으로 떨쳐내려 해 보지만­

“크앙!!”

“크헉...!”

로닌이 무지막지한 일격으로 자세를 무너뜨렸다. 상단으로 튕겨나간 가사의 검을 송두리째 절단했다. 이내 발바닥으로 흉갑을 걷어차 그를 바닥에 널브러뜨리더니 어깨를 짓밟고 철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이에 듀크가 아밍 소드를 내세워 그의 사각으로 쇄도했으나­

­카아앙!!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윽...! 사, 살아있었나...?!!”

나는 전신에 검은 기운을 두른 채 그의 검날을 막아세웠다. 난폭하게 그의 종아리를 찍어누르고 어깨로 들이받아 균형을 빼앗았다.

성급하게 휘둘러진 검격을 자세를 낮춰 흘려내고 허벅지에 단도를 찔러넣자 등 뒤에서 상급 기사의 끔찍한 단말마가 들려왔다.

상황이 기사 쪽에 불리하게 흘러가자 하늘에서 무수한 마법이 날아들었다.

“로닌!!!”

“알아요!!”

나는 듀크의 허벅지에서 난폭하게 칼날을 뽑아내고 놈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녀석도 순식간에 상급 기사 두 명의 숨통을 끊고는 착탄에 대비했다.

유려하게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불타오르더니, 살벌한 마력과 함께 상공을 노려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강렬한 기합성이 터져나와 검기가 해방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

오싹할 정도로 푸른 광채가 마법을 잘게 조각내는 걸 바라보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저번에 나랑 적대했을 땐 많이 봐준 거였냐?”

“글쎄요? 전 머리가 나빠서 기억 안 나는데요?”

“....”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도신을 전방으로 내세운 채 후속타에 대비하고 있자니 멀찌감치서 비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듀크가 아밍 소드에 몸을 지탱해 간신히 몸을 가누며 날카롭게 외쳤다.

“크윽...! 네놈... 그 금발하고 푸른 오라...! 누군가 했더니 그때 그 소문의 꼬맹이로군...!!”

“절 아세요?”

“알다마다...! 제작년 즈음 왕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지! 악명 높은 왕립 사관학교를 월반해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가 있다고...! 그 뒤론 소식이 끊겨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왕가의 개가 되어있었나!!”

“으음... 글쎄요? 사교에 너무 맛들어서 머리가 맛이 간 거 아니에요?”

“시치미 떼지 마!! 게다가 그 특유의 마력 파장은 대귀족 하이젠베...!”

“에이... 거기까지.”

­서걱!

채 마치지 못한 끝말이 허공에 맴돌았다.

로닌이 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자 검기에 잘려나간 공기가 도로 몰려들며 머리칼을 휘날렸다.

뒤늦게 서서히 기울어지다 끝내 툭 떨어지는 듀크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실감했다.

경박한 언행과 가벼운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실 기사로 임명될 수 있었던 이유를.

“...틋콩은 어딨어.”

“이교도 사이에 숨어서 기습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때 봤던 배낭 기억하죠? 거기에 불 마석이 잔뜩 담겨있었든요. 아마 곧 신호가 올 텐데...”

“...역시 마석이었나.”

“오... 알고 있었어요? 아, 그리고 저 시꺼먼 마물은 전부 말톤 씨가 조종하고 있는 거 맞죠? 저거 일단 다 물려주세요. 전력이 손실되면 아깝잖아요.”

“그 뒤로는.”

“나머지 잔당은 틋콩님에게 맡기고 저희는 머리를 치러 가야죠. 솔직히 혼자서는 조금 벅찬데... 도와주실 거죠?”

로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광장 한구석을 턱짓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부정맥에 걸린 심장처럼 맥동이 한계에 달한 제단과ㅡ

“.....”

화려한 장창을 짊어진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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