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8화 (198/375)

〈 198화 〉 학살극 #5

* * *

[198] 학살극 #5

기사단장.

베라스틴 모든 기사의 정점의 선 자.

제단 꼭대기에 걸터앉은 남성이 무심한 표정으로 광장을 관조했다.

서른 정도 되었을 법한 얼굴은 선이 굵어 상당한 미형이었지만, 눈매에 내려앉은 권태는 그가 보아온 세월을 짐작게 했다.

사람답지 않게 일편의 잔 움직임조차 절제된 모습과 자칫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대리석 조각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부하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는 걸 지켜봤음에도 나서지 않았다.

이 모든 이들을 불러 모은 주동자일 텐데도.

마치 처음부터 그래 주길 바랐던 것처럼.

너무 비약인 걸까?

“...로닌, 승산은 얼마 정도 보냐.”

“솔직하게요?”

“그래.”

“음... 뱁새 다리에 낀 때만큼은 있지 않을까요?”

“그것밖에 안 돼?”

“네. 그것도 엄청 많이 쳐준 거예요. 원래 저 사람하고 대적하는 건 예정에 없었어요. 불 마석으로 제단만 무너뜨리고 토끼려고 했는데 누구 씨가 무식하게 정면 승부를 거는 바람에...”

“.....”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저희 둘이 합치면 비둘기 다리쯤은 될지.”

로닌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까딱거리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상급 기사의 검을 건져올렸다.

차츰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마법의 잔재와 안개가 흩어지자 적들이 크게 술렁였다.

“듀, 듀크 님?!! 어째서...!”

“케일이랑 도긴슨도 당하다니!!”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상급 기사를 셋이나... 젠장..!!”

“.....”

서서히 일어나 제단 꼭대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기사단장을 불안하게 힐끔거리며 물었다.

“...야, 슬슬 위험한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음... 이제 조금만 있으면 반응이 올... 아! 저기 봐요!!”

“....?”

이교도 한복판에서 적색 연막이 피어올랐다. 농성 중인 성곽 안에서 올라오는 봉화처럼 뭉게뭉게 솟아나는 연기.

연무는 광장의 중간 즈음까지 도달하더니 차츰 낮게 퍼져나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덮었다.

로닌이 악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말톤 씨, 범죄 노예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요?”

“갑자기 그건 왜.”

“몇몇은 마법을 개발하는데 실험체로 쓰이거나 미개척지를 개간하는데 동원되는데.. 그 정도는 호사죠. 대개는 탄광에 팔려 가요. 남자는 폐가 석탄처럼 변해서 죽는 날까지 일만 해야 하고, 여자는 그런 시커먼 숯덩이들을 하루종일 밤 상대...”

“요점이 뭔데.”

“그중에서도 제일 최악으로 꼽는 장소가 있어요. 어디게요?”

“....”

침묵으로 재촉하자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불 마석을 채취하는 광산이에요! 거기는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에서 작업해야 하거든요. 자칫 등유 랜턴을 쏟기라도 했다간 산을 통째로 날려먹을 수 있으니까.”

“....”

“저희가 들고 온 건 그중에서도 최순도의 마석이에요. 이건 저도 못 막으니까 알아서 대비하세요!”

“이 씨발!!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돌연 잽싸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는 로닌을 뒤쫓았다. 녀석을 따라 황급히 구덩이 아래에 엎드리자 기사들로부터 쇄도해온 화살이 바위를 긁어냈다.

“히히... 바보들, 곧 죽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닥쳐!! 너 앞으로 한 마디만 더 뻥끗했다간...!”

“에이 흥분하지 마세요 혀 깨물....”

그때였다.

­─────────!!!!!!!!!!!!!!!!

말소리가 멎었다.

섬광이 시야를 앗아갔다.

지하 한복판에서 발발한 폭발.

거대한 항공모함에서 쏟아내는 음파처럼 묵직한 충격이 아랫배를 유린했다.

지형이 흐릿하게 부서지며 대지가 해일처럼 요동쳤다.

그간 겪었던 폭발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

마석 폭발.

“­.­...!”

순간, 군시절의 배움을 떠올려 귀를 막고 입을 벌려 충격이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장기가 모조리 터져나갔을지도 모른다.

자칫 고막이 죄다 찢겨나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폭음이 질량을 갖추어 전신에 작렬했다.

진동이 조금 가라앉은 후, 뒤집힌 속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키니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온다. 운신했던 구덩이 앞의 바위는 반파되어 윗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곳곳에 생겨난 커다란 균열로부터 뿜어나온 빛줄기가 광장을 불태워버릴 기세로 솟구쳤다.

뻐근한 고개를 돌리자 혀를 씹었는지 주둥이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로닌이 보였다.

“아!! 애 혀햐...!!”

“...꼴좋다.”

비틀거리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방심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지만 이교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놈들이 서 있던 지대는 고라니 떼가 휩쓸고 간 무밭처럼 처참하게 파헤쳐진 상태였고, 광장 구석에 즐비했던 텐트 역시 후폭풍에 떠밀려 모조리 뽑혀나갔다.

조금 괜찮아졌는지 로닌이 입가의 피를 스윽 닦으며 말했다.

“아야 아파라... 저기 들어간 불 마석만 하더라도 족히 천 골드는 될걸요. 틋콩님의 신임이 두텁긴 해요. 말 한마디면 폐하랑 재무장관이 뭐든 허락해주니. 말톤 씨는 국왕님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

금화 속에서라면.

제단 쪽을 올려다보자 폭발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층계를 내려오는 사내가 보였다.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야, 혹시 짜 둔 전술이라도 있냐.”

“음... 있긴 해요.”

“...지금 빨리 말해.”

녀석이 살짝 경직된 어투로 대답했다.

“하나는 틋콩 님이 나머지 불 마석을 설치할 수 있게 제단에서 놈을 떨어뜨려 놓는 거고요. 두 번째는...”

“.....”

“살아남으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순간­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

순식간이었다.

분명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음에도,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닌이 내 허리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말톤 형!!!!”

“으윽...?!”

바짝 타들어간 허리띠가 끊어지며 지면에 무릎이 쓸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느새 그가 내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기사단장의 입술이 열리자 중후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얘기는 들었다. 참 얄궂은 인연이군. 그리고 당신은... 공작가의 자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키론 경. 졸업식 이후 처음인가요? 왜 왔기는, 진흙탕까지 추락한 범죄자를 잡으러 왔지.”

“....”

구면이었나.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을 새도 없이 로닌이 말을 받아쳤다. 녀석은 맞잡은 검에 잔뜩 긴장을 실으며 비꼬았지만 기사단장은 목석처럼 변함없는 태도로 말했다.

“도련님은 야공(??)이 담아놓은 물그릇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죠. 당신의 짧은 식견으론 알지 못합니다. 이 세계엔 불가피한 일도 있다는 것을.”

“...그게 폐하의 녹봉을 받은 기사가 할 소리야? 그러면 깔끔하게 뒈지시던가. 수십 년간 기사의 모범으로 살아왔으면 그에 걸맞게 얌전히 늙을 것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크윽...!”

로닌이 이를 갈았다. 복잡한 과거를 반추하는 그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무턱대고 돌진하다가 객사할 기세였기에 나는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다. 네가 쓰러뜨린 내 일행은 어디 있지?”

기사단장이 담담한 어조로 고했다.

“두 여자는 무사히 살아있다.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니 안심해라. 네가 나를 쓰러뜨린다면 무탈히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런가...”

그거면 됐다.

그간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탄식하자 로닌이 칼자루를 고쳐 쥐며 속삭였다.

“...말톤 형, 내가 정면에서 시선을 끌 테니까 형은...”

“그럴 필요 없다.”

­콰드드드득!!!!!

“크헉...?!!!”

돌연 어마어마한 충격이 옆구리에 가해졌다.

놈이 순식간에 나와 로닌 사이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양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창을 거머쥐고 오연하게 선 기사단장이 보였다.

‘젠장...!’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창대로 얻어맞아서 망정이지 창날에 적중했으면 분명 상체가 두 동강 났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건 오롯이 그가 손속에 사정을 뒀기 때문.

즉 지금 나와 로닌은 이미 한 번 죽었다.

황급히 심장 앞에 검날을 세워 일격사에 방지하자 마찬가지로 기사단장의 건너편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로닌과 시선이 마주쳤다.

수적 우위를 활용해야만 한다.

재빨리 녀석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뛰쳐나갔다. 나는 단도의 기운으로 가속하며 질주했고, 로닌 역시 푸른 마력의 잔상을 늘어뜨리며 쇄도했다. 전례 없을 속도로 증속해 검을 찔러넣는다.

하지만­

“.....”

“읏?!”

칼날이 닿기 직전, 기사단장은 아무런 전조 없이 사라졌다. 그가 나타난 곳은 나와 로닌의 측면. 말도 안 되는 속도에 아연실색했지만, 우리는 곧바로 발걸음을 교차하며 연계했다.

“로닌!!!”

“하아아아압!!!”

푸른 오라가 로닌의 칼날에 휘감겼다. 싸구려 철검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뚜렷한 강기가 휘몰아친다. 그는 난폭하게 진각을 내디디며 검날을 올려벴고, 응축된 청색 오라로 대기를 불사르며 기사단장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건너편엔 내가 있었다.

“흐랴아아아압!!!!”

신속. 무방비한 등판을 노린다. 왼발을 축으로 회전해 위력을 실었다. 발걸음을 교란하며 도신을 휘두르고, 그림자를 불러들여 가속. 시야 구석이 일그러질 만치 증속하며 선회한다. 단도의 짧은 사정거리를 극복하는 아슬아슬한 초근접전.

나는 집요하게 배후로 파고들며 칼날을 찔러넣었지만, 기사단장은 창을 짧게 쥐고 반원을 그리는 것만으로 파훼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물러난 순간 황금빛 음영이 내 옆을 박차고 나갔다.

“키론!!!!!”

로닌이 금발을 휘날리며 사내에게 치달았으나­

“.....”

기사단장은 창대 바닥에 달린 무게추로 무뚝뚝하게 녀석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그의 적안이 내게로 향했다.

“젠장...!”

나는 즉각 자세를 바로잡으며 공격에 대비했지만, 그는 이미 내 등 뒤에 있었다.

“미숙하군.”

“미친?!!!”

재빨리 전방으로 도약하며 뒤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목덜미에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감지하며 다시 앞을 돌아보니 무언가가 내 안면을 붙들었다.

두꺼운 검자줏빛 가죽 장갑의 틈새로는 똑바로 내리꽂히는 창대가­

“.....!!!!”

황급히 단도를 들어올려 충격에 대비했으나, 폭발하듯 튕겨나갔다. 손가락뼈가 모조리 바스러질 듯한 충격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지고 검은 도신에서 불길한 소음이 작렬했다.

명멸하는 시야 속, 지면에 널브러져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자니 익숙한 금발 소년이 지면을 휩쓸며 날아와 내 옆에 나동그라졌다.

“으윽...”

“큭...!”

격통을 감내하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기사단장은 느긋하게 장창에 기댄 채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소동에 관여한 기사들은 전부 되다 못한 떨거지다. 그랬기에 쉽게 구슬릴 수 있었지. 상급 기사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틋콩이 제단에 불 마석을 설치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이상하군. 꼭 조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려. 대체 왜 사교에 가담한 거지? 당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라고만 해두지. 세상은 원하는 데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너희 둘도 알아두거라.”

로닌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개소리하지 마!!! 난 평생 당신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어!! 당신 같은 사람도 어쩌지 못할 사정이 어디 있다는 거야?!!”

“...보다시피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다.”

그가 나를 향해 로닌을 눈짓하며 씁쓸한 미소를 품었다.

그 모습이 사교를 이끈 우두머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아 잠시 말문을 잃은 사이,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뛰쳐나가려 하는 로닌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은 왜...”

“그만. 둘 다 이제 일어나거라. 내게서 무언가를 더 알아내고 싶다면 검으로 묻거라.”

“....”

나는 당장 복잡한 머리속을 제쳐두고 눈앞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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