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9화 (199/375)

〈 199화 〉 학살극 #6

* * *

[199] 학살극 #6

냉병기 중 최강의 무기를 꼽으라면 다들 첫 번째로 검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검사들을 수도 없이 잡아먹은 게 바로 창병이다.

인류는 창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부터 비로소 먹이사슬 최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막대기를 뾰족하게 다듬거나 끝에 날카로운 물체를 매달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구조 덕에 누구나 쉽게 제조할 수 있었고, 생산 비용이 저렴할뿐더러 사용법도 간단해 수많은 전쟁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민병의 상징이자 만병지왕의 무기.

하지만 물론 단점 또한 존재한다.

길이가 긴 탓에 휴대하기 불편하며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팔다리가 짧거나 근력이 약한 사람은 다루기 힘들뿐더러, 검처럼 선을 이루는 공격 형태와는 달리 한 점을 노리고 조준해야 하기에 명중률 또한 비교적 낮았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 키론은 그 모든 걸 기량으로 극복해냈다.

“허억 헉...!”

전투가 시작되고 제법 시간이 흐른 시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지면 위를 뒹굴고 있었다. 온몸엔 타박상과 생채기로 성한 구석이 없었고, 그을음과 먼지, 굳어버린 혈흔으로 범벅되어 송장과도 같은 몰골이었다.

팔꿈치를 부여잡은 채 신음하자 내 옆으로 금발 소년이 날아와 나동그라졌다.

“쉰다섯.”

키론이 느슨하게 창대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놈들이 급소를 허용한 횟수다. 또 내게 죽은 횟수기도 하다. 내가 진심으로 응했으면 너희는 이미 이 지하에 사장되었을 것이다.”

“.....”

제길...

지면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네.”

“저거 완전 괴물 아니냐.”

“...말했잖아요. 저거 인간 아니라고.”

“시발...”

“잡담은 끝났나.”

“.....”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로닌 또한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짚고 일어섰다. 수십 합의 격돌에도 나와 녀석이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 전부 이 남자가 절묘하게 급소를 빗겨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를 해치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로닌과 짧게 시선을 교차한 후 곧바로 달려나갔다.

“흐랴아아아압!!!!”

“하아압!!!”

“...아직도 모르겠나.”

기사단장이 창날을 낮게 드리웠다.

날붙이가 번쩍였다. 좌로 도약해 회피했지만, 창끝이 뱀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왔다. 나는 단도로 소켓을 쳐내 간신이 궤도를 비틀었으나, 그가 창대를 잡아당기자 목 뒤에서 날카로운 미늘이 다가와 필사적으로 땅을 헤집어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사이 로닌이 기사단장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아밍 소드를 내질렀다.

“키론!!!!”

“.....”

회축(回?). 그는 로닌의 복부를 걷어차고는 창대를 크게 반전시켜 검극을 막아냈다. 이내 폭풍처럼 기세를 살려 밀어붙였다. 로닌은 황급히 검을 들어올려 후속타에 대비했지만, 키론은 녀석을 공중에서 발로 찍어누르고 창대를 내리찍었다.

묵직한 창날이 아밍 소드를 짓누르자 로닌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형 도와줘!!!”

“백랑보(白??)!!!”

호기(??). 기사단장이 로닌을 상대하는 사이 디딤발의 회전을 실어 공간을 뛰어넘었다. 내가 나타난 곳은 그의 등 뒤. 말톤에게 배우고, 스승님으로부터 완성한 보법.

이건 예상 못 했을 거다.

놈의 뒷목에 단도를 박아넣은 순간­

“....!!!”

“.....”

기사단장은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사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정지한 시간 속, 느릿하게 내 쪽을 돌아보는 그의 적안엔 오싹한 마력광이 맺혀있었다.

섬뜩한 공포가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씨발!! 막아!!!”

­키이이익!!!!

­크샤아아악!!!

“....”

내 급박한 외침에 개미들이 튀어나와 기사단장에게 들이닥쳤으나 마나의 격류를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전부 터져나갔다.

하지만 녀석들이 벌어준 찰나의 순간을 틈타 간신히 거리를 벌리고 욱신거리는 왼눈을 부여잡자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묘한 힘을 쓰는군. 옛 신의 권능. 그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계속 그 힘에 의지했다간 언젠가 어둠에 집어 삼켜지고 말겠지.”

“...이 힘에 대해 알고 있나.”

“알다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느냐. 네가 쓰는 단도와 비슷한 성물을 본 적이 있다. 그 물건의 본래 힘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나를 넘어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언제까지나 네 몸이 버틸 수 있다면 말이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

담담한 어조로 고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한치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에 미끄러지는 손잡이를 굳세게 거머쥐며 자세를 바로잡자 기사단장의 후방에서 조용히 영창을 중얼거리는 로닌이 보였다.

녀석이 시선으로 말했다.

‘주의 좀 끌어줘.’

“....”

나는 눈치껏 키론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화제를 덧붙였다.

“...하나만 묻지. 당신은 왜 우릴 죽이지 않는 거지?”

“그래 주길 원하나?”

“....”

그는 다 알고 있었던 듯 힐끔 로닌을 곁눈질하곤 창대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잠깐의 유흥이라고 해두지. 제단이 완전히 활성화되기까지 아직 조금 남았으니.”

“거짓말. 대체 무슨 꿍꿍이야? 부하가 죽는 걸 보고만 있질 않나, 적에게 조언을 하질 않나... 저번에도 날 일부러 살려보낸 거지? 네놈의 ‘피치 못할 사정’에 그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나.”

“.....”

돌연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키론이 내 눈동자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보법, 가명. 넌 말리에버톤의 제자로군. 맞나?”

“말리에버톤? 그게 누군...”

“말톤을 말하는 거다. 금발 녹안의 엘프. 활 대신 메이스를 쓰는 크누트 길드 금 랭크 모험가 말이다.”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에서 흉흉한 살기를 발산했다.

“...네가 말톤을 어떻게 아는 거지.”

“제자가 아니었나. 하긴 그 녀석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

검 끝이 떨릴 정도로 칼자루를 부여잡으며 노려보자 그가 유유히 대답했다.

“네가 이곳에서 살아나가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

“덧붙이자면, 그 녀석은 이번 일과 아무 관련 없다.”

“당연하지... 말톤이 사교에 물들 리가 없잖아.”

“...좋은 친구를 뒀군.”

키론이 어렴풋한 한숨을 내쉬더니 후련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 창날을 겨누었다.

“계속 시간만 끌다간 늦을 거다. 잠시 후면 의식이 끝난다. 제단에 화염 마석을 설치하고 있는 사내도, 네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두 여인도, 이 지하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도 악신이 강림하면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나를 막아보아라.

“.....”

나는 검을 치켜올렸다.

*

전운이 감돌았다.

자칫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베일 듯 날카로운 정적을 깨트린 건, 호시탐탐 배후에서 기회를 엿보던 로닌이었다.

“파(?)!!!!”

한계까지 응축된 마력이 한손검으로 결집하고, 폭발했다.

수룡처럼 감청색으로 요동치는 물결이 장창을 짊어진 사내에게 쇄도했다.

기사단장은 가벼운 손짓만으로 파도를 분쇄했지만, 흐트러지는 물거품이 그의 시야를 덮었다.

우리에겐 기회였다.

­콰르륵!!!

불씨가 자작하게 타들어가는 지면 위를 주파했다. 그림자를 조종해 급속도로 각력을 높였다. 나는 단도를 역수로 움켜쥐며 증속했고, 붉은 빛기둥이 드리우는 음영 모두에서 내 군세를 불러들였다. 바위 틈, 시쳇더미 사이, 키론의 발밑에서.

­크샤아앗...!

“....”

­콰직!!

기사단장이 부츠를 내리찍어 개미의 머리통을 터트렸지만, 더 많은 수가 들러붙었다. 개미들은 그가 발을 구를 전조를 보이면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해 회피했다.

그림자 군대의 특성을 이용한 전술.

그림자 병단은 그가 방사하는 마력에 잠시를 못 버티고 녹아내렸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청람(?)!!!!”

로닌의 몸에서 차가운 불길이 일었다. 부지불식간에 키론의 턱 아래까지 도달한 녀석이 아밍 소드를 내질렀다. 그의 검은 응집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갔으며, 서늘한 벽안은 고열에 달궈진 프리즘처럼 불가사의한 빛을 뿜어냈다.

­콰지지지지지직!!!!!!

“...이제야 좀 쓸만해 졌군.”

“닥쳐!!!”

응축된 마력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냉기를 머금은 도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청색의 궤적이 생겨나 전장을 수놓았다. 푸른 얼음과 불길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광채는 검게 번들거리는 돌바닥에 반사되어 오묘한 경관을 자아냈다.

나도 그에 지지 않고 검날을 비틀었다.

“전개!!!!”

­콰르르르르르르륵!!!!!

그림자가 내 부름에 답했다. 지각을 뚫고 검은 줄기가 솟구쳤다 허를 찌르기 위해 남겨두었던 비장의 수. 역경 속에서도 단 한 번 내보이지 않았던 비기가 지금 도래했다.

나는 순식간에 지상을 덮어나가는 덩굴을 밟으며 가속했고, 줄기를 발판 삼아 질주하며 평소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각도로 날아들었다.

“제법이군. 아까보단 훨씬 날카로워.”

기사단장이 감탄하며 발치를 옭아맨 덩굴을 잘라냈다. 나는 그의 모든 동작을 시선으로 쫓으며 칼날을 들이밀었다. 앞길을 가로막은 창대를 차올리고 아래로 치밀었다. 두꺼운 가죽 부츠가 내 머리통을 향해 육박했으나, 줄기를 딛고 도약해 회피했다.

손안에 든 검을 미간으로 내던지자 그가 고개를 젖혀 피했다.

검은 도신이 빗나간 방향에는 로닌이 안광을 흘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죽어라 역적!!!”

로닌의 강습. 그가 광장에 푸른 물결을 드리우며 노도의 기세로 검격을 쑤셔 박았다. 굵직한 창대가 그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휘둘러졌지만, 지면에서 솟구친 덩굴이 대신 틀어막았다.

일대를 서서히 잠식해나가기 시작한 청색 오라와 덩굴이 발밑에 살얼음을 형성하고 키론의 사지를 결박했다.

순간 로닌이 지면에서 얼음창을 소환해 기사단장에게 날려보내며 소리쳤다.

“말톤 형!!!”

“....”

스위치.

포지션을 전환하며 빈틈없이 공격을 이어나갔다. 상대의 하단으로 파고들어 직도를 포악하게 휘둘렀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로막으며 버트캡으로 두개골을 찍어왔으나, 내 등 뒤에 들러붙어 있던 개미가 뛰쳐나가 진로를 비틀었다.

나는 그 찰나를 노리고 극한까지 가속하며 칼날을 욱여넣었다.

­파슥!

“호오...”

목을 일격에 벨 생각이었지만, 내 검은 단지 옅은 생채기를 남기는 데 그쳤다.

처음으로 한 방 먹여주었다는 감상을 품기도 전에 꿀렁거리는 넝쿨을 딛고 후퇴하자 곧바로 푸름 섬광이 줄기를 얼리며 들이닥쳤다.

“빙염(?)!!!!!!”

­까자자자자자작!!

로닌의 진로에 선 모든 것이 동결되고, 부서졌다.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가는 아밍 소드가 창대와 맞닿자 접촉면을 기점으로 새하얀 서리가 피어나 키론의 손을 향해 뻗어나갔다.

서리는 키론의 완력에 곧바로 깨져나갔지만,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창파(??)의 악동이라. 과연 제대로 이름값을 할 수 있게 되었군. 죽음의 신의 권능을 다루는 혼혈 악마도 그렇고.. 앞으로가 재밌겠어.”

“무슨 개소리야!!”

“이쯤이면 충분히 뒤를 맡기고 떠날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쿠웅!!

의미심장한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

키론이 창대를 한 번 내려찍자 지면이 움푹 함몰되었다. 그를 중심으로 강력한 파동이 방사형으론 퍼져나갔고, 덩굴과 얼음을 모조리 깨부수며 육박해 우리를 뒤로 날려버렸다.

재빨리 자세를 추스르고 일어나 쳐다보자 어쩐지 조금 다른 분위기의 키론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연하게 선 그를 향해 돌진하려던 찰나, 로닌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주춤하더니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마, 말톤 형 안 돼요!!”

“...왜?”

“형은 저게 안 보여요?!!!”

의아하게 눈썹을 추켜세우자 녀석이 질겁하며 외쳤다.

“광장의 모든 마력이 키론 경에게 몰려들고 있어요!!! 곧 엄청 큰 게 온다고요!!!”

첨예한 날끝으로 흉악한 기류가 괴여들었다. 나는 육안으로 직접 마나의 흐름을 목격할 순 없었지만,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의 전조와 그의 발치를 향해 굴러가는 인간의 살점은 볼 수 있었다.

상공에서는 번뜩거리는 뇌운이 출몰해 시퍼런 창날의 광채를 광장 곳곳에 드리웠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광경.

로닌과 함께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돌풍의 근원지에서 멀어지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젠장!! 저거 막을 방법은 있어?!!”

“모, 몰라요...! 저런 건... 성벽을 통째로 허물고도 남는 기술이라고요!!”

“씨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달렸다. 하지만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마나의 흐름이 질척하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져 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등 뒤에서 존재감을 불리기 시작한 열기가 식은땀을 태웠고, 기압의 변화로 광장 바닥에 널린 이교도 시체의 안구가 터져나갔다.

돌멩이가 뺨을 스쳐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창염(??) 한가운데서 드높게 창을 들어올린 사내와­

­끼르르르르르륵!!!!!!

그의 날끝으로부터 불꽃을 모조리 먹어치우며 탄생한 거대 불사조가 나와 로닌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키론이 우리에게 속삭였다.

“정녕 그대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재목이라면...”

“어디 이것도 한 번 막아 보아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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