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01화 (201/375)

〈 201화 〉 겨울 #1

* * *

[201] 겨울 #1

“으음... 이쪽 봐봐 도란.”

“...또 왜.”

“왜 그러긴, 잘생긴 얼굴 좀 구경하려고 그러지. 여태 이런 걸 투구 안에 꽁꽁 꿍쳐두고 있었어?”

“아니 그야... 너라면 안 그랬겠냐.”

“참... 더한 것도 겪었는데 고작 이런 거 가지고.”

“....”

광장에서 빠져나온 지 하루가 흐른 시점.

지하 통로 구석에 앉아 휴식하던 도중 아리엘이 내 앞머리를 젖히며 미소지었다. 사르르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칼을 스치자 나른함이 몰려든다.

키론이 라디와 아리엘의 위치를 알려 준 뒤, 나는 두 녀석의 안부를 확인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투구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눈물겨운 상봉을 나눈 후,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내 뺨을 매만지는 아리엘을 보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결과적으로 이번 일이 끝나면 얼굴을 보여준다는 약속을 이행한 셈이 됐지만 조금 찝찝함 감이 없잖아 있다. 그야...

“아니... 이참에 좀 물어보자. 너 내가 흑발인 걸 알고 있었다고 했잖아. 대체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아 그거? 꽤 됐을걸? 너랑 한창 자주 만나던 때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알아챘는데.”

“으이구... 그럼 그거 하나 모를 줄 알았어? 맨날 그렇게 투구로 감추고 다니는데. 물어봤더니 너 모험가 사이에서 꽤 유명하더라? 아카이아 길드에 만년 F랭크인 모험가가 한 명 있는데, 성질 더럽고 까칠하고 말투도 독특한데 흑발이라고.”

“....”

“결정적으로 네가 입원했을 때 머리맡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발견했거든. 다른 사제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신경 써주느라 얼마나 곤란했던지... 그것 때문에 치유소에서 너랑 나 사이에 이상한 소문도 돌았어.”

“....”

아니...

길드 가입 당시 범죄 수배지와 인상착의를 대조하는 절차가 있었으니 몇몇 길드원은 내 맨얼굴을 알고 있다. 때문에 아카이아 길드에선 공공연하게 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을 정도고. 그래서 라디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톤하고만 파티를 짰을 정도니.

하지만 그게 아리엘의 귀까지 들어갔을 줄이야.

더군다나 그 사실을 덮어주기 위해 노력해줬다는 건 솔직히 좀 충격이다. 침대 시트도 혹여나 머리칼이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매번 꼼꼼히 확인했는데...

“...그럼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건데? 너 내 얼굴 엄청 궁금해했잖아.”

“바보야... 네가 스스로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려 준 거지. 성급히 말했다간 또 겁쟁이처럼 굴속으로 숨어들 테니까. 그래도 나 은근 눈치 많이 줬다?”

“....”

듣고 보니 몇 번인가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만...

감쪽같이 속여넘겼다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니 근데 그러면 그간 끙끙 앓으며 죄책감을 품을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고 과거를 돌아보고 있자니 그녀가 사근사근하게 머리칼을 넘겨주며 속삭였다.

“미련하게... 그렇게도 내가 못 미더웠어?”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그래, 우리 도란도 마음고생 많이 했네.”

“...제가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요..”

아리엘이 내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라디도 살짝 한숨을 내쉬며 등을 껴안아 왔다.

더없이 소중한 보물을 품에 안은 듯 따스한 표정을 지은 둘을 보자 살짝 낯간지러워졌으나 차라리 지금이 훨씬 낫다.

이교도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들을 만났을 땐 라디와 아리엘 둘 다 많이 울었으니.

두 미소녀의 품에 안겨 간만에 되찾은 여유를 만끽하고 있자니 구석에서 조용히 입을 벌리고 경악하는 노예상인이 보였다.

“...왜.”

“아, 아니... 나으리도 처음 봤을 땐 마냥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모도 있을 줄은 몰라서...”

“뭐.”

“아, 아닙니다..!”

그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 내가 무서운 모양.

하기야 면전에서 그렇게나 사람을 죽여댔는데 그럴 만도 하다.

‘...그땐 좀 까칠하긴 했었지.’

노예 상인과는 광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합류했다.

그가 내 명령대로 바위틈에 숨겨놓았던 배낭과 로브를 찾아놓고 대기해준 덕에 반나체 상태로 라디와 아리엘을 만나러 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지상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식량을 걱정할 일도 한시름 덜었고.

먹을 것도 있겠다, 충분히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도주하지 않은 걸 보면 조금은 신뢰해도 되겠지.

몸을 뒤척여 라디와 아리엘 사이에서 가장 편한 최적의 자세를 찾고 있자니 통로 너머로부터 유독 친근한 개미가 정찰을 마치고 다가왔다.

­크샤아아앗...!

“그래, 별 이상 없었지?”

­크샥!!

녀석이 살갑게 톱니를 문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두통 탓에 무리를 전부 불러 모으는 건 무리지만, 이제 개미 한두 마리 정도면 상시 소환할 수 있다.

격전을 마치고 다시 살짝 줄어든 단검을 매만지고 있자니 개미는 은근슬쩍 아리엘의 발치에 가 자리를 잡았다.

나는 녀석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야, 넌 태생이 악신의 피조물이면서... 아가사 신전 사제는 싫어해야 하는 거 아냐?”

­크샷...?

“...아니다. 그냥 너 맘대로 해라.”

­키킥!!

녀석은 흡족하게 집게를 까닥거렸다.

느긋하게 모닥불을 쬐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이번엔 길을 정찰하러 나섰던 로닌이 양손에 큼지막한 쥐를 덜렁거리며 다가왔다.

“말톤 형! 쥐 잡아 왔어요!! 그것도 두 마리나!!”

“오, 잘했다. 어떻게 잡았어?”

“그냥 창 던지니까 잡히던데요?”

“그래, 너도 와서 좀 쉬어.”

“네에.”

녀석이 불가 근처에 털썩 주저앉더니 허리춤에서 해체용 단검을 뽑아들었다.

질색하며 내 뒤로 피하는 라디를 웃으며 쓰다듬어주자 틋콩이 헛기침하며 다가왔다.

“크흠... 대단하군요 말톤... 아니 도란 씨. 그토록 방정맞고 철없던 로닌을 이렇게까지 바꿔놓을 줄이야. ...대체 비결이 뭡니까?”

비결?

“몰라, 쟤한테 물어봐.”

서투르게나마 쥐고기를 손질하는 로닌을 턱짓했다. 저번엔 비위가 약해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렸으면서 이젠 잘도 만진다. 키론의 죽음을 겪고 한층 성숙해진 걸까?

틋콩이 로닌을 힐끗 바라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닌은... 어려서부터 키론 경과 자주 교우를 쌓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러니까 하이젠베르그 공작님과 친분이 있었다는 모양이에요. 종종 저택에 방문까지 할 정도로...”

“뭐... 대충 그럴 거라 짐작은 했어.”

보통 사이는 아니다 싶었지. 도중에 격한 반응을 보인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어려서부터 선망하던 영웅이 이교도로 변절해 나라를 저버렸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종국엔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는 걸 밝혀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책임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아니 근데... 공작 가문이면 엄청 높은 거 아닌가?’

분명 대귀족이라 불렸던 붉은 매 길드의 수장 아니스도 공작 가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이거 엄청난 인물과 인연을 트게 된 걸지도...

잠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겨있자니 틋콩이 재차 말을 걸었다.

“그리고... 도란 씨, 이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칼을 겨누었던 건...”

“됐어.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했잖아. 끝난 일 괜히 들추지 말자고. 나도 그땐 좀 예민한 상태였고.”

“그러면...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그와 관련해 도란 씨에게 여쭙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뭔데.”

“....”

틋콩이 슬그머니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는 후드를 푹 눌러쓴 라디와 아리엘을 둘러보고 개미에서 시선이 멈추더니 복잡한 얼굴로 운을 뗐다.

“...도란 씨는 최근 메다올리눔 던전을 방문한 적이 있으십니까?”

“메다올리눔? 아, 요 근처에 있는 던전?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기 있다가 왔는데 그건 왜?”

“혹시... 던전 2계층에서 도적 무리와 조우한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

그가 입을 벙긋하려는 찰나, 로닌이 끼어들었다.

“우와...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그거 진짜 도란 형이었어요?! 지금까지 엄청 수소문하면서 찾아다녔는데 진작 여기부터 들릴걸!!”

“뭐 말하는 건데.”

“로닌, 넌 잠시...”

“아니 그때, 도적들이 모험가를 습격하다가 거대한 마물이 튀어나왔잖아요! 그런데 한 남자가 나타나서 집채만 한 멧돼지를 덩굴로 꿰뚫질 않나, 개미 군단을 부려서 두더지를 물어뜯지를 않나... 게다가 마지막 늑대는 대체 어떻게 길들이신 거예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뜻밖의 화제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곧 그의 말에서 맹렬한 위화감을 발견했다.

그야 내가 단도의 능력을 처음 깨달은 건 도적단과 조우하고 한참 뒤, 울시와 함께 7계층을 빠져나가던 도중이었으니까.

최초로 발현한 건 스노우 타이거와 전투를 치르던 도중이었고.

즉, 로닌이 말한 시점에서 내가 능력을 구사했다는 건 앞뒤가 맞질 않는데...

그의 발언을 단순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좀 묘하다. 앞서 말한 세 마물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고, 난 도중부터 정신을 잃어 기억이 없으니.

의식을 되찾았을 땐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톤, 아니 도란 형이 거대 늑대의 무지막지한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았잖아요! 엄청난 접전이었는데 나중엔 형이 밀려가지고... 전 그때 형이 꼼짝없이 잡아먹힐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늑대가 친근하게 코를 문대고 사라졌...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형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혹시 기억 안 나요?”

“....”

라디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녀도 난처하게 고개를 저을 뿐. 녀석은 일찍이 멧돼지에게 들이박혀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니까.

나도 그 뒤의 기억은 없다.

깨어났을 땐 말톤이 내 몸에 포션을 끼얹고 있었다.

“.....”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틋콩이 로닌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그때는 도란 씨가 영락없이 인간으로 의태한 고대 마물인 줄 알았지만... 키론 경이 당신의 능력을 옛 신의 권능이라 일컬었더군요. 혹시 도란 씨는 안디라 신에게 축복을 받으신 겁니까?”

“.....”

공기가 첨예하게 날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글쎄.”

“...도란 씨도 아시겠지만, 저희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의 축복을 받은 것이 맞다면 예삿일이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신 중 한 분의 유일한 권속이 되신 거니까요. 이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메다올리눔 던전에서 일어난 일은 몇 명이나 알고 있지?”

“저희를 포함한 아주 극소수 인원만 해당 정보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도란 씨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물어.”

­슈화악!!

일순간­

개미가 쏜살같이 달려가 틋콩을 덮쳤다. 라디는 즉각 쇠뇌를 겨누었고, 아리엘은 손바닥에 서늘한 빛무리를 피어올렸다.

로닌은 나와 틋콩 사이에서 어쩌지도 못한 채 당황했다.

개미가 집게로 목을 절단하기 직전에 멈춰세우고 무심하게 손톱을 들여다보자 틋콩이 식은땀을 흘리며 내뱉었다.

“저, 절대로 도란 씨와 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겁니다...!”

“....”

천천히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상부에는 어떻게 보고할 셈이지.”

“...보류하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개미를 물리자 그가 목을 매만지며 숨을 토해냈다.

로닌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나는 모닥불에 땔감을 던져넣으며 물었다.

“아니 근데... 로닌, 넌 어떻게 안 거야?”

“저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도적단을 이끈 한 남자를 추적하고 있었...”

“...로닌.”

“에이 뭐 어때요. 틋콩님도 융통성이 없으니까 방금 같은 사달이 나는 거예요. 무언가를 물으려면 일방적으로 캐내지 말고 일단 서로의 신뢰를 다져놓고 들어가야지 않겠어요?”

“...설마 살면서 너한테 충고를 듣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틋콩이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닌의 일침이 제법 얼얼했던 모양.

...한데 조금 걸리는 내용이 있다.

“로닌, 혹시 너희가 찾던 그 남자 머리가 붉은색이야?”

“어... 맞는데요?”

“...귀족처럼 곱상한 얼굴에 세검을 쓰고, 허리춤에는 칼집 없는 톱날 단검이 매달려 있고. 맞아?”

“헐... 말톤 형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

어떻게 모를까.

라디를 위험에 처하고 말톤에게 커다란 화상을 안겨주었던 원흉인데.

이후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건질 만한 내용은 없었다.

*

하염없이 지하를 전전하던 도중, 불현듯 저만치 통로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는 너나 할 것 없이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끝이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통로를 헤집고 나온 우리가 마주한 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이곳은... 고동 나무가 있는 걸 보니 베라스틴 동쪽 숲인가 본데?”

고즈넉하게 기울어가는 저녁노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고요한 겨울 숲의 풍경.

비록 언데드의 여파 탓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며칠 동안 지하에서만 생활하며 침침한 공기와 생기 없는 단색에 적응된 우리로서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홀쭉한 나뭇가지를 매만지며 서 있자니 틋콩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니... 유독 동쪽 숲에 언데드 출현 빈도가 높았다는 정보가 있었죠. 왜 그런가 했더니 이 통로 때문에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러게... 마저 걷죠. 너무 늦으면 성문을 닫아버릴 테니까. 한겨울이라 야영하기도 마땅치 않고.”

“그러게요... 빨리 쉬고 싶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왕도로 가는 마차도 수배해놔야 하는데.”

바위로 절묘하게 은닉된 비밀통로를 뒤로 한 채 숲속을 나아갔다. 모험가들이 자주 왕래하며 형성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중간중간 스켈레톤이 덤벼들었으나 로닌이 선두에 나서서 처리했다.

더는 필요가 없어진 개미를 그림자 속으로 물리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자 우리는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성문에 도착했다.

작별의 때가 다가오자 틋콩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란 씨.”

“그래, 이번 일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 이곳 영주랑 대화를 해 봐야겠지만, 키론 경이 물의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소란이 날 테니 대외에는 비밀로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란 씨의 활약상은 똑바로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기왕이면 보상 좀 많이 얹어달라고 해. 내 능력에 대한 건 알아서 적당히 조율해주고. 알겠지?”

“이런 건 우리 전문이니까 걱정 마 형! 그럼 저도 가볼게요! 키론 경의 유언을 집행하려면 서둘러야 하거든요.”

“유언?”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녀석이 묘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시에 기부하겠다더라고요. 이번 언데드 사태로 피해를 본 시민들에게 배상하고 도시 재건에 보태 달라고... 도란 형하고 형 애인한테도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러냐? 그럼 빨리 가라.”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나중에 왕도에 놀러 오면 연락해요!!!”

틋콩과 로닌을 배웅하고 나자 뒤에서 눈치를 보던 노예 상인도 다가와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으리...!”

“어, 그래. 남쪽 거리에서 장사하고 있다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추후에 저희 가게에 방문하시면 언제든지 융숭한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명함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제가 지금 수중에 아무것도 없어서...”

“됐어. 다음번에 한 번 구경이나 하러 갈 테니까 조심히 들어가. 기껏 구해놨는데 다음에 또 엄한 일에 휘말리지 말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리!! 그럼 안녕히...”

남자가 잰걸음으로 사라지자마자 라디가 내 팔을 꼬옥 껴안아왔다.

“드디어 저희만 남았네요. 이게 얼마 만인지...”

“고생했지?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우리도 빨리 돌아가서 쉬자.”

지하 통로를 빠져나오던 이틀간 라디와 아리엘은 어지간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틋콩과 로닌이 있었던 탓이리라. 수사관의 눈에 띄어봤자 득보단 실이 많으니까.

나랑 관련된 인물이라 주목을 안 받을 순 없겠지만은...

라디의 귀를 살살 어루만지며 걷자 아리엘이 은근슬쩍 내 옷소매를 붙들었다.

“왜?”

“그냥 좀... 안 돼?”

“...마음대로 해.”

잔잔한 여운을 즐기며 가도를 거닐었다. 익숙한 건물과 익숙한 표지판을 보자 비로소 돌아왔다는 실감이 든다.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손님을 끌어모으는 노점,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따스한 불빛과 식기 소리는 오랜 향취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등불을 들고 대로를 통행하는 사람들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그래도 아직 사람이 꽤 남아있네... 갔다 오면 다 떠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번 정착한 곳을 떠나서 살기는 쉽지 않으니까... 앞으로 조금만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북적거리지 않을까? 언데드도 자연히 사그라들 테고 영주도 구제 정책을 펼칠 테니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도를 따라 쭉 나아가다 보니 도심지 내부에서도 가로수가 모여있는 장소가 나왔다. 우리는 도란도란 소박한 담소를 나누며 앙상한 단풍 아래를 거닐었고, 머잖아 정겨운 철창과 맞닥뜨렸다.

아리엘이 옹이구멍 안에 숨겨두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찰나, 라디가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 도란님, 어디 가세요?”

“응, 둘이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난... 조금 만나봐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녀올게.”

“이런 시간에요...? 지금은 모험가 길드도 문을 닫았을 텐데...”

“음... 길드는 아니고... 나한테 지도를 줬다던 지하수로 관리인 기억하지? 그 사람하고 할 말이 있어.”

“으음... 같이 가드려요?”

“아냐, 혼자서도 충분해.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

라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도중에 멈춰서더니 뚜박뚜박 걸어와 내 어깨로 팔을 뻗었다.

“왜?”

“가방 주세요. 무겁잖아요.”

“아 그래, 그냥 현관에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두면 고맙...”

­화악!

갑자기 라디가 내 옷깃을 잡아끌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밤, 방문 열어둘 테니 빨리 오셔야 해요?”

“.....”

“대답.”

“....”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새빨간데 도란?”

“...넌 몰라도 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