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겨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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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겨울 #3
문제가 발생했다.
펄럭.
“.....”
휘이이이잉... 펄럭.
“....”
휘이이잉...! 펄럭펄럭펄럭!!!
“에잉 쯧... 못 해 먹겠네.”
툭.
손안에 든 낚싯대를 내려놓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눈 위를 구르며 날아가는 낚싯대를 붙잡았다.
‘오랜만에 물고기나 좀 잡아보나 했는데...’
해가 저물 무렵이 되자 폭설을 동반한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물고기야 낚싯줄을 드리우는 족족 잡힌다지만 이렇게 바람이 불어서야 도저히 밖에서 버틸 수가 없다.
얼음 구멍도 자꾸만 막히는 바람에 수시로 뚫어줘야 했고.
“안 되겠다. 내일 날씨가 좀 맑아지면 하든가 해야지...”
잡은 생선을 대충 눈 위에 던져놓은 뒤 낚싯대를 거두어들였다. 천을 젖히고 텐트 안으로 들어서자 누에고치처럼 나란히 침낭에 잡아먹혀 독서 삼매경에 빠진 두 녀석이 보였다.
아리엘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왔어 도란? 춥겠다. 들어와서 몸 좀 녹여.”
“그래? 그럼 사양 않고.”
눈에 흠뻑 젖은 로브를 구석 빗물받이 위에 걸어둔 뒤, 그녀가 들어 올린 침낭 사이로 파고들자 라디가 화들짝 놀라며 꼬리털을 쭈뼛 세웠다.
“꺄악! 도, 도란님?!!”
“왜 그래?”
“차, 차가워욧..! 자, 잠깐만...!!”
“히히... 종일 편하게 있었지? 얼음 맛 좀 봐라!!”
“오, 옷 젖는다구요!! 차가워!!!”
바지 밑단에 낀 살얼음을 조금 떼어내 품속에 넣어주니 라디가 격하게 기뻐했다.
슬그머니 아리엘도 쳐다보았지만 녀석은 아연실색하며 물러났기에 관뒀다.
대신 그녀는 배낭을 뒤져 얇은 면을 여럿 엮어 만든 수건을 꺼내더니 내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정말... 이렇게 젖을 거면 진작 들어오지. 왜 미련하게 계속 밖에 있었어.. 추웠겠다.”
“...그냥 왠지 오기가 생겨서.”
대어를 낚아서 놀래켜줄 심산이었다고 말하긴 좀 부끄러우니까.
한데 아리엘에게 몸을 맡기던 도중, 나는 어느덧 손길이 멎은 걸 눈치챘다.
고개를 돌리자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아쿠아마린색 벽안이 보였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녀는 어렴풋한 미소를 자아내고는 수건으로 내 눈가를 덮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태도에 의문을 표하려는 찰나, 라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으... 축축해졌잖아요. 갈아입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미안 미안, 혹시 여분 안 챙겼어?”
“당연히 가져오긴 했죠. 근데... 언니, 도란님 눈 좀 가려주실 수 있어요?”
“응, 알았어.”
아리엘이 수건으로 내 눈을 덮자 시야가 캄캄해졌다.
아니 대체 왜.
목소리에서 미련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왜 못 보게 하는 거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새삼스럽다니...! 장난친 벌이에요! 그리고 밖에선 조금 자중할 줄도 아세요!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천 너머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을 들치고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슬그머니 팔을 올리자 안 된다는 아리엘의 답변이 돌아왔다.
라디가 옷을 다 갈아입자 컵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정말... 언니도 조심하세요. 도란님도 겉모습만 멀쩡하지 알맹이는 무슨 중년 아저씨처럼 엄청 밝힌다니까요? 이전에는 대체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하긴... 가끔 눈빛이 음흉할 때가 있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치료원에 신세를 질 때도 요주의 인물이었어. 맨날 다 찌그러진 투구를 쓰고 다니는데 근처를 지날 때면 늘 엉큼한 시선이 느껴져서...”
“그렇다니깐요... 게다가 한번은 던전 7계층에서 탈출하던 도중 며칠간 설동에 꼼짝없이 머물러야 할 때가 있었는데.. 절 가둬놓은 채로 밤낮 안 가리고...”
“야! 그건 네가 먼저 유혹한 거잖아!!”
재빨리 반박하자 라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녀석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래도... 정말로 저지를 줄은 몰랐...”
“모르긴 뭘 몰라! 은근슬쩍 로브까지 들추면서 교태스러운 목소리로 ‘어떡하죠...? 이대로라면 도란님이랑 단둘이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라고 했잖아!!”
“아...! 아아!!!”
라디가 찻잔과 주전자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떼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한 번은 또 무슨 크림 같은 걸 가져다 내 손에 쥐여주면서 안쪽까지 구석구석...”
“아아아아아아!!!!! 드, 듣지 마세요!!”
“응... 라디도 은근히 밝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아리엘은 가뿐하게 흘려넘기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은 저택에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을 테니까.
그녀의 미소를 본 라디의 몸부림이 한층 더 거세졌으나 꼬리를 쭈욱 잡아당기자 저항을 멈추고 내 무릎 위에 고꾸라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바빠서 못했지?”
“자, 잠깐..! 어, 언니 앞인데...!”
라디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단묘종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꼬리를 살살 어루만지자 허리가 바이올린 현처럼 튕겨올랐고, 말없이 숨을 들이켜며 내 허벅지를 꽈악 움켜쥐었다.
몇 번 주무르지도 않았는데 라디는 숨을 헐떡거리며 눅진눅진하게 늘어졌다.
한결 조용해진 녀석을 침낭 위에 누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리엘이 내게 찻잔을 내밀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를 보니 비로소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녀가 살짝 힐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심했어.”
“그런가... 미안해, 대놓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앞으론 자중할게.”
“아니 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리엘이 복잡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였다.
눈보라 치는 밤, 잔잔하게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서 카모마일 향 홍차를 음미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자니 그녀가 자리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배는 안 고파 도란? 먼저 먹으라 해서 나랑 라디는 일단 대충 때우긴 했는데...”
“글쎄... 원래는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해 먹을까 했는데.. 바람이 이렇게 불면 불도 못 피우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아침에 먹을게. 둘은 언제 잘 거야?”
“우리도 도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 같이 자자. 내일은 숲에 가본다고 했지?”
“그래, 내일 안 피곤하려면 일찍 잠들어야지. 라디야 너도 괜찮겠어?”
“아.. 네...? 그, 그렇죠?”
아직 눈이 풀린 채 간헐적으로 꼬리를 움찔거리는 라디를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양치를 마치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라디와 아리엘을 확인하고 불을 끄자 텐트 안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그녀들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구석으로 향하던 중, 자그마한 손이 내 팔목을 붙들었다.
“...도란님 자리는 여기에요..”
“뭐? 난 귀퉁이에서 따로...”
“괜찮아. 추우니까 붙어서 자자.”
“아니... 라디라면 몰라도 넌...”
“뭐 어때. 지금까지 줄곧 같이 야영해왔으면서. 난 괜찮으니까 빨리 누워. 춥잖아.”
아리엘이 침낭을 젖히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핬다. 다만 어조에서 묘한 압력이 느껴졌으며, 둘 사이 간 팽팽한 단결력이 느껴지는 거로 보아 모종의 담합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세에 휩쓸려 텐트 중앙에 눕자 라디가 곧바로 들러붙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예전 생각이 나네요. 던전에 있을 땐 이렇게 밖에서 야영하는 게 당연했는데.”
“그러게... 가끔 말톤이 불침번을 서느라 둘만 남으면 분위기가 묘해지고 그랬지. 살짝 가까이 붙어도 보고, 은근슬쩍 손도 잡아 보고...”
“그러게요... 말톤 님도 알고 계셨을까요?”
“조금은 눈치채지 않았을까? 애초에 그럴 심산으로 소개해준 거였다고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라디가 추억을 회상하며 웃었다. 천막 밖에서 비쳐오는 흐릿한 달빛을 반사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존재감을 내뿜는 푸른 눈동자.
나는 녀석의 귀를 살짝 쭈물거려 준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등 뒤에서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기에.
아리엘이 슬그머니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근데... 나도 이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뭔데?”
“도란은 먼 곳에서 왔다고 했잖아. 거기는 어떤 곳이었어?”
“어떤... 곳이라니?”
“그냥 주변 환경이나... 가족 같은 거. 도란의 고향에는 마법도 몬스터도 없었다고 했잖아. 그러면 사는 방식도 완전히 다를 텐데... 궁금해서.”
“....”
그러고 보니 출신을 밝히긴 했지만 그 외에 자세한 정보를 말해주진 않았다. 구태여 꺼내서 좋을 것도 없고, 스스로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에 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피해왔으니.
꾸욱...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궁금한 건 라디도 마찬가지였는지 손아귀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나는 녀석의 손등을 쓸어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음... 막상 다른 세계라고는 해도 별거 없어.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비슷한 동식물도 제법 많고, 먹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고..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막 위험하고 그러지는 않았어? 마법이 없으면...”
“음... 별로? 내가 살던 곳은 치안이 좋아서... 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다른 건 다 평범했는데 아버지가 좀 특이했어. 고고학자셨는데 병적으로 모험을 즐기셨거든. 때문에 나도 덩달아 험난한 오지에 틀어박혀서 몇 주씩 지내다 오곤 했지.”
“하기야... 저번에 함께 조난을 당했을 때도 굉장히 침착했었죠... 썰매를 뚝딱 만들어내지 않나, 설피를 만들어 신을 생각을 하지를 않나...”
“그래, 그것도 다 아버지랑 돌아다니면서 배운 거야. 아마 그때 익혀둔 지식이 없었더라면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일주일도 못 버티고 죽었을걸? 한때는 나한테 이런 상황이 닥치리라는 걸 미리 예견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니까.”
““......””
돌연 말소리가 뚝 멎었다.
묘한 정적이 흐르고, 양옆에서 눈빛을 교환하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라디가 총대를 메고 물었다.
“저 도란님...”
“왜.”
“그... 아버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내 아버지...?”
나는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괴상하긴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가정적이고, 불우한 사람이 있으면 나서서 도울 줄도 알고... 다만 단점이 모든 장점을 씹어먹어서 그렇지. 내가 열두 살 무렵이었던가, 나침반이랑 주머니칼 하나만 툭 던져주고 혼자서 정글을 헤쳐나오라고 시킨 적이 있었어. 밀물이 밀려드는 갯벌에 머리만 내놓고 파묻은 뒤 알아서 빠져나오라고 한 적도 있었고.”
“.....”
“그게 다면 말도 안 해. 남자는 강하게 커야 한다면서 무인도에 가둬놓고 일주일 내내 보트에서 구경만 한 적도 있었지. 껄껄 웃으면서 보란 듯이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땐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그때 살아남으려고 안 먹어본 생물이 더 드물 거야. 온갖 독초부터 개미, 전갈, 지네, 노래기 등등...”
“그거 혹시...”
“응?”
“아, 아냐...!”
아리엘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라디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 혹시 아버님에게 별난 특징이 있지는 않았나요...? 뿔이 있다거나 날개가 달렸다거나...”
“그럴 리가, 내가 있던 곳에는 인간밖에 없었어.”
한때는 아버지의 정체가 도깨비나 괴물이 아닐까도 생각했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 말은 즉 내 몸에도 괴물의 피가 흐른다는 뜻이니까. 그랬다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지.
어릴 적 과거를 떠올리자 문뜩 집이 그리워졌다.
천천히 눈을 감아 망념을 지우자 라디가 살짝 격양된 어조로 물어왔다.
“그, 그럼...! 어,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엄마? 그냥 평범하게 좋으신 분이었어. 특징이라면... 인기가 엄청 많았다는 점 정도? 얼굴이 되게 예뻤거든. 나한테 여동생 있었다는 거 기억하지? 걔도 엄마를 닮아서 밖에 나가기만 하면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쇼핑이라도 하는 날엔 자매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
“슬슬 피곤하다.. 난 먼저 잘게, 다들 잘 자.”
수마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고, 의식이 점점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라디와 아리엘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봤으나 내가 그 사실을 알 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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