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겨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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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겨울 #4
이른 새벽.
“으으... 추워...”
푹신한 감촉에 휩싸여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다. 고요한 암흑 속 달금한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몸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저항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 내 팔을 끌어안고 잠든 두 소녀가 보였다.
“.....”
나는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일어나 흘러내린 침낭을 끌어올려 주었다. 잿빛 머리칼을 상냥하게 쓸어내리니 라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까?
아무리 사낭 쥐 수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직접 이 녀석을 본다면 누구나 끔뻑 반해버리지 않을까? 아무리 후드로 감추려고 노력해도 거리를 거닐다 보면 곧잘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들 정도였으니까.
더없는 행복감을 만끽하며 텐트 밖으로 발을 옮기자 그곳엔 검푸른 세상이 도래했다.
“...장관이네.”
마치 해수면 중심에 선 것만 같다.
나는 부츠 끈을 동여매고 푸른 지평선 위를 거닐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는 멎었으나 바람을 타고 온 함박눈이 잔뜩 쌓였다.
뽀득뽀득. 겹겹이 포개어진 하얀 눈꽃이 흡음재 역할을 해 누리를 단잠에 빠트렸으며, 그 위에 드리워진 은은한 달빛은 늑대의 털가죽을 연상케 했다.
“...내가 이 풍경을 지켜냈다는 거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새하얀 입김 사이로 비치는 별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노라니 눈에 뒤덮인 장작더미 아래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나는 더듬이가 얼어붙어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개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춥지도 않냐?”
크샥?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애교스럽게 내 발치를 문댔다. 시종일관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니 없던 정도 생길 노릇.
“알았어 인마. 혹시 밤중에 근처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지?”
키킥!!
“그래, 계속 감시 부탁할게.”
개미가 자신만만하게 더듬이를 끄덕였다. 녀석은 이래서 편리하다. 잘 때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건 모험가의 로망과도 같으니.
식탐이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냅두면 알아서 사냥하기도 하니 크게 불편할 것도 없고.
‘조만간 이름이나 붙여 줄까...’
고요한 설경을 감상하며 얼어붙은 호숫가를 산보하고 돌아오니 천막 틈새로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을 젖히고 텐트 안으로 들어서자 비몽사몽하는 아리엘이 보였다.
“뭐야... 일어났어?”
“응... 어디 갔었어 도란..?”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빨리 다시 자.”
“우음... 괜찮아..”
아리엘이 눈가를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천천히 침낭에서 빠져나와 단아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는 라디에게 코트를 입혀주었다.
“뭐야, 어디 가게?”
“참... 숙녀한테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
그녀가 라디의 손을 붙잡고 천막을 나서자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
화장실이었나.
“...기다리는 동안 잠자리나 정리하고 있을까.”
곧 동이 틀 테니 다시 잠들기도 애매하다.
한데 막 침낭을 접고자 텐트 구석으로 눈을 돌린 순간 거뭇거뭇한 형체가 눈에 띄었다. 비싸서 평소엔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물건. 라디와 아리엘이 나들이 중 읽으려고 저택 서고에서 가져온 서적이다.
홀린 듯이 한 장서를 주워들자 두꺼운 양장본 표지에 적힌 타이틀이 보였다.
‘마물 백과사전...?’
썩 흥미로운 제목에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자 쪽 전체에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골라잡은 책에는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몬스터의 외형과 서식지, 생태학적 지위와 신체 특징 등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고, 사냥법 또한 명시되어 있었다.
독해에 약한 모험가층을 고려한 건지 쉬운 어휘로 쓰여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익숙한 마물이 드문드문 엿보였다.
“어디 보자... 툼바라 센티피트? 단백질을 응고시키는 지네라... 이게 저번에 라디가 미라한테 썼던 독충이구나... 숲 고블린도 있고, 데스웜, 네눈박이 늑대에.. 정령... 잠깐, 정령?”
정령도 몬스터였나?
나는 호롱불에 페이지를 비춰가며 글귀를 읽어내렸다.
마나를 원천으로 살아가는 존재.
자연계의 원소와 마력이 한데 모여 태어나는 종족.
주위 환경과 마력의 종류에 따라 탄생 시 종류가 결정된다. 크기와 외형은 속성별로 판이하다.
지능이 매우 뛰어나 간혹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있으며, 고위 개체일수록 자아가 뚜렷해 성격 또한 다채로워진다.
마나가 풍부한 곳이면 어디든 서식할 수 있으나 자연이 온전하게 보존된 장소에서 유독 자주 발견된다. 심지어 용암 분화구 안이나 선창 하부에 들러붙은 따개비 사이에서도 목격된 바 있다.
개체 수가 몹시 적고, 주로 험준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탓에 정령의 생태에 대해서는 밝혀진 정보가 극히 희박하다.
한 개체를 적대하면 모든 정령을 적대해야 하니 절대로 선공하지 말 것.
위험도 분류 F급 ~ SSS급.
“.....”
자세한 설명 덕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SSS급...?’
정령이 그렇게나 강한 종족이었던가?
수명이 길고 성장 한계가 없어 고위 정령쯤 되면 확실히 강하긴 할 테지만 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다. 게다가 위험도 분류가 F에서 시작된다니. 편차가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그 외에도 속성별로 다양한 정령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발소리가 들려와 책장을 덮었다.
“어 도란, 안 자고 있었어?”
“응, 찬바람 한 번 쐬고 오니 개운해졌네. 너희는?”
“우리도 그래. 밖에 날씨도 좀 풀렸던데 같이 산책하러 안 갈래?”
“그래, 같이 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캄캄했지만, 그새 동이 텄는지 어슴푸레한 여명이 호숫가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에 잘게 조각나 부서지는 가루눈을 맞으니 코가 시큰거렸다.
라디가 목도리를 둘러줘 나는 눈웃음으로 화답하고 함께 발을 옮겼다.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인 숲속으로.
산림에 접어들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눈 덮인 침엽수림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주위를 둘러보며, 우리는 높게 솟은 소나무 사이에 파묻혔다.
다채로운 상록수와 하늘로 뻗어나간 나뭇가지가 정결한 조화를 이뤘고, 이끼를 감싼 눈은 새하얀 융단이 되어 발치를 덮었다.
새벽녘 이슬이 맺혀 반짝이는 거미줄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겨울 숲은 아름다웠다.
“멋있다...”
“....”
그건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어쩐지 이 정경을 보자 나는 내 고향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리운 고향에서 봤던 그리운 경치가.
다만, 이제는 이 세계도 썩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나는 아리엘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겼다. 또 라디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경치를 감상하며 걷기를 잠시. 어느 순간 라디의 입술에서 눈송이가 흩날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시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보러 갈까?”
“네...?”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이자 하얀 세상이 담겼다. 대답을 들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녀석의 연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도 보고 싶어. 울시. 다음번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 다녀오자. 붉은 매 길드원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기회가 되면 유적에 들려서 메라랑 해일이도 보고 오고. 어때?”
“....”
초겨울 수선화가 무안하도록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오후.
“푸엣취!!!”
““.....””
“푸헹!!”
“...그러게 누가 속옷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래.”
“그, 그치만... 이 정도 추위는.. 킁..!! 7계층에 비하면 아무것도... 푸엣취!!”
“잘나셨어요 아주... 완전히 자업자득이에요 도란님.”
“...크흑.”
몸살에 걸렸다.
아무래도 전날 밤새 눈폭풍에 맞서며 낚시에 몰두했던 게 원흉인 모양.
어쩌면 소나무의 정기를 느끼겠다며 개미와 함께 속옷 차림으로 숲속을 뛰댕겼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고.
해가 완전히 떴을 즈음부터 슬슬 아파오기 시작해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겁다.
번데기처럼 겹겹이 옷을 껴입은 채 앓아눕고 있자니 아리엘이 열을 재며 말했다.
“도란... 지금이라도 집에 갈래...? 짐은 나랑 라디가 나눠 들면 되니까...”
“아냐 괜찮아.. 기껏 나왔는데. 그리고 이런 건 그냥 한숨 자면 나아.”
“그래도...”
“별일 아니니까.. 걱정 마! 난 원래 아파도 금방 낫는 체질이라... 콜록!!”
“....”
라디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저희는 계속 곁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말해줘야 해요? 괜스레 오기 부리지 마시고...”
“그래.”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고자 했지만 영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디는 그런 내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손을 맞잡아주었고, 나는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두 녀석이 텐트 밖으로 나선 뒤로는 쓸쓸한 침묵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아리엘에게 치유해달라고 부탁했겠지만, 그녀의 능력도 마냥 만능은 아니다. 결손된 세포를 재생하는 것과 인체로 들어온 병균을 제거하는 건 엄연히 다른 분야니까.
그렇게 몸져누운 채 쓸쓸하게 시간을 보내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나간 거 아니었어?”
“저요? 아... 전 잠깐 모닥불 지피는 것 좀 도와주러 다녀온 거예요.”
“빨리 나가. 옮겠다.”
“괜찮아요. 저는 웬만한 감기에는 안 걸리거든요.”
“콜록..! 어떻게...?”
“으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사낭 쥐 수인이 대전쟁 때 마족의 편에 섰다는 건 알죠...? 그래서 제 선조들은 도시에서 추방된 뒤로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해요. 시궁쥐란 표현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럼 혹시...”
“네, 그 덕분에 어지간한 병균에는 면역을 갖게 되었어요. 독에 저항이 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워낙 유독한 환경에 적응한 것도 있고, 다른 수인에 비하면 특출난 구석이 없으니 방어수단으로 맹독을 이용하다 자연스레 저항력을 갖추게 된 거예요.”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
기구한 사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라디가 내 품속으로 쏘옥 파고들었다.
“그.래.서. 도란님이 나을 때까지 번갈아 가면서 간호하기로 했어요. 언니도 마력을 쓸 줄 아니까 어느 바보처럼 나체로 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리지는 않거든요.”
“....”
평소 같았으면 뭐라고 반박이라도 했을 텐데 이번엔 대꾸할 여력도 없다.
대신 살짝 괘씸한 마음을 담아 궁둥이로 손을 뻗자 녀석이 황당한 듯 입을 벌렸다.
“아니... 방금까지 대꾸하는 것도 힘들어했으면서... 이럴 여력은 있어요?”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충분하다잖아. 우리 라디가 원체 매력적이어야지.”
“.....”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자 라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다정한 음색으로 말했다.
“정말... 전투할 땐 그렇게 듬직하면서도 둘만 있으면 이렇게 응석꾸러기가 되어버리니... 제가 그렇게 좋아요? 사낭 쥐 수인인데도?”
“응.”
“....”
현답이었는지, 라디가 조금 더 밀착해왔다.
나는 그녀의 체온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녀석은 온화한 손길로 내 흑발을 쓰다듬다가 문뜩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 나들이가 끝나면 도란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다니? 계획 말이야?”
“네. 겨울 동안은 휴식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음부턴 다시 모험가 업무로 복귀해야죠. 이번 언데드 사건도 완전히 종결된 건 아니고요.”
“....”
나는 살며시 고개를 떼며 대답했다.
“글쎄... 일단 영주도 바쁠 테니 당장 보상을 받기도 그렇고... 조만간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텐데 그전에 찾아가기도 좀 그렇잖아.”
“네, 당장 금전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성급해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아직 못 가본 장소가 많으니까 그런 곳에서 두루두루 경험을 쌓자. 저번에 왕도도 가자고 말만 꺼내놓고 못 가봤으니까. 울시도 한 번 보고.”
“네, 어쩌면 바닷가에 한 번쯤 가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래.”
던전에서 크게 한몫한 덕에 돈은 충분하다지만, 내 궁극의 목표는 풍족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번 이교도 사태를 비롯해 불합리한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그랬기에 일찍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선 무력이 전부라는 걸.
던전에서 조우했던 도적단의 리더, S랭크 수인 카야, 붉은 매 길드 전투원, 그 외 널리고 널린 강자들.
이중 누구 한 명이라도 우리에게 앙심을 품으면 지금 이 시간도 해변가의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성채만 한 몬스터가 나타나 모든 걸 짓밟아버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만큼 내가 가꾸어낸 행복은 폭풍 앞의 오두막처럼 위태위태하다.
그렇기에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려면 강한 무력이 필요하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힘이.
“...도란님, 괜찮아요? 표정이 험악해지셨는데...”
“.....”
나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게 당면한 숙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 얽힌 비밀. 어째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왜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서 날 알아보는 존재가 있고, 낯익은 유적이 발견되는지 또한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내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직감이 든다.
하지만 그 전에ㅡ
“읏...?!”
“...누가 겁도 없이 혼자 기어들어 오래.”
“자, 잠깐..!! 밖에 언니가...! 하읏...”
“쉿... 살살 할 테니까 조용히 해. 알았지?”
“....”
끄덕.
나는 라디를 침낭 속으로 끌어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