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겨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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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겨울 #5
들켰다.
화끈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자니 정면에 앉은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 도란.”
“죄송합니다.”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나도 좀 민망한데.”
“잘못했습니다.”
“라디야...?”
“...미안해요 언니.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아니.. 내가 왈가왈부할 처지도 아니고 딱히 미안해 할 것까지는 아닌데...”
묘한 공기가 오갔다. 나는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라디도 라디 나름이지만, 특히나 아리엘을 마주 볼 면목이 없다. 그야...
“도란... 몸살에 걸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건강한가 보네?”
“.....”
그녀가 옆에 놓인 나들이옷을 들어올리자 큼지막한 얼룩이 보였다.
“....”
나도 안다.
하, 하지만 어쩌라고...!
그... 남자에겐 가끔 행위를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배덕감이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사정감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아리엘이 천막을 젖히고 들어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에 닿는 걸 아무거나 주워들어 가렸다.
하필이면 그 장소에 녀석의 의복이 있었고.
“...원래 이렇게 흥건하게 나오는 건가...?”
“....”
아리엘이 입술을 짚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 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세계인지라 그녀가 알 턱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외로 녀석이... 어? 어?!!
“뭐, 뭐해!!!”
황급히 아리엘의 손에서 옷가지를 낚아채자 하늘빛 눈동자가 토끼 눈처럼 동그래졌다.
이내 갸름하게 좁혀들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 치마야. 돌려줘.”
“아, 안 돼.”
“왜.”
“왜냐니... 그러면 또...”
“그럼 안 돼?”
“어...?”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오히려 내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팔을 내밀며 당당히 요구했다.
“나는 내 옷 냄새도 못 맡아? 내 치마에 싸..지른 건 도란 너잖아. 아주 축축할 정도로 떡칠을 해 놓았...”
“그, 그만...!!”
“왜, 부끄러워? 그러면서 잘도...”
“잘못했습니다!!!!”
입이 열 개로도 모자라다.
하다못해 상황이 다 끝난 뒤였다면 모를까 벌떡벌떡하는 순간을 보여버렸으니.
라디는 순전히 내게 말려든 입장이었지만, 녀석도 차마 아리엘을 볼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다리가 저려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앉으며 간청했다.
“저... 아리엘 사제님... 이 피복은 부디 제가 세탁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 미천한 소인에게 맡겨주신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빨아오겠습니다.”
“싫어. 또 어떤 짓을 할 줄 알고.”
“그, 그... 이번 일은 정말 특별한 경우로써... 두 번 다신 이런 실책을 범하지 않을 테니 부디...”
“.....”
아리엘이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보다가 돌연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너 이거 어떻게 세탁해야 하는지는 알아? 희귀 누에의 고치로 만든 원단이라 구하기도 어렵단 말야. 참고로 금화 두 닢이야.”
“뭐, 뭣...?! 뭔 천 쪼가리 하나가 그렇게 비싸!!”
그 돈이면 꼬치구이를 원 없이 먹고도 남겠다!!!
“이리 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입을 떡 벌리며 쳐다보자 그녀가 내 손안에 든 치마를 낚아채갔다.
아리엘은 액체가 손가락에 묻지 않도록 신중하게 옷을 접더니 배낭 안에 갈무리했다. 싫을 게 분명함에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건지 담담한 그녀를 보자 죄책감이 솟구쳤다. 아파서 걱정시킨 거로도 모자라 잠깐 나가 있는 사이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래도 나 하나 민망하고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
“.....”
“서, 설마 용건이 남았습니까...?”
고개를 들자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아리엘과 마주쳤다. 살짝 상기된 뺨과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이채를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야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보통...
지그시 다물렸던 입술이 열렸다.
“.....”
“뭐?”
“....”
“저... 잘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해주실 수...”
“벗어.”
“네...?”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아리엘이 날 덮쳐왔다.
“뭐, 뭐 하는 거야?!!!”
“더 이상 못 참아!! 나도 구경할래! 나 한 번도 본 적 없단 말야!!”
“이 가시나가 왜 이래...! 놔..! 놔!! 벗겨진다고!!!”
얜 라디의 면전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여줘!!”
“안 돼!!!”
“궁금하단 말야!!! 나도 볼래!!! 라디만 보여주고!!”
“라디는 내 연인이니까 그렇지!!!”
“그럼 나도 연인 할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녀석이 내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새하얀 손가락이 벨트를 풀어내고자 조여온다. 내 하반신을 옭아맨 종아리에선 반드시 보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고,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는지 눈동자에 암사자처럼 흉흉한 기운이 번뜩였다.
“가만히 있어!! 살짝만 보고 놓아줄 테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할게!!”
“되겠냐?!!”
“어떡하면 되는데!!!”
“천만금을 준다 해도 안 돼!!!”
“꼬..추 한 번 보여주기가 그렇게 힘들어?!!”
“다, 다.. 당연하지!!!”
설마 그 청순한 아리엘의 입에서 그런 단어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하지만 녀석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와는 달리,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된 이 세계에서 살아온 그녀로서 성(?)은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을 테니까.
비교적 금욕을 중시하는 종교 시설에서 생활해온 것도 호기심에 크게 한몫했겠지.
그러니까 여기선 완숙한 내가 더 잘해야 한다.
나는 양 손바닥을 들어올려 아리엘을 진정시켰다.
“자, 잠깐 멈춰!!”
“....”
“일단... 진정 좀 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 머리에 피가 쏠려서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거 같거든?”
“나 완전 멀쩡해.”
“.....”
취객은 항상 그런 소리를 하지.
“대체 왜 그... 내 물건을 보고 싶다는 거야...?”
“이전부터 궁금했어. 내 또래 중에는 벌써 가정을 꾸린 애들도 있단 말이야... 그런데 부탁할 사람은 없고... 다들 하나같이...”
아리엘이 도중에 고개를 숙이고 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녀석을 천천히 떼어놓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건 나중에 정말 소중한 사람...”
텁.
“...각오했어.”
“뭐, 뭐를...?”
“오늘 무조건 보고 말 거야!! 팔 치워!! 나도 그동안 많이 참았단 말이야!!! 내 집에서 맨날 라디랑 단둘이 꽁냥대면서!!! 나도 구경할래!!! 껴줘!!!!”
“너 정말 오늘 왜 이래!!! 그게 말이 되는 소리...!!”
“너야말로!!! 닳는 것도 아니잖아!!!”
닳는다.
내 마음이.
“안 돼!!”
“돼!!!”
“이, 이건 범죄야!!! 정신 차려 아리엘!!!”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폭탄을 터트렸다.
“너도 예전에 나 빨가벗기려고 했잖아!!!”
정적.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틀어 라디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아무런 미동 없이 나와 아리엘을 관망하고 있었다.
“라, 라디야 여기엔 다 사정이...”
“무슨 경위인지 알고 있으니까 계속해요.”
“뭐...?”
“저번에 도란님 없을 때 다 들었어요.”
내 흑역사를...!
“저질렀겠다 아리엘...!!”
“뭐, 뭐...!! 사실이잖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강제로 덮치려고 한 것 같잖아!!!”
“별로 다르지도 않잖아!!!”
“다르지!!!”
내가 이전부터 그녀에게 쩔쩔매던 이유.
고된 노예 생활을 마치고 베라스틴 인근 숲에 도달했을 무렵. 나는 아리엘의 치유 능력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회복하자마자 그녀에게 칼을 겨누고 옷을 내놓으라 협박했다.
다만 추잡한 음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고, 제법 비싸 보이는 의복을 입었기에 내다 팔아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곧바로 제압당했지만.
“그, 그때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왜, 왜!!! 이제 와서 창피해?!!”
“...그럼 당연히 부끄럽지... 그땐 나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흥! 그래, 개과천선 시키느라 엄청 애먹었지! 처음엔 무슨 짐승을 길들이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나중엔 용서했어. 매일같이 찾아와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속죄했으니까.”
“그렇다면...”
“그래도 이건 별개야!! 아니, 그때 치료해준 대가로 벗어!!”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데?!!!”
아리엘이 난폭하게 혁대를 잡아끌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허리춤을 붙잡고 저항했다. 하지만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아리엘을 완전히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고, 허벅지와 허벅지가 마찰하자 그녀로부터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옆에서 봤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
옆에서 보고 있던 라디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는 나가 있을 테니 둘이서 일 보실래요...?”
“무, 무슨...! 너도 빨리 안 말리고 뭐 해!!!”
“아니... 아까 대놓고 그런 짓을 하다 걸려서 저도 나서기가 좀...”
“지금 그런 거 가릴 때냐?!! 내 정조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금!!!”
“....”
라디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리엘과 눈빛을 교환하고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아리엘이 가쁜 호흡을 내쉬며 고분고분 내 혁대를 놓아주었다.
“도란...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아니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보통은 입장이 반대 아냐...?”
“그럼 도란이 날 벗길 거야?”
“내가 왜!!”
황급히 부정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지만, 실제로 그런 전적이 있다는 게 문제다.
‘제길...’
단둘이 있었으면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라디의 면전인 터라 그러기가 힘들다.
언짢아할 법도 한데 묘하게 관대한 녀석의 태도도 신경쓰이고...
아니, 이는 모두 뻔뻔한 아리엘의 잘못이다.
“아리엘, 넌 조금 더 부끄러움이란 걸 알 필요가...”
“그게 남의 치마를 곤죽으로 만든 사람이 할 소리야?”
깨갱!!
얌전히 꼬리를 내리자 라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옷 주시면 제가 지금 빨아올게요.”
“괜찮아. 그냥 집에 가서 세탁하면 돼. 마땅히 씻어낼 곳도 없고.”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이 정도쯤이야. 치료원에서 일하다 보면 더한 것도 묻는걸? 물론 그때는 작업복을 입지만... 어차피 얼음물에 세탁하면 옷감이 상해서 안 돼.”
아리엘이 부드러운 손길로 라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복잡한 눈길로 그녀들을 응시하며 허겁지겁 벨트를 다시 동여매고 있노라니 라디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아픈 건 좀 괜찮아지셨어요 도란님?”
“....그래. 너무 놀라서 감기 기운도 쏙 들어갔다. 갑자기 이렇게 될 거라 누가 알았겠냐.”
“그러게 얌전히 보여주면 좋았잖아.”
“야...! 그럼 너도 까든...! 아, 아니다...”
“뭐, 까달라고?”
“무, 무슨...?! 난 그런 말 안 했어!!!”
“변태... 그럼 기대하지나 말든가. 왜 투구를 쓰고 다녔는지 알겠네. 너처럼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은 처음 봤어.”
“.....”
아리엘이 슬그머니 팔짱을 끼자 넓은 마음씨가 두드러졌다. 한바탕 뒹굴고 난 뒤 겉옷이 흐트러진 차림이라 더더욱.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아리엘의 어여쁜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유전이야. 굉장하지?”
“....”
쓸데없는 지식이 하나 늘었다.
애써 못 들은 척 무시하자 라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란님은 가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니까요... 얼마나 조물딱거렸으면 반 치수나 성장해서... 이전에 입었던 속옷이 꽉 낄 정도예요.”
“....”
어쩐지.
손안에 들어오던 감각을 상기하며 죔죔 하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미적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아리엘이 검지로 내 콧등을 쿡 찌르고는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일단... 환기부터 하는 게 좋겠다.”
“아... 그러네요..”
“....”
흥분이 식자 다시금 죄책감이 솟구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아리엘...”
“응, 왜?”
“...미안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곤란한 일을 겪게 해서...”
“....”
아리엘이 살짝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야 조금 당황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괜찮아 도란. 더한 꼴도 같이 겪었는걸. 얼마 전에도 내 목숨을 구해줬고. ....그래도 솔직히 이번엔 조금 심했어. 몸이 아프다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미안해...”
“...사과했으면 그걸로 됐어. 훌훌 털어내고 이걸로 끝. 알았지?”
“....”
대체 이 녀석은 얼마나 어른스러운 걸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꺄아아악!! 사람 살려!!!”
“제, 젠장!! 저건 대체 뭐야!!!”
“자연이 분노했어...! 미친 정령이 나타났다!!”
정령...?
텐트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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