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겨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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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겨울 #6
텐트를 뛰쳐나오자 허겁지겁 도망쳐오는 사람들과 호수 중앙에서 휘몰아치는 얼음 기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젠 당황스럽다기보단 어이가 없다.
“저건... 자연 현상이라기보단...”
“응... 마력 폭풍이야. 뭐가 있나 보네.”
“...어쩐지 도란님을 만난 뒤부터 틈만 났다 하면 사건에 휘말리는 것 같은데요. 도적 때를 만난다던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던가.. 이교도에게 사로잡히고 이제는 나들이를 나와서까지...”
“.....”
염병.
재수가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도시 근처로 캠핑을 나와서까지 문제가 생길 줄이야.
어디 제대로 액운에 씐 게 틀림없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현실을 도피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슬쩍 뺨을 꼬집었다.
“정신 차려 도란. 네가 넋 놓고 있으면 어쩌잔 거야?”
“미안,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근데 저걸 어쩐다.”
“무슨 마물일까요? 저 정도 마력 폭풍이면 예사로운 몬스터는 아닐 텐데...”
라디가 침착하게 석궁에 볼트를 장전하며 읊조렸다.
나 또한 잠옷 위에 로브를 걸치며 말했다.
“...뭐가 됐든 일단 확인은 해보자. 이대로 도망치면 짐을 죄다 버려야 하니까. 아니다 싶으면 그때 물러나면 되고.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저도 같은 의견이에요.”
“도란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그래, 그럼 보호 마법 좀 부탁할게.”
“응!”
회오리의 규모로 보아 제법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대개 값진 소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 마련이고.
하물며 지금은 아리엘도 있는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만 아니면 바로 회복할 수 있다.
낌새를 눈치채고 슬그머니 기어나온 개미를 앞세워 호수 중앙으로 향하자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모두 도망쳐!!”
“자연이 대노했다!!! 미친 정령이 나타났어!! 우린 모두 죽을 거야!!”
“야 이 띨빡아!!! 그딴 소리 지껄일 시간에 빨리 달아나기나 해!!”
제각기 짐덩어리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인파를 거슬러 나아갔다. 빙설 폭풍의 근원지에 근접할수록 바람이 더욱 거세져 왔다. 아리엘이 마력 장벽을 펼쳐준 덕에 찰과상을 입는 일은 면했으나, 회오리의 외각까지 도달하자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라디가 휘날리는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외쳤다.
“위험해요...! 더 이상 다가갔다간 휘말리고 말 거예요!”
“윽...! 이 이상은 위험해 도란!”
“.....”
나는 그녀들과 함께 안전거리까지 물러난 뒤 자세를 낮추고 말했다.
“...야.”
크샥...?
“네가 한 번 갔다 와 봐. 너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키킥!!
개미는 자신 있게 경례하고 성큼성큼 회오리바람으로 다가가더니...
크샤아아아아앗!!!!
성대하게 날아갔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돌풍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개미를 방치한 채 추이를 지켜보자 두꺼운 바람기둥 안쪽으로 희미한 음영이 비쳐보였다.
아리엘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력의 파장을 보니 진짜 정령이 맞는 것 같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런 장소에 정령이라니... 이것도 언데드의 여파일까요?”
“정령이 그렇게 드물어?”
의아하게 묻자 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령은 대부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 서식해요. 자신의 영역이 침범받는 걸 극도로 꺼리거든요. 저도 나름 오랫동안 모험가 생활을 해왔지만 말로만 들어본 게 전부예요.”
“그래...? 하지만 내가 읽은 내용에 따르면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녀석도 있다고 했는데...”
“맞아요. 고위 정령쯤 되면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지능을 갖추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에게 친화적이란 뜻은 아니에요. 정령은 성격이 워낙 제각각이라...”
라디가 말끝을 흐리며 전방을 쳐다보았다.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형체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삽화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정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길... 저건 또 뭐야.”
이형(??).
부족한 내 어휘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뒤틀렸다’라는 표현이었다.
다섯 살 아기 정도 크기에 동글동글한 생김새는 썩 귀여웠을지도 모르지만, 물로 이루어진 몸 곳곳이 황색 점액질로 오염되어 있었다. 심지어 신체 일부에선 검보랏빛 촉수가 돋아나 산호 사이에 틀어박힌 문어처럼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이게 정령이라고..?
아리엘이 무심코 내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으... 저건 완전히 오염됐어. 하급 운디네인 것 같은데... 불쌍해.”
“정상은 아니지...?”
“당연하지...! 정령은 일부 문화권에서 우상화될 정도로 신성시하는 생물인데.. 심지어 먼저 위해를 가하지만 않으면 대부분은 무해하단 말야. 근데 저 애는...”
“일단 해치우지 뭐. 고통도 덜어 줄 겸.”
그냥 방치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전에도 말했듯이 들고 온 짐을 상당수 포기해야 한다. 놈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배낭을 꾸릴 여유는 없을 테니까. 아무리 정령이라고는 해도 하급이면 처리하기 그닥 어렵지 않을 테고.
단도를 거머쥐며 두 다리에 힘을 싣자 라디가 황급히 손을 뻗어 말렸다.
“도란님 잠깐만요!!!”
“왜?”
“...절대로 저 애를 죽여선 안 돼요.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할 수는 없어요?”
“....?”
평소답지 않은 부탁에 칼자루에서 힘을 빼며 쳐다보자 녀석이 곧장 설명했다.
“정령을 한 마리라도 죽이면 앞으로 모든 정령을 적대해야 해요. 녀석들은 자신의 동족을 헤친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거든요. 도란님이 죽을 때까지 추격해올 거예요.”
잠깐.
“그거 완전 조직폭력배 심리 아냐?!”
“....대신 부탁을 들어준 사람한테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해준다고 해요. 정령의 주술을 체득하고 대마법사가 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난 마법 못 쓰잖아.”
“....화이팅.”
라디가 머쓱하게 주먹을 들어올렸다.
말문이 막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전방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닥쳐와 마력 방벽을 후려쳤다.
“제길...! 일단 어떻게든 해볼게! 엄호해줘!!”
전의를 가다듬고 뛰쳐나갔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기가 서서히 얼어붙는 게 느껴진다.
정령을 해치면 안 된다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정도라면 괜찮을 터, 도중에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될 시 후퇴하면 그만이다.
눈 덮인 호수 위를 질주하자 정령이 내 쪽을 홱 돌아봤다.
콰르르르륵!!!
“....!!”
살얼음 낀 물의 창이 쇄도해오자 즉각 검날을 올려쳐 요격했다. 검은 도신과 수창(??)이 맞닿자 무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별가루처럼 수려하게 반짝이며 흩어지는 얼음 조각.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정령은 눈매를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이전의 두 배는 될법한 물덩어리를 허공에 생성했다.
수구(??)는 서서히 형상을 갖추더니 다시금 물의 창이 되어 쏟아졌다.
“아리엘!!!”
“응!!”
그녀가 준비해놨던 영창을 끝마치자 눈부신 빛무리가 해방되었다. 광채는 굳건한 장벽으로 변해 정령의 공격을 틀어막았다. 수창이 보호막을 타격하자 피어난 물보라가 무지개를 형성했고, 나는 더욱 속도를 높여 정령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지척까지 접근하니 놈이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었다.
흩어졌던 얼음 파편이 허공에 떠오르고 역행하더니, 빙설 폭풍이 되어 내 몸을 날려버릴 기세로 치밀었다.
쿠르르르륵!!
“크윽...?!”
거센 돌풍에 발이 묶인 사이 미세한 얼음 조각이 피부를 찢어발겼다. 폐 속으로 냉기가 들이차 호흡을 틀어막고 버티자 사방에서 물기둥이 날아들었다. 차가운 호숫물에 직격한 잠옷은 젖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한 냉기를 발산했다.
단검을 내세워 필사적으로 물줄기를 빗겨내고 있자니 돌연 바람이 멎어들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놈의 가슴팍에 박힌 익숙한 대못이 보였다.
“고마워!!!”
맹진. 살얼음을 깨트리며 가속했다. 발목을 비틀어 지면에서 솟구치는 얼음창을 회피했다. 눈이 자작하게 쌓인 터라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으나, 부츠 밑창에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명치를 노리고 치솟아온 고드름을 걷어차 깨부수며 소리쳤다.
“라디야!! 쟤 좀 떨어뜨려 줄 수 있겠어?!!!”
“윽...! 힘들어요!!!”
라디가 쇠뇌를 연사했지만 정령은 이미 대비를 마친 후. 깨져나간 수면에서 솟구친 물줄기가 두터운 층을 이뤘고, 정령을 둘러싸 외부 공격을 차단했다.
아리엘도 빛의 장벽을 소환해 수류의 흐름을 틀어막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
....크샥.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회오리가 멎자 개미가 안착한 장소는 정령의 등 뒤. 공수부대원처럼 하늘에서 낙하한 녀석이 은밀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내 단단한 아래턱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자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잘했어!!!”
정령이 발버둥치며 지면으로 떨어져내렸다.
나는 즉각 달려들어 깔아뭉갰지만, 워낙 저항이 거센 탓에 붙들고 있기 쉽지 않았다.
──!! ───!!!
“가, 가만히 있어!! 도와주려는 거니까!!!”
이대로 숨통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 어찌어찌 붙잡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 어떻게 할지는 상정해두지 않았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녀석을 깔아뭉개고 있자니 촉수가 슬금슬금 내 팔뚝을 타고 올랐다. 검보랏빛으로 꿈틀거리는 줄기가 상체를 덮자 실험실의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듯 피부가 화끈거렸다.
“으윽?!!”
“괜찮아 도란?!”
“도란님!!”
“난 괜찮으니까 다가오지 마!!!”
시야 언저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정령이 몸체를 꿀렁이자 촉수가 뻗어와 내 목을 졸랐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문어처럼 집요하게 옥죄어오는 촉수 다발.
하는 수 없이 단도로 줄기를 끊어내자 내 아래 깔린 몸이 크게 움찔했다.
반응이 있다.
“큭...!! 야, 너 이거 꿈틀거리는 거 죄다 먹어지워!!”
크샥...!!
개미가 들러붙어 촉수를 물어뜯었다. 나도 두 손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잡아뜯었다. 미세한 낚싯바늘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 맹렬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침투해왔으나 정신력으로 버텨낸다.
하지만 나는 곧 이변을 감지했다.
.....
스산한 정령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기자기한 입가에 꺼림칙한 미소가 서린다. 얼음 아래 호숫물이 분화하기 직전의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끌어오른다.
“도란...? 지면이!!”
“...시발.”
삽시간에 발밑이 꺼져내리며 나는 영하의 수온 속으로 잠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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