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겨울 #7
* * *
[207] 겨울 #7
풍덩!!
‘으윽...’
얼음물에 빠지자 세포를 걸레처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작렬했다. 요란한 물거품 소리가 귓바퀴를 틀어막고, 섬뜩한 추위가 폐 안의 공기를 모조리 앗아갈 기세로 전신을 덮쳤다.
얼음장에 빠지는 게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차분하게 호흡을 갈무리했다. 벌떡대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한겨울 물에 빠진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당황한 나머지 숨을 뱉어내는 것이다.
이 고통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지만 이미 몇 번 겪어본 터라 어찌어찌 감내해낼 수 있었다.
‘그래 물속으로 끌고 왔다 이거지...’
하룻강아지도 자기 집 앞마당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던가. 변변찮은 건달도 제 골목길에선 어깨를 펴고 다닐 뿐만 아니라 고블린도 자기 구역에선 목청을 높여 설치곤 했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은 누가 보아도 지당하다.
새하얀 공기방울 사이에서 눈을 뜨자 한겨울 호수의 정경이 들어왔다.
‘...장관이네.’
얄궂게도.
갈라진 빙판 사이로 내리쬐는 겨울 햇살. 슬로 모션처럼 서서히 무너지는 얼음. 느린 물살에 유유히 흔들리는 수생 식물까지.
금빛 광채가 아름답게 녹아들어 담수를 적셨다.
형형하게 아롱거리는 빛의 커튼이 상냥하게 흑발을 어루만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호수는 자잘하게 빛나는 생물군과 발광 식물로 가득하다.
나는 그들 한가운데 서서 관조했다.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한기와 짙은 살기만 없었더라면 조금 더 머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보글.
빛이 닿지 않는 호수 밑바닥으로부터 불온한 기척이 느껴졌다. 급속도로 형체를 갖춰가는 물의 창. 내 육체를 움켜쥐고자 몰려드는 수류. 얼음장처럼 차가운 정령의 미소. 어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게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이이잉...
나는 짧은 도신에 정신을 집중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키론의 일격으로부터 날 보호해주었던 검은 덩굴을.
이윽고 보이지 않은 수창이 덮쳐옴과 동시에 굵은 줄기가 퍼져나갔다.
콰르르르륵!!!!
.....!!
물살을 가르며 팽창한 넝쿨이 순식간에 전개되어 사방을 에워쌌다. 덩굴은 거목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뿌리처럼 난잡하게 뻗어나갔고, 아름다웠던 호수 정경을 그만의 색채로 물들였다.
‘...쫓아라.’
덩굴이 내 명령을 받들어 호수 어딘가로 숨어든 정령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숙고했다.
‘정령이라...’
범상치 않은 존재인 건 확실하다. 지구에서 마주쳤던 어떤 생물과도 다르다. 명확한 육체를 지녔다기보단 마나란 것이 모여 형체를 이룬 느낌. 인간이나 동물보다도 자연에 가까운 종족이다.
간접적으로밖에 마력을 확인할 수 없는 나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긴 하지만.
말톤이 이 녀석을 본다면 환장하지 않을까...?
슬슬 호흡을 참는 게 한계에 달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푸흡!!”
“도란님!!!”
“도란!! 괜찮아?!”
“...그래,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줘.”
촉수를 뜯었을 때 반응이 있었다. 전부 떼어내는 건 무리라도 수를 줄여놓는다면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을 터. 어쩌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고.
아마 동충하초처럼 숙주의 몸에 기생하는 신종 마물이 아닐까 할...
꽈륵!!
“자, 잠깐...!!”
“도란?!”
돌연 검푸른 수면 아래로 빨려들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발목을 붙들고 잡아끌었다. 안면을 따갑게 스치는 공기 방울 사이에서 간신히 눈을 뜨자 고압 세척기에 말려 들어간 휴짓조각처럼 갈가리 찢겨 너덜거리는 덩굴이 보였다.
‘어떻게...?!’
하급 정령이라 방심했던 게 원인이었던가.
놈은 내 예상을 웃돌았다. 운디네의 저력은 물속에서 발휘되는 바, 녀석은 방대한 수량을 수족처럼 다루며 덩굴을 하나하나 분쇄했다.
이어 녀석은 영악하게도 내가 물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이용했다.
전신을 휘감아오는 끈적한 수류에 이끌려 초저온의 호수 밑바닥으로 향하자 시야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제기랄...!’
.....
씨익.
어느새 내 눈앞에 나타난 정령이 입꼬리를 올렸다. 심야의 호수만큼이나 시커먼 비소가 내 꼴을 조롱했다. 내가 아무리 덩굴을 재소환해 붙잡으려 해봐도 놈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뿐.
물속에서 운디네를 잡는다는 건, 오래전에 가출한 고양이를 찾는 것처럼 막연한 일이었다.
곧 호수 밑바닥까지 도달해 더는 내려갈 곳이 사라지자 짓이길 듯한 수압이 온몸을 찍어눌렀다.
‘....?!’
짙푸른 광채가 일렁였다. 희박하게나마 남아있던 산소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끔찍한 중압에 요동치는 심장이 거인에게 붙들린 거위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뾰족한 물의 창이 날아들어 뺨을 옅게 도려내었다.
파삭!
‘.....’
물길 너머 어슴푸레한 웃음이 들려왔다. 잠자리를 찢어 죽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
애석한 점은, 내가 바로 그 잠자리란 것이다.
곧 팔다리에서 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덩굴도 돋아나지 않았다.
창날이 하나하나 몸을 꿰뚫었다.
점점 숨이 차 온다.
‘.....’
부그르르...
*
큼지막한 수창이 도란의 복부를 꿰뚫은 뒤, 슬그머니 정령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본디 폭력을 싫어할뿐더러 낙천적인 천성과 호기심으로 인간을 좋아했을 그녀다.
인간은 언제나 뚝딱하고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곧장 재밌는 행동을 벌이곤 했으니까.
호숫가에 숨어들어서 인간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푸르른 잔디밭에 이상한 연잎을 깔고 앉아 먹이를 나눠 먹곤 했다.
조그마한 통 안에 색색들이 반찬이 정갈하게 담긴 모습과 행복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고 어미 새처럼 서로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인간들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키득 웃음이 새어 나오곤 했다.
그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지은 바위 건물은 입을 헤 벌리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고 커다랬으며, 황량하던 황무지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황금빛 밀알이 되어 풍년을 노래하는 모습은 참 경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밉다.
여느 때면 몰래 뭍으로 나와 일광욕을 즐겼을 햇볕도, 발치를 스치고 지나가며 친근하게 재롱을 피우는 미꾸리와 납자루도, 홀로 숨바꼭질을 하며 거닐곤 했던 멋진 갈조류 숲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전부 미웠다.
그러니 눈앞의 이 인간도 밉다.
나쁜 짓을 할 것이다.
정령은 붉은 혈흔으로 물들어가는 호숫물을 뒤집어쓰자 아기자기한 콧망울을 움찔했다. 하지만 곧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는 숨통이 끊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도란의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댔다.
......
‘.....’
.....두근!
....!!!
죽은 줄만 알았던 사내로부터 맥박이 들려오자 정령은 황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덥석!!
.....!!
드디어 잡았다.
도란은 당혹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마주했다. 가냘픈 손목을 움켜쥐었다. 절대로 녀석이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묵직한 손을 더듬어 촉수를 쥐어뜯자 정령이 크게 꿈틀거렸다.
.....!!!!
‘....얌전히 있어.’
촉수 가닥이 관절을 옭아맸지만 완력으로 끊어냈다. 자그마한 손바닥이 얼굴을 밀어내자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창에 꿰뚫렸기에 더욱 힘을 실었다.
두려움에 찬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만 참아.’
집에 보내줄게.
......
도란은 검붉게 물들어가는 호수 밑바닥에서 정령에 얽힌 촉수를 하나하나 떼어냈다.
*
푸학!!!!
살얼음 덮인 수면을 빠져나오자 누군가가 날 빙판 위로 잡아끌었다.
“커헉...!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공기가 이렇게 달았던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빙판 위에 엎어지자 흐릿한 시계 너머로 잔뜩 울상인 두 녀석이 보였다. 물 빠진 듯 먹먹한 색감과 원근감 없이 일렁이는 시야, 여전히 먹먹한 소음은 도무지 현실 같지 않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괜찮지 않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손발에 감각이 사라졌다.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고, 이 통증이 추위에서 비롯된 건지 상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는 건졌으니 다행이지.
......
어느새 제정신으로 돌아온 정령이 죄책감에 잔뜩 움츠린 채 내려다보자 아리엘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나는 살며시 손바닥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왜...”
아리엘이 눈물을 글썽이며 쳐다봐왔기에 씁쓸히 입꼬리를 올렸다.
“난 괜찮아.”
“.....”
“괜찮다니까... 진정해..”
“...우선 치료를 해야 해요. 도란님은 가만히 계세요. 언니, 치유 마법을 쓸 수 있겠어요?”
“...그래, 환부 좀 꾹 눌러서 지혈해줘. 가장 큰 복부의 상처부터 치료할 테니까.”
“옷이 들러붙어서 안 벗겨지니 잘라낼게요. 베일 수도 있으니 절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라디가 로브 안쪽에서 침착하게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희미하게 실밥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옷이 한 꺼풀씩 눈 위에 널브러지고,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얼렸다.
하지만 라디가 겉옷을 벗어 덮어주니 추위가 한풀 가셨다.
이내 따스한 빛이 환부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맹렬한 고통이 치달았다.
“윽!!”
“...참아 도란. 이미 몇 번 겪어봤지? 라디야, 도란 손 좀 붙잡아줘.”
“이렇게 다칠 줄 알았으면 그냥 도망치는 거였는데...”
“괜찮아 부상 정도야 한두 번도 아니... 큭...!!”
“혀 씹을 수도 있으니까 말하지 마. 천천히 심호흡하고 의식을 집중해.”
“.....”
얼마 만일까.
이렇게 진지한 그녀를 보는 게.
과거, 지금보다 한창 더 미숙한 시기에는 빈번히 다치곤 했다. 마물을 사냥하다 부상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험가와 시비가 붙어 상해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무일푼인 나로서는 비싼 치유소의 비용을 감당할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치유소로 돌아오면 아리엘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날 꼬옥 끌어안아 위로해주곤 상처를 회복해주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정처 없이 떠돌며 방황하던 내게 처음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던 이.
아니 어쩌면 친구가 아니라...
“.....”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통증이 완화될 즈음, 머리맡에서 상냥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 됐어 도란. 그래도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니 조심해야 해. 유실된 피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당분간은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영양소도 골고루 섭취하고. 무엇보다 절대로 무리... 도란?”
“.....”
시선을 피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나는 몸 위에 덮인 옷을 황급히 끌어안고 일어났다.
다 안다는 듯 묘연한 미소를 보내오는 라디를 지나쳐 마음을 가라앉히자 등 뒤로 걱정스러운 시선이 전해져왔다.
“도란... 괜찮아?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아냐. 고마워. 덕분에 괜찮아졌어. ...고맙다.”
“...응.”
딱딱함이 어조에 배어나왔다.
옷을 둘러 국소 부위를 가리고 나니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시선이 몰려들자 정령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리엘이 눈매를 좁히며 멸시하자 녀석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살며시 그녀를 막아세우며 말했다.
“...진정해 아리엘. 얘도 고의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래도... 도란이 이렇게나 다쳤는데...”
“괜찮다니까. 그리고 정령을 해치면 안 된다며.”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
이대로 가다간 계속 험악한 분위기로 흘러갈 기세였기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얘는 왜 그러고 있었던 걸까? 이상한 촉수에 둘러쌓여서...”
“그러게요 저도 그게 좀... 촉수 때문에 폭주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데... 신종 기생형 마물일까요? 저도 그런 건 처음 봤어요.”
“뭐... 앞으로 조심하자. 인간한테도 들러붙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새로운 역병의 조짐일지도 몰라. ...아직도 화끈화끈하네.”
상당히 호전되긴 했으나 여전히 촉수에게 닿은 부위가 얼얼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더 붙들려 있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아리엘의 치유 능력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겠지.
휘이이잉...
“으... 추워. 일단 이건 나중에 논의하고 텐트로 돌아가자. 감기 걸리겠다.”
으슬으슬한 한파가 덮쳐와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호수 외각으로 향했다.
한데 묘한 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살짝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정령이 보였다.
“야.”
.....!
“아직도 볼일이 남았어? 너도 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놈에게서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상황에 휘말려 어찌어찌 구해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애먹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외면했을 거다. 기껏해야 하급 정령이 뭔가 대단한 걸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괜한 말썽에 얽매여도 곤란한 바,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고픈 마음을 모르는지 녀석은 도도도 달려와 내 종아리를 끌어안았다.
“....?”
.....
“라디야, 얘 왜 이러는지 알아?”
“글쎄요... 정령은 워낙 베일에 싸인 종족이라...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요?”
“...하급 정령은 자아가 희박하다고 들었는데 별일이네. 혹시 네 얼굴을 보고 반한 거 아냐? 너 요즘에 투구로 안 가리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잖아. 안 그래 도란?”
“에이 그럴 리...”
됴.. 란...?
우뚝.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내려다보자 정령이 조심스런 눈길로 날 올려다봤다.
됴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