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겨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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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겨울 #8
일단 서둘러 텐트로 돌아왔다.
천막 입구에 모닥불을 지피고 칸막이를 세워 열기가 들이차도록 만들었다.
꺼두었던 등불을 점등하자 따스한 불빛이 차올랐다.
나는 재빨리 널브러진 침낭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 추워... 바람 부니까 뒤질 것 같네. 진짜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나 지금 입술 파래?”
“잠깐만요, 몸으로 데워드릴 테니...”
“괜찮아. 그럼 너도 춥잖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개의치 마세요.”
라디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날 끌어안았다. 이내 살며시 침낭 사이로 기어들어 오더니 꾸물거리며 옷을 벗고 체온을 나눠주었다.
슬쩍 녀석의 등허리를 끌어안자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나는 은근슬쩍 곁눈질하는 아리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도 와서 좀 쉬어. 치유 마법을 쓰면 엄청 지치잖아. 힘들지?”
“그건 그렇지만... 그보다 쟤를 좀 먼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
그녀의 시선이 향한 텐트 입구에는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정령이 있었다.
라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이는데 이대로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제대로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아리엘, 너무 꽁해있지 말고 이리 와. 춥겠다.”
“....”
그녀는 살짝 갈등하더니 고분고분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다시 한번 고마워. 또 신세를 졌네.”
“...알면 됐어.”
“그래, 그럼 이제... 야, 너 이름은 있냐?”
...됴란?
“아니, 그건 내 이름이고. 다른 정령들은 널 부를 때 어떻게 불러?”
됴란!!
“...말뜻을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네요.”
라디가 난처하게 뺨을 매만졌다. 정령은 슬그머니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또르르 달려와 내 흑발을 붙잡았다.
녀석을 살짝 떼어놓으며 말했다.
“근데... 얘는 운디네 맞지? 외견이 내가 들었던 내용과 흡사한데.”
“음... 네, 틀림없을 거예요. 그런데 조금 신기하네요. 운디네는 정령 중에서도 도도하기로 소문이 나 있을 정도인데.”
“그래?”
“네, 게다가 하급이면 아직 자아도 미성숙할 텐데 이 애는 주관이 꽤 뚜렷해 보여요. 지금도 도란님께 호의를 보내오고 있잖아요?”
“그러네... 뭐, 내가 구해줘서 그런 게 아닐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손가락을 더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소박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리엘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눈치였지만,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근데 얘는 여자애일까 남자애일까?”
“정령도 성별이 있어?”
“응? 그야 당연하지. 근데 왜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얘네는 그... 행위 없이도 번식할 수 있으니까.”
“근데 그런 것치곤... 너무 밋밋한데?”
슬쩍 정령을 위아래로 살폈지만 동글동글한 외형에선 성별을 가늠할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폭주가 끝나니 크기도 조금 줄어든 것 같고.
말캉말캉한 팔뚝을 신기하게 매만지고 있자니 라디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건 얘가 아직 어려서 그럴 거예요. 정령은 상위 단계로 진화할 때마다 급격하게 성장하는데 운디네는 성체가 되면 엄청 아름다워진대요.”
“오오 얘가?”
됴란?
지금은 예쁘다기보단 그냥 깜찍하기만 하다.
장난스레 콧방울을 찌르자 녀석이 내 손가락을 덥석 붙들고 우물거렸다. 서늘한 피부와 달리 입속은 뜨뜻미지근한 게 썩 기분 좋다.
그렇게 새끼 고양이를 놀아주듯 쿡쿡 장난치다 문뜩 고개를 드니 라디와 아리엘의 표정이 조금 오묘했다.
“...라디야, 정령이 성체까지 자라려면 얼마나 걸리지?”
“모르겠어요.. 워낙 알려진 정보가 없으니까... 아까 마력 폭풍의 규모를 보면 지금쯤 이미 중급 개체로 진화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외관이 어려서 그렇지 저희보다야 많을걸요.”
“...곤란하네.”
“곤란하네요.”
“....?”
아리엘이 이마를 짚었다. 라디가 입가를 가렸다. 그녀들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명단 중에 운디네도 섞여 있었어?”
“아뇨, 하지만...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
두 녀석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날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슬쩍 물어보려는 찰나 정령이 내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됴란!!
“.....”
다시금 떨어뜨려 주며 정정했다.
“..됴란이 아니라 도란이야. 제대로 발음해봐, 도란.”
됴란...!
“구강 구조가 아직 덜 발달해서 발음하기가 어려운가 봐요. ...귀여워라.”
“솔직히 난 아직 조금 거북하지만... 응, 외관은 엄청 귀엽네. 정령을 목격한 모험가들이 왜 치유소에서 다들 그렇게 자랑해댔는지 알겠어.”
아리엘이 정령을 쓰다듬었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어느새 은근히 미소짓는 그녀를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원체 상냥한 녀석이니까.
슬금슬금 라디와 아리엘의 눈치를 살피며 말문을 뗐다.
“저... 혹시 우리가 키울 수는 없을까?”
“뭐, 이 애를?”
“...아,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아니 뭐... 도란이 그러고 싶다면야 나는 상관없는데... 라디야, 애초에 정령을 키우는 게 가능한 거야?”
“음...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예요. 제가 듣기로는 희귀하게나마 정령술사란 직업이 존재한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왕도에 몇 명 있을 텐데 기밀 유지 때문인지 그 외의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뭘 먹는지도 모르고...”
“그래? 그럼 아무거나 한번 줘볼까?”
슬그머니 침낭에서 빠져나왔다. 텐트 구석에 세워둔 배낭을 뒤지자 각종 캠핑용품이 손에 잡혔다.
그중에서 나뭇잎으로 감싸 보관한 육포를 꺼내자 정령이 코를 쫑긋거렸다.
“오 그래, 반응이 오는데? 요거 한번 먹어볼래?”
.....?
“어때? 냄새 좋지? 이거 나름 꽤 비싼...”
홱!
마음에 안 드는 모양.
“...어제 도란님이 잡은 생선은 어때요? 운디네는 물가에 사니까 그쪽이 더 입맛에 맞을 것 같은데.”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재빨리 모닥불 근처에서 오늘 아침에 먹고 남은 생선구이를 들고 들어왔다. 눈밭에 방치된 탓에 조금 굳었으나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이거라면 녀석도 분명...
도리도리!
“음...?”
정령이 고개를 저으며 아기자기한 두 손바닥으로 생선구이를 밀어냈다. 이것도 아닌 모양.
‘보기랑 달리 엄청 까다롭네...’
뭔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열심히 자기주장하는 정령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이번엔 아리엘이 의견을 냈다.
“음... 그럼 풀을 줘보는 건 어때?”
“풀?”
“응, 얘는 아직 어리니까 고기를 먹기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 인간으로 따지자면 아직 유아 수준이니까. 어쩌면 아예 초식성일지도 모르고.”
“오 그거 좀 그럴듯한데? 가방에 향신료로 쓸려고 가져온 멘테 이파리가 좀 남아 있을 텐데...”
“아, 내가 할게. 도란은 쉬고 있어.”
아리엘이 배낭에서 초록색 이파리를 꺼내들자 라디가 영 석연치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멘테 잎은 호불호가 좀 많이 갈리는 편인데 괜찮을까요?”
“뭐, 보면 알겠지. 어, 움직인다...!”
......
정령이 반응을 보였다. 녀석은 살며시 내 품에서 떨어지더니 아리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모두가 숨죽인 채 아기 정령이 밥을 먹는 모습을 구경하려던 순간, 녀석이 보인 행동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정령이 아리엘의 가슴 천을 끌어내리더니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쪽쪽 빨아댔다.
“하읏?!!”
“어, 언니?!!!”
“도, 도란?!! 보지 마... 흐으으...”
생선구이가 툭 떨어진다.
“...계속해.”
“뭐가 계속해야!! 당장 떼줘...!!”
“우유를 먹고 싶었을 수도 있지.”
“난 젖 안 나와!!!”
아리엘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있는 힘껏 정령을 떼어내려 시도했지만 영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날 치유하느라 마력도 거의 다 썼을 테고.
점차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하으... 으... 도란... 보고만 있지 말고... 흣...”
“....”
부럽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입질에 열중하는 정령과 귀 끄트머리까지 빨개진 채 신음을 틀어막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돈이라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촉촉한 눈동자에 곧 누구 하나 때려죽일 듯한 살기가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해 냅다 뛰어가 정령을 떼어주었다.
기다랗게 늘어지는 은실 사이로 무언가가 슬쩍 엿보인 것 같기도 한데...
“...잘했다.”
됴란! 됴란!
손뼉을 마주치자 정령이 흡족하게 내 이름을 연호했다.
라디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란님도 정말... 언니 괜찮으세요? 혹시 이상한 느낌이 든다거나...”
“아.. 으, 응. 그냥 좀 당황해서... 살다 살다 정령한테 가슴을 빨릴 줄이야...”
“일단 이걸로 좀 닦으세요.”
“고마워... 그래도 방금 걸로 애가 뭘 먹는지 알겠어. 마력을 조금 덜어간 것 같아.
잠깐.
“마력을? 그럼 좀 위험한 거 아냐...?”
“음... 괜찮아. 아주 소량이라 이 정도면 조금 쉬어주는 걸로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무리하지 마. 치유 마법을 쓴 직후인데.”
“...그렇게 걱정해줄 거면 진작에 좀 떼어내 주지 그랬어.”
“.....”
할 말이 없네.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이걸로 뭘 먹는지는 파악했으니 남은 건 주거 환경인데... 물만 있으면 될까요?”
“음... 일단 우리 집 정원에 연못이 있긴 한데... 그걸로 충분하려나...? 애초에 도시 안은 정령한테 조금 무리지 않을까?”
“책에서 한 번 찾아보는 게 어때?”
“책이요?”
“그래, 너희가 가져온 도서 중에 마물 백과사전이 있던데. 그중 운디네에 대해서도 나와 있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라디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녀석은 잽싸게 텐트 구석에서 책 무더기를 뒤지더니 내가 읽었던 서적을 들고 다가왔다.
“이야기하느라 깜박 잊고 있었어요. 여기 어딘가에도 분명 정령에 대한 내용이 있을 텐데... 아 찾았어요.”
“어디, 운디네도 있어?”
“네, 여기 있긴 한데... 잠깐만요.”
돌연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책장을 빠르게 뒤석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여기 보세요. 운디네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게 있긴 한데 전부 기본적인 정보뿐이에요. 그냥 물에 사는 정령이라고만 나와 있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난감하네.”
“음... 그럼 왕도에 한 번 가보면 되지 않을까?”
“왕도?”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디가 그랬잖아. 왕도에 정령술사가 있다고. 가서 물어보면 알려줄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데.. 왕도라... 저도 아직 못 가봤는데...”
“...과연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줄까? 방문했다가 괜히 붙잡혀서 이것저것 심문당하면 어쩌려고.”
“아, 그건 걱정 마. 내가 소개장을 써 줄 테니까.”
“...소개장?”
“응, 그야 내 가문명으로 된 소개장을 보여주면...”
아리엘이 말을 잇던 도중 아차 입을 틀어막았다.
이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 쪽을 쳐다봐왔다.
“...가문이 뭐?”
“아, 아니 방금 건 그냥... 실언?”
“...너도 거짓말 참 못하네.”
나는 천천히 자리에 드러누웠다.
“정령이라...”
오후의 나른한 여운을 만끽하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