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겨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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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겨울 #9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정령은 내 품을 꼬옥 끌어안고 잠들었다.
아리엘이 운디네의 볼때기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얘도 자긴 하는구나...”
“그러네...”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는 정령을 신기롭게 구경하자 라디가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령도 휴식은 취해야 할 테니까요... 예전에 그런 말도 있었잖아요. 같은 장소에서 농사를 반복하다 보면 흉작이 일어나는 이유가 땅의 정령이 힘을 다 써서 그런 거라고.”
“그러게... 결국엔 토지의 영양분이 결핍돼서 그런 걸로 밝혀졌지만. 근데 얘 볼살 엄청 말캉말캉하다. 만져봐, 꼭 젤리 같지 않아?”
“음... 전 젤리를 먹어본 경험이 없어서... 슬라임에 탄력이 조금 더 가미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요?”
“뭐야, 이곳에도 젤리가 있었어?”
베라스틴에선 한 번도 못 봤는데.
라디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별로 인기 있는 음식은 아니에요. 이전에 보부상이 봇짐을 풀어놓고 파는 걸 봤는데 냄새가 상당히 구린 데다가 가격도 비쌌거든요. 돼지의 비계나 마물 뼈로 만든다고 하니 먹기도 좀 꺼려지고요.”
“그래? 이상하다.. 내가 먹어봤던 젤리는 다 맛있었는데... 송아지 발바닥을 푹 고아서 만든 거라 보양식 대용으로도 먹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응! 식감도 좋고 과일청도 첨가돼서 홍차랑 곁들여 먹기 좋았어. 북쪽 거리에 가면 고급 양과점에서 가끔 파는데, 다음번에 한 번 같이 가볼래?”
“저야 당연히 좋죠!! 아... 근데 혹시 가격이...?”
“음... 아마 개당 1실링 조금 안 됐을걸? 조금 큰 것도 있는데 그런 건 2실링 정도 했을 거야.”
“으...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라디가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며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도 단 음식을 좋아했지. 돈이 아까워서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안 사 먹지만...
베라스틴으로 돌아가면 다과점에 들려 선물이라도 사갈까.
쫑긋거리는 라디의 귀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란, 너 혹시 조금 달라진 점은 없어?”
“달라졌다니? 나 뭐 변했어?”
“음... 뭔가 알고 말한 건 아닌데.. 정령하고 엮인 사람 중에는 체질이 변한 사람이 많다고들 하니까 혹시나 해서. 너도 정령의 보은 얘기는 한 번쯤 들어봤지?”
“아, 라디가 아까 말한 대마법사 그거?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특별할 건...”
몸을 요리조리 살폈지만 평소와 달라진 점은 찾지 못했다.
라디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기야... 그런 전승도 있긴 했었죠. 마법사 외에도 평범했던 시골 청년이 정령을 구하고 전설적인 모험가가 되었다던가... 금은보화를 얻어 갑부가 되었다던가...”
“얘네가 대단하긴 한가 보네?”
“네, 어쩌면 도란님이 마나를 각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지도 몰라요. 마력이 넘치다 못해 온몸이 마나로 이루어진 종족이니까요.”
“오 정말? 그럼 대박이네!”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지금도 어중간한 모험가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지만, 그뿐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키론 같은 강호가 넘쳐날뿐더러 그들조차 엄두를 못 내는 마물이 득시글거린다.
마나를 다루게 되면 그런 강자와도 겨뤄볼 수 있을 터. 어쩌면 상위 모험가 랭크에도 도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험가 등급을 올릴수록 여러 복지 혜택이 따라오는 바, B랭크까지만 달성해도 삶의 질이 확 달라지겠지. 마물 소재도 더 비싼 가격에 매각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문뜩 기막힌 발상이 떠올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애가 너한테서 마나를 흡수했다고 했었지?”
“응, 왜 도란?”
“그거 나도 똑같이 따라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거 아냐?”
“뭐...? 도란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응? 그야 뭐 정령이 했던 것처럼...”
아.
재빨리 방정맞은 입을 다물었다. 아리엘이 두 팔로 가슴께를 가리며 얼굴을 붉혔기에.
라디가 한숨을 내쉬며 내 볼을 꼬집었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에요... 그렇게 쉽게 마력을 각성할 수 있었으면 누구나 마법사가 됐겠죠. 물론 그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 미안해, 막 내뱉어서...”
“괘,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텐트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어색하게 아리엘과 마주 보고 앉아있자니 그녀가 낯뜨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푸흣... 아까 라디가 했던 말... 응, 도란이 가슴을 좀 밝히긴 하네.”
“아니... 난 정말 순수한 의도로 질문한 거라니까? 어렸을 때부터 마법 한 번 써보는데 소원...”
“거짓말. 너 아까 정령 떼어낼 때 내 가슴 대놓고 훔쳐봤잖아.”
“아, 아니...?! 안 봤어!!”
“알았어, 그런 걸로 해 둘게.”
“.....”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완벽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들켰을 줄이야.
아리엘은 여전히 얼굴을 뜨겁게 붉힌 채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에 머금은 미소로 보아 날 책망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눈치껏 화제를 돌리려던 차, 라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외투를 걸쳤다.
“...뭐야, 어디 가?”
“네, 전 잠깐 숲에서 사냥 좀 하고 올게요.”
“지금...?”
“내일이면 베라스틴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오늘 저녁엔 든든하게 먹어둬야죠. 체력을 많이 쓴 직후기도 하고.”
“아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럼 같이...”
라디가 날 도로 앉혔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녀석이 곰살궂게 웃으며 말했다.
“두 분 다 지치셨잖아요. 멀리 안 가고 요 근처에서만 돌아다닐 테니 걱정 마세요.”
“...정말 혼자서도 괜찮겠어?”
“물론이죠. 한 시간 뒤에 돌아올 테니 두 분은 푹 쉬고 계세요.”
라디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녀석은 슬쩍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흔들며 천막 너머로 사라졌다.
볼에 남은 은은한 열감을 음미하며 행복하게 자리에 눕자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제 잘 거야 도란?”
“그래, 너도 라디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 쉬는 게 어때? 피곤하잖아.”
“응, 슬슬 졸리네...”
아리엘이 다정하게 시선을 맞추더니 옆자리에 누우며 눈웃음을 지었다.
한데 그녀의 미소를 보자니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아리엘, 넌 왜 나랑 같이 가겠다고 한 거야?”
“가다니, 뭘?”
“이교도를 잡으러 갈 때 말이야. 너라면 훨씬 더 좋은 파티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지만 그편이 훨 낫지 않았어? 실적을 쌓기도 좋을 테고.”
“응? 뭐 그런 걸 물어봐.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지.”
“.....”
허를 찔렸다.
시선을 피하자 그녀가 내 볼을 쿡쿡 눌렀다.
“왜, 부끄러워?”
“...아니거든.”
“음... 도란은 도박 같은 건 절대로 못 하게 해야겠어.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나니까.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돼서 오는 거 아냐? 우리 집 현관을 두드리면서 하루만 재워달라고 부탁한다던가.”
“...그럴 바엔 차라리 노숙하고 말지.”
라디가 있으니 절대 그럴 리 없다. 걔가 얼마나 경제 관념이 투철한데...
도박에 발을 들였다간 목덜미에 독침봉을 맞고 쓰러져 다시는 카드를 손에 쥘 수 없는 몸이 되겠지.
순간 섬뜩한 오한이 들어 황급히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엔 곧바로 잘 생각이었지만, 모처럼 이렇게 아리엘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자니 이전부터 늘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오랜 물음을 입에 담았다.
“...아리엘, 넌 왜 날 도와주는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부터 그랬잖아. 굳이 나한테 약초채집을 의뢰했던 것도 내가 금전에 허덕이니까 그런 거고. 무상으로 치료해주다가 상사한테 들켜 혼난 적도 있고...”
“음... 그래? 그런 일이 있었나?”
“시치미 떼긴... 그게 다가 아니잖아. 아프지 말라고 나 몰래 배낭에 회복 연고를 넣어준 적도 있고, 한창 굶주릴 때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걸 핑계로 식당에서 밥을 사준 적도 있었고. 병실 침상에서 자고 일어나니 뜯어졌던 샌들이 멀쩡하게 고쳐져 있던 것도, 전부 네가 한 거지?”
“.....”
아리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더니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며 흑발을 어루만졌다.
단아한 입술이 벌어지자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도란은 자꾸 나한테 받았다고만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너한테 정말 많이 받았는걸?”
“내가...?”
“응... 예를 들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곤란했을 때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약초를 구해줬던 거나, 홀로 당번을 서게 되어 막막했는데 같이 남아서 뒷정리를 도와줬다던가. 업무에 지쳐 울적했을 때 주점에서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했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모험가를 처리해준 적도 있었잖아...”
그녀가 내 뺨을 쓸어내리며 아련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기억나? 네가 퇴근길에 나타나서 우산을 건네주고 사라진 거. 그때 너는 우연히 만난 척했지만... 사실 한참 동안 기다린 거 알고 있어.”
“...그걸 어떻게..”
“음... 옛날부터 누군가가 내 물건을 가져가는 일이 자주 있었거든. 나한테 호감을 품은 사람도 있었지만 시기심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아리엘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내 덧없는 미소를 피워올리며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날도 누군가가 내 우산을 훔쳐 가는 걸 보고 기다려 준 거지?”
“.....”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모험가 생활이 익숙지 않을 무렵.
나는 추적추적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를 거닐다 한 광경을 목격했다. 비쩍 마른 남성이 신전에서 새하얀 우산을 끌어안고 뛰쳐나오던 걸.
이곳에서 우산은 상당한 사치품인 데다가 일전에 아리엘이 같은 물건을 쓰는 걸 목격했으므로 나는 그 우산이 그녀의 물건이라 확신하고 사내를 뒤쫓았다.
허나 되찾을 수는 없었다.
교량 위에서 남자를 따라잡았으나 그가 날붙이를 휘둘러왔기에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어렵지 않게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교각 아래로 떨어진 우산은 흙탕물에 휩쓸려 강 하류로 떠내려갔고 모래톱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결국 찾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잡화점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우산을 사 들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빗길 속에 선 나를 한참이나 말없이 응시하던 아리엘의 애틋한 눈빛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
시선을 피하자 그녀가 내 고개를 붙들어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전했다.
“고마워 도란. 너를 만나서. 그 해 숲속에서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어.”
아.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가슴에 불이 붙은 듯 뜨거우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다.
강하게 자각한 이 감정이 너무 두려웠다.
좋지 않다. 이런 분위기는...
위험하다.
모든 의지력을 쥐어짜 두 뺨에 와 닿는 따스한 손길을 떨쳐내려는 찰나, 그녀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시원스레 내뱉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네.”
“뭐...?”
“...뭘 그렇게 놀라. 나도 이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야지. 치료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신전에서 예배도 드리고... 도란하고 라디도 곧 모험가 의뢰로 바빠지겠지? 앞으로는 조금 쓸쓸할지도 모르겠네...”
아.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싶었다.
아리엘과 파티를 맺은 건 어디까지나 베라스틴에 발생한 이변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사건이 마무리됐으니 이제 그녀와는 작별해야만 한다. 치료원에 들르면 여전히 그녀를 만날 수는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데면데면해지겠지.
지금 맞닿은 이 온기도, 그리운 체취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녀의 웃음 또한.
목이 메었다.
가슴이 얼얼하다.
더 이상 그녀가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원인 모를 두려움이 치밀었다.
불현듯 라디가 지하에서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지금 전해야 한다.
조바심이 입을 움직였다.
“아리엘...! 나 부탁할 게 있어!”
“응...?”
“조금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네가 계속 우리 파티에...”
“....”
끝내지 못한 말이 공중에 붙들렸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덮어 뒷말을 가로막았기에.
당황하며 쳐다보자 아리엘의 입술에서 애써 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도란...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면 안 돼. ...나는 네가 끝까지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 속에 남아주었으면 하니까.”
“그게 무슨...”
“내가 도란을 따라서 모험가가 되면... 신전 일을 그만둬야 해. 안정된 수입도 사라질 테고 오랫동안 도시를 떠나 있는 일도 잦아질 거야.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줄어들지만 도란과 함께 자고, 밥을 나눠 먹고,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의지하는 시간은 늘어날 거야...”
아리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애달픈 한숨을 내쉬며ㅡ
“도란...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함께 덮어두었던 금기를 입에 담았다.
그녀는 내가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괴로워. 라디는 내가 정말 아끼는 동생이지만 너와 애정을 나누는 모습을 볼 때면 부러워 미칠 것 같아. 지금의 너는 라디가 있는 이상 날 봐주지 않을 걸 아니까. 그리고... 네가 나한테도 어렴풋이 호감을 품고 있는 것도 알아. 그 마음 때문에 가끔 괴로워하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하늘색 눈망울에 슬픈 각오가 맺히고, 내게 전했다.
“네가 날 품을 생각이 없다면... 우린 여기서 헤어져야만 해.”
다시 원래대로.
“.....”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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