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겨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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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겨울 #10
“이곳도 살짝 정들었는데... 벌써 떠나네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
“마침 날씨가 맑게 개어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수월하게 걸을 수 있겠어요. 집에 도착해서 빨래를 널기에도 좋을 것 같고...”
“....”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
“....도란님 잠시 일로 와 봐요.”
라디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리엘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날 숲속으로 잡아끌었다.
녀석이 날 눈 덮인 나무둥치에 몰아세우더니 사납게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둘이 어제 무슨 일 있었죠.”
“...아무 일도 없었어.”
라디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푸른 눈동자에 은은한 노기가 감돌고 꼬리털이 바짝 부풀었다.
“...거짓말. 제가 어제 사냥하러 다녀온 뒤로 둘이서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뭘 물어봐도 건성이고. 정신은 딴 데 팔려있고...”
“.....”
“혹시 싸웠어요? 뭔가 서로 의견이 불일치했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
“섹스했어요?”
“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라디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왜요,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아니 그게 말이 되는...”
“도란님이 아리엘 언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언니가 도란님을 좋아하는 것도요.”
말을 잊었다.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자 라디가 내 뺨을 붙들었다.
“고개 드셔도 돼요. 미안할 거 없으니까.”
“....어떻게 알았어. 내가 아리엘을 좋아하게 된 건...”
“어떻게긴요... 제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도란님과 함께했는데.. 도란님이 언제 상처받고, 언제 기뻐하고, 또 웃고 슬퍼하는지 곁에서 줄곧 봐왔는데...”
“.....”
“그리고... 그것도 아세요? 도란님이 아리엘 언니에게 끝까지 머리칼을 감추려고 했던 진짜 이유 말이에요.”
묵언으로 일관하자 라디가 말을 이었다.
“도란님은 은인이란 말로 스스로를 속이려 했지만... 사실 언니를 좋아했기 때문이잖아요. 검은 머리라는 게 알려지면 자기를 떠날까 봐. 버림받을까 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언니한테만은 외면당하기 싫으니까.”
“...아니, 난 아리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정말로요?”
“.....”
여느 때보다 성숙한 눈동자가 날 마주했다.
“물론 도란님은 어떤 사람이든 머리색을 밝히는 걸 꺼리셨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요?”
“.....”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 언니가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최근에야 본인의 마음을 자각하신 모양이지만... 도란님이 언니를 좋아하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어요.”
“...어째서.”
“언니를 바라보는 도란님의 눈빛이 얼마나 다정한지, 또 상냥한지...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언니와 말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또 그런 자신의 모습에 갈등하고, 애써 미루어 없는 일로 치부하는 것도요.”
“아냐 난...!”
“도란.
...안쓰러워.”
“.....”
다리에서 힘이 풀려 나무둥치에 무너져내렸다.
맥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자 라디가 내 곁에 나란히 앉아 팔뚝을 쓸어내렸다.
“...도란, 미안해서 그래? 나 외에 다른 여자한테 연정을 품어서?”
“.....”
몸을 웅크리자 그녀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말했잖아 오빠, 미안해하지 말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뭐, 어때 겨우 그런 걸로. 어쩔 수 없는 건데.”
“뭐가 어쩔 수 없어... 난...”
“몰래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잖아. 옛말에 사람 마음은 바람과도 같아서 항상 제멋대로래. 그래서 연인들이 갈등하고, 동료가 반목하고, 오랜 부부에게 권태가 찾아오는 것도 다 그 때문인걸? 도란이 언니에게 연정을 품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다른 여자를 좋아해도...”
“당연히 싫지. 근데 아리엘 언니니까 괜찮은 거야.”
“그건 또...”
천천히 고개를 들자 라디가 날 똑바로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그녀가 내 뺨을 붙들고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도란이 있던 곳에서는 한 남자가 한 명의 정실을 두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지?”
“.....”
“여기선 아냐. 사람이 쉽게 죽어나가는 세상이니까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쌓아놓은 재물이 많아도 지킬 힘이 없으면 소용없고, 능력이 없으면 노예로 팔려나가 사람 취급을 못 받기도 해. 사람들이 배우자를 구할 때 자연히 강한 사람에게 이끌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야.”
“.....”
라디가 다정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도란은 정점에 설 거니까 당연히 따라오는 사람도 많겠지?”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어?”
라디가 내 머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점찍은 남잔데. ...도란은 자신 없어?”
“.....”
당연히 자신 있다.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나는 비좁은 목구멍을 비집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너를 두고 다른 여자를 같이...”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혹시 언니 때문에 날 향한 마음이 줄어들었어?”
“그건 아니야, 절대...!!”
“그럼 뭐가 문제야, 오빠.”
“...난 네가 조금이라도 싫다면...”
“도란, 난 도란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상처받은 걸 모두 메꾸고도 넘칠 정도로. 나도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 비슷한 아픔이 있으니까. 오빠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니까.”
“.....”
“그리고 나도 아무나 괜찮다는 건 아냐. 아리엘 언니의 됨됨이를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만약 오빠가 속아서 불여우 같은 년을 데리고 오면 내가 묵사발을 내놓을걸? 그 여자 수프에 맹독 바늘을 숨겨두는 것도 괜찮겠네.”
“......”
멍하니 쳐다보자 라디가 피식 웃었다.
이내 새초롬하게 거리를 좁히더니 내 앞머리를 걷어주며 잔잔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아리엘 언니를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 더 말해줄 테니 잘 들어?”
“.....”
끄덕.
“...도란은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거라고 했지? 앞으로 성장해나가려면 강한 동료가 필요할 거야. 무슨 위험과 맞닥뜨릴지도 모르고, 약한 적이라도 방심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어제만 하더라도 아리엘 언니가 없었더라면 오빠는 죽었을지도 몰라. 상처 입은 오빠를 보고 내가 얼마나 가슴이 미어진 줄 알아?”
“...미안해.”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 못 도와준 내가 더 미안하지... 하지만 모험가로 살다 보면 어제처럼 크게 다치는 날이 반드시 또 올 거야. 오빠가 아니라 내가 다칠 수도 있어. 앞으로 점점 더 강한 적과 맞닥뜨릴 테고, 유능한 인재도 따라붙을 텐데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전부 내칠 거야? 날 도란의 발을 붙잡는 그런 나쁜 아내로 만들 셈이야?”
“그래도...”
“참... 미안하면 그만큼 더 애정을 쏟아주면 되는 거야. 전과 다름 없다고 느낄 수 있게. 우리 오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
“...내가 이것까진 말 안 하려 했는데..”
라디가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내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당장에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속삭였다.
“이전에 내가 베라스틴에 도착했던 날, 오빠랑 언니가 단둘이 저녁을 먹고 있었잖아.”
“...그렇지.”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태연했는지 알아?”
“.....”
눈길로 뒷말을 재촉하자 라디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오빠가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게 될 줄 알고 있었어. 그중에서도 아리엘 언니를 만나게 될 거란 것도.”
“그건... 무슨 의미야...?”
“내가 이전에 오빠보고 난봉꾼이라고 한 거 기억나? 그때 오빠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아니야, 전부 알고 말한 거야.”
“그건...”
“실비가 말해줬어. 앞으로 살다 보면 여러 사람이 오빠를 뒤따를 테고 그중에는 오빠를 공유해야 할 여자도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변심하지 않고 사랑할 자신이 있으면 그때 비로소 함께하라고 했어. 나는 옛적에 마음의 정리를 마쳤고.”
“실비...? 실비가 누군데.”
“.....”
“...설마 유적에서 만났던 여왕을 말하는 거야?”
“.....도란님, 제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요?”
라디가 내 고개를 붙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비가 내리고 난 뒤의 바다처럼 감파란 벽안이 날 들여다본다.
선연히 응시해오는 눈동자는 너무나 깊어 자칫하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란님, 아시겠죠? 제가 왜 언니를 받아들이라고 했는지.”
“.....”
“도란님.”
“....”
“...눈 감아요.”
라디가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팔에 힘을 싣는 그녀를 조금 강하게 끌어안았다.
온통 뒤죽박죽으로 혼재된 감정 탓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혼란 속 이 온기가 절실해서.
라디와 피부를 맞대고, 따스함을 느끼고, 마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로소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 각오해왔다는 걸.
오늘을 위해 각오하고. 고뇌하고. 번민하고. 홀로 고민하고. 또 반문하고. 끝내는 비감하며 결론을 내리고.
결심한 뒤에는 잔인한 현실에 슬퍼하고.
슬픔이 누그러질 때 즈음에는 전부 용서하고.
날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는지.
이제야 좀 가닥이 다잡히는 느낌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내 눈동자에 서서히 신념이 깃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라디가 천천히 품에서 멀어졌다.
“...조금 마음이 편해지셨어요?”
“그래.”
“이걸로 알겠죠? 제 마음이 어떤지. 왜 도란님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지. 또 내가 도란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날 힘껏 껴안고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요.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서 똑바로 말하고.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확인하고 꼬리를 살랑이며 뒤돌았다.
그 등에 대고 불렀다.
“라디야.”
“네, 말씀하세요.”
라디가 반 발자국 앞서나가다 말고 멈춰섰다. 옷자락 끄트머리가 소복하게 쌓인 눈을 스치자 반짝이는 빙설이 흩날렸다. 침엽수 사이로 새어들어온 겨울 햇살이 뺨에 기울고, 적색 문양이 서늘한 공기에 어우러져 찬연하게 빛났다.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그녀에게 전했다.
굳은 결의를 담아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오늘 이 선택을 절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
투명하게 피어나는 웃음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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