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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11화 (211/375)

〈 211화 〉 노예 #1

* * *

[211] 노예 #1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던 나들이가 끝난 뒤.

도시에 입장하기 위해 베라스틴 성문 앞에 늘어선 줄을 서던 중, 우리 차례가 되자 위병이 상투적인 어조로 읊조렸다.

“잠깐 거기 로브 뒤집어쓴 놈. 얼굴을 보이고 신원을 밝혀라.”

“.....”

이전까지는 일상적인 성문 앞 광경이었지만, 내가 후드를 젖히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거, 검은 머리..?!!”

“쉿...! 조용히 해! 사악한 흑마법사일지도 몰라!! 불과 며칠 전까지 이곳에 언데드가 돌아다녔다는데 혹시...”

“...근데 그런 것치고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조금 괜찮을지도...”

수근수근. 속닥속닥.

“흠흠... 조용히 해라!!”

위병이 창대를 내리찍어 소란을 진정시키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면갑을 들어올리자 썩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난번 마차를 타고 베라스틴에 왔을 때 도움을 받았던 인물.

위병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너냐... 이럴 거면 진작 말하지. 요즘 분위기 어수선한 거 뻔히 알면서. 사람들이 놀라잖아.”

“미안 미안, 그러니까 이름이...”

“케닌 인마. 반년 동안 뺀질나게 봐왔는데 아직도 못 외었냐?”

“그래, 고마워 케닌. 그럼 통과해도 돼?”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일단 검문은 해야지.”

그가 슬그머니 내 뒤편을 눈짓하자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기웃거리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하는 수 없이 수긍하고 케닌에게 짐을 검사받고 있자니 불현듯 그가 수통에 담긴 액체를 발견하고 물어왔다.

“야, 이건 뭐냐? 단순한 물은 아닌데? 어쩐지 탄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건... 오는 길에 슬라임을 잡아서 말이야. 마땅히 소재를 넣을 장소가 없어서 급한 대로 물통에다가 퍼담았지. 문제 있어?”

“아, 그런 거였냐. 파란 걸 보니 코발트 슬라임인가? 희귀한 놈인데 용케 잡았네. 야, 나머지 두 사람 짐은 네가 봐줘.”

“넵!!”

그가 턱짓으로 지시하자 부사수 한 명이 라디와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나는 천 주머니 안에 든 내용물을 흔들어 확인하는 케닌에게 말을 걸었다.

“...야, 근데 혹시 이곳에서 별일 없었냐?”

“별일? 뭐 말하는 건데.”

“그냥 요즘 베라스틴 말야. 이제 언데드도 거의 안 나온다며? 듣자 하니 주동자가 잡혔다는 소문이 있던데.”

넌지시 떠보자 그가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것 때문에 죽을 맛이다. 피난을 갔던 시민이 한 번에 몰려들어서 미어터질 지경이야. 너도 오면서 행렬 봤지?”

“그러게... 좀 심하네. 우리도 두 시간은 기다린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양반이지. 그저께까지만 해도 입성하려면 반나절 동안 기다려야 했어. 우리 성문 경비대도 대부분 도시 복구조에 차출돼서 며칠째 쉬지도 못하고 있다. ...그냥 죄다 뒤졌으면.”

“...위병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지 않냐?”

“왜, 찌르게? 내 알 바 아냐.”

녀석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는 설렁설렁 내 짐을 훑는가 싶더니 슬쩍 주변 눈치를 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근데 그거 들었냐? 이번 사건에 진범이 있다는 거.”

“진범?”

“어, 나도 내 동기들한테 전해 들은 건데... 언데드가 출몰한 원인이 사실은 기사단장 때문이라던데?”

“오... 정말?”

“그래! 두어 달 전부터 종적을 감추더니 아직도 행방불명이래. 행간에는 이미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심지어 그를 쓰러뜨린 상대가 지나가던 F랭크 모험가라는 말도 있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와, 엄청나네.”

미안 그거 나야.

물론 그를 죽인 건 누군가의 저주였지만.

눈을 크게 떠 최대한 놀란 모습을 가장하자 케닌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반응이 왜 그래. 아무튼, 그래서 요즘 병사들 사이에서 기사단장이랑 그 소문의 F랭크 모험가가 한참 화제...”

“케닌님!! 검문 끝났습니다!!”

“어! 그럼 들여보내!! ...너도 이제 가봐. 방금 들은 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그래, 이거 조금 남았는데 먹으면서 쉬엄쉬엄 해라.”

“오...! 역시 너는 말이 좀 통한다니까. 고맙다 새꺄.”

육포를 주머니를 넘겨주자 녀석이 내 등을 두드렸다.

그는 라디와 아리엘이 다가오자 후드 아래 미모를 확인하고 입을 쩍 벌리며 얼어붙었지만, 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는 것만으로 통과시켜주었다.

성문을 지나자 라디가 탄식하며 말했다.

“휴... 다행히 어찌어찌 안 걸렸네요. 혹시나 들키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게, 수통 안에 들어가서 다행이었지. 역시 물처럼 생겨서 그런지 유연성이 꽤 좋네 얘.”

­됴란?

“아직 안 돼. 좀만 더 기다리면 되니까 들어가 있어.”

고개를 내미는 운디네를 도로 수통 안으로 밀어넣었다. 혹시나 검문 도중 튀어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얌전히 숨어있어 줘서 다행이다.

당당하게 신고하고 성문을 통과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큰 소란이 일고 말았을 터. 정령 그 자체도 드물지만 정령과 친밀한 인간은 더더욱 드물 테니까.

더군다나 나는 여러모로 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끈덕지게 들러붙는 호객꾼들마저 떨쳐내자 아리엘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우음... 그래도 이제야 좀 활기가 돌기 시작하네. 며칠 전까지는 진짜 죽은 도시 같았는데.”

“그렇긴 하지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사람이 많아지니 아까부터 슬쩍슬쩍 이쪽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어서...”

“그게 다 라디가 귀여워서 그래! 아까 모험가들 반응 못 봤어? 혼이 쏙 나가서 발이 밟혀도 전혀 눈치 못 채던데?”

“남말은... 언니야말로 장난 아닌걸요? 아까 경비원은 입이 헤벌쭉하게 올라가서 누가 창을 뺏어가도 모르겠던데. 언니를 보려고 새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치유사 시절에도 여러 번 고백받았다면서요.”

“응? 그래도 난 이전부터 한 사람 말고는 관심 없...”

아리엘이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을 붉히고 날 곁눈질했다.

반응하기도 뭐해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건만, 라디는 아니었던지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일러바쳤다.

“도란님 도란님, 언니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데요?”

“라디야?!”

“왜요? 사실인데. 설마 아니에요...? 그럼 오늘 나눴던 고백은 전부...”

“그, 그만...!”

아리엘이 잽싸게 달려가 녀석의 입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라디는 날렵하게 빠져나와 눈짓으로 날 부추겼다.

아직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아리엘.”

“으, 응?”

갈팡질팡하는 어깨에 손을 얹자 흠칫 놀라는 기척이 전해져온다.

살며시 손가락을 구부리자 그녀의 여체에 딱딱한 긴장이 실렸다.

“읏...?! 도, 도란.. 조금 가까운 것 같은데... 여긴 밖...”

“아리엘.”

“.....”

“...아리엘은 내가 싫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즉답.

“그래? 그럼 이래도?”

살그머니 허리로 손을 뻗자 야릇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는 아리엘에게 짓궂은 미소를 피워올렸다.

“왜 그래?”

“으으...”

“....”

좋다.

갈증 속 탄산음료처럼 청량한 반응에 질릴 새가 없다.

이 좋은 걸 그간 참고 있었던가.

오랫동안 어깨를 짓눌러온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다.

라디와 대화를 나눈 뒤에야 나는 아리엘을 향한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녀 앞에 섰다.

마음은 이미 불어나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에 쌓인 감정을 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게 지금.

허둥지둥 우물쭈물 몸 둘 바를 모르는 아리엘을 보니 욕망이 샘솟았다.

라디가 약삭빠르게 눈치채고 배후로 다가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꺄악?! 자, 잠깐 라디야?!!”

“참나...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이제 언니도 서로 연인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기 보이는 골목길에서 찐하게 입맞춤이라도...”

“마, 말이 되는 소릴 해...!!”

“어라? 지금 살짝 기대하신 것 같은데.”

“아냐! 아니...!! 읏...”

아리엘이 바동거리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영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슬쩍 허리를 끌어당기자 우뚝 정지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져주며 속삭였다.

“...기대했어?”

“....”

“솔직하게.”

“...조, 조금은..”

“.....”

아 진짜 귀엽네.

나는 아리엘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급할 필요 없다. 이제 내 여자니까.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 놓아주자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라디가 실실 웃으며 내 귀를 꼬집었다.

“누가 보면 선수라고 해도 믿겠네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요?”

“어디서 배웠긴, 다 너한테 배웠지.”

“흐음... 이젠 능청스럽기까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온갖 궁상이란 궁상은 죄다 떨어대더니.”

“흠흠... 그건 지나간 일이란 걸로.”

헛기침하며 화제를 피했다.

라디에게도 가볍게 뽀뽀해준 뒤 가도를 나아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외각 쪽으로 가면 저택이 나온다. 이제는 단순히 식객을 넘어서 동거인이란 이름으로 같이 살 저택이.

나는 잠시 멈춰섰다.

“응...? 도란님, 어디 가게요?”

“어, 잠깐 살 게 있어서 어디 좀 들렀다 올게. 둘이 먼저 집에 가 있어.”

“같이 가요 그럼.”

“아냐, 잠깐이면 되니까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대신 이거 좀 맡아줄래?”

라디한테 운디네가 담긴 수통을 건네주었다. 의아하게 쳐다봐오는 두 녀석에게 손을 흔들며 잠시 작별하고 북쪽을 향해 걷자 높게 솟은 석조 건물과 깔끔하게 정돈된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대로를 거닐던 행인 한 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미안해요. 제가 좀 바빠... 무, 무슨 일이시죠?”

“길을 좀 여쭈어보려 했는데...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죠. 실례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자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내 행색을 보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후드 아래로 눈을 마주치니 얼굴을 상기시키며 굳어버렸다.

나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 근처에 다과를 파는 가게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이, 이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하얀색 간판이 나와요! 건물 앞에 화덕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

발길을 돌리는 찰나 여성이 다급하게 외쳤다.

“....?”

“아, 아니 저... 혹시 시간 있으시면 이따가 저랑 차라도 한 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배낭끈을 움켜쥐고 대로를 걷다 보니 여자가 말했던 대로 하얀 간판 건물이 나왔다.

­딸랑...

“.....”

고풍스러운 장식이 가미된 단풍나무 스윙도어를 젖히고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두리번거리며 가게 내부를 탐색하고 있자니 한 젊은 여성 점원이 내게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동백 양과점에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시 신분증이나 그 외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으신지요?”

고작 과자 하나 사는데 신분증?

주위를 둘러보고 납득했다. 유복한 북쪽 거리에 있어서 그런지 점포 내 손님은 대부분 양질의 의복을 껴입은 부유층이었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날 따가운 눈초리로 흘겨보고 있었다.

수상쩍은 로브 차림에 커다란 배낭까지 짊어지고 있으니 당연하지.

여기서 F랭크 목패를 보여줬다간 이런저런 트집을 핑계로 쫓겨날 수도 있을 터, 마침 내겐 더 좋은 물건이 있다.

품속에서 얇은 금속판을 꺼내자 점원이 의아하게 확인하더니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이, 이건...! 부, 붉은 매 길드?!!!”

“뭐?!!”

“붉은 매 길드원이 이런 곳에 있다고...?!”

“지금 던전 공략 때문에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붉은 매 길드면 우리 왕국의 최고 유명 모험가 파티 중 하나잖아!! 설마 전투원은 아니겠지...?!”

순식간에 점포 내부 모든 이목이 쏠렸다.

묵묵히 시선을 흘려넘기자 점원이 패를 매만지며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 진짜 진품이야.. 어떻게...”

“이제 돌려주시죠.”

그녀의 손에서 길드 패를 낚아챘다. 품 안쪽 주머니에 잘 갈무리하고 고개를 드니 나를 바라보는 점원의 시선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저... 모험가님, 혹시 제가 도와드릴 건...”

“선물로 쓸 달달한 과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자 입맛에 맞는 거로요. 아, 그리고 젤리가 있으면 좋겠네요.”

“아, 안내하겠습니다.”

점원을 뒤따라 점포 내부를 가로질렀다.

처음엔 내 행색을 보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썰물처럼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명 파티의 일원이라는 건 그만큼 선망받는 존재니까.

실상은 하이랭커는커녕 F랭크지만.

후드 안쪽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자 점원이 얼굴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혹시 선물을 드릴 여성분이라는 게... 애인인가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녜요...!”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젓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손님이 찾으시던 젤리는 지금 여기 있는 게 전부입니다. 워낙 고가라 사 가시는 분이 별로 없거든요... 대신 그 외에도 다른 양과들이 있으니 한번...”

“전부 주세요.”

“네?”

“여기 선반에 있는 젤리 전부랑 가게에서 제일 잘 팔리는 디저트로 하나씩... 아니, 두 개씩 담아 주세요. 점원분이 따로 추천하시는 다과가 있으면 그것도 담아 주시고요.”

“아... 네, 넵!! 알겠습니다!”

점원이 발 빠르게 달려나가 짚 바구니에 상품을 쓸어담았다.

건물 인테리어를 흥미롭게 살피며 계산대에서 기다리자 잠시 후, 점원이 헐레벌떡 뛰어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한데 장부에 상품을 기록하는 점원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 그런 건 아닌데... 막상 더해보니 가격이 좀 많이 나와서... 도합 17실링 2페니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음...”

살짝 모자라다.

나들이를 나올 때 들고나온 돈은 15실링 남짓. 갑자기 이런 지출을 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까닭이다.

하는 수 없이 몇 개 덜어내고자 손을 뻗은 순간­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누군가가 내 팔을 가로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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