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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12화 (212/375)

〈 212화 〉 노예 #2

* * *

[212] 노예 #2

무상의 호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가 처음 본 중년이라면 더더욱.

경계하며 쳐다봤지만, 내 팔을 가로막았던 남성은 개의치 않고 점원에게 금화를 내밀었다.

“거기 점원 아가씨? 이걸로 이분 몫까지 계산해주시오. 포장은 따로따로 해주면 좋겠군요.”

“아... 예 알겠습니다. 어느 주머니에다가 담아드리면 될까요? 저희 가게에서는 여러 종류의 포장재를 취급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한 분께 선물을 원하신다면...”

“저기 걸려 있는 가죽이 좋아 보이는군요. 이쪽도 마찬가지로 해주시오.”

“네, 송아지 가죽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추가 금액은 각각 2실링입니다.”

“.....”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곤 잔돈을 받아 챙겼다.

나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뇨. 전 단지...”

“내게서 뭔가를 뜯어낼 속셈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내가 너 같은 새끼 한두 번...”

“이런... 혹시나 했더니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접니다, 저.”

그가 중절모를 벗자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두상이 나왔다. 아니, 정수리가 텅텅 빈 걸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이 맞다.

“뭐, 뭐야...? 너 얼마 전에 그...”

“네, 맞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나으리가 구해주셨던 노예 상인, 돌킨입니다.”

그가 모자를 덮으며 미소지었다.

*

양과점을 나오자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계산을 마친 과자 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달고 후드를 고쳐 쓰자 그가 잇따라 가게에서 나왔다.

“이거... 나리를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하...”

“나란들 알았겠냐. 그런데 좀 살만한가 봐? 못 알아보겠다.”

지하에서 빠져나오고 3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 오랜만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시간이지만 그는 이전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환골탈태해 있었다.

잔뜩 때가 끼고 더러웠던 피부에선 윤기가 좔좔 흘렀고, 고급스러운 기조가 들어간 옥색 양복은 한눈에 보아도 돈깨나 들였을 것 같다.

번뜩이는 뾰족구두는 어찌나 광을 냈는지 파리조차 미끄러질 지경이었다.

돌킨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자니 그가 금테 안경줄을 찰랑거리며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원래도 쌓아둔 재산이 꽤 됐지만, 나으리 덕분에 저희 업계는 대규모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도시 복구작업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쏟아 부어져 곳곳에서 건설용 육체노동 노예를 찾는 고객이 줄을 섰거든요! 기존 시세의 배를 웃도는 가격에 매각하고 있습니다. 없어서 못 팔 정도라니까요?”

“오... 그래? 축하한다. 앞으로도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네.”

“.....”

그가 입을 쩍 벌렸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돌킨이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아, 아니 설마... 나으리께 이렇게까지 다정한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대체 넌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개미 간식으로 던져 주고 이교도의 목을 싹둑싹둑 썰어대면서 단신으로 이백이 넘는 기사와 맞서 싸우고 유유히 걸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

“그런데... 어떻게 나리 같은 실력자가 아직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납득이 갑니다. 붉은 매 길드의 단원이셨다면...”

“난 그쪽 길드원 아냐.”

“예...?”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돌킨에게 길드 패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그냥 아니스 씨한테 선물로 받은 거야. 호의의 표시로.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쓰라고 했어.”

“자, 잠깐만요...! 같은 일원도 아닌데 길드 패를 선물로 받았다뇨?! 그게 더 대단한데 말이죠... 게다가 붉은 매 길드의 단장이자 공작가의 따님이신 아니스 님에게 직접 받았다니... 그분과는 대체 무슨 사이십니까...?”

“딱히? 아무 사이도 아냐. 그리고 길드 가입 권유를 아예 안 받은 건 아니야. 내 쪽에서 거절했거든.”

“대체 나으리는...”

돌킨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배낭을 고쳐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는 이제 가볼게. 앞으로 몸조심하고 장사 열심히 해. 이 과자는 잘 고맙게 받을게.”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혹시 지금 한가하십니까?”

“응? 당장 일정은 없는데 왜?”

“이전부터 저희 매장에 초대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유가 있으시다면 지금 한 번 둘러보고 가시죠!!”

“흠....”

노예는 딱히 필요 없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희 매장은 노예를 주로 취급하고는 있습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희는 늘 다양한 손님의 입맛에 맞출 수 있도록 다채로운 상품을 구비 중이니까요! 모험가이신 나리님께도 분명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을 겁니다!”

“....”

“아...! 억지로 권유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지갑을 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어떤 상품이든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긴 한데...”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네 가게에서 마물 관련 상품도 판매하나?”

“마물 관련 상품이라고 하면 혹시... 전번에 봤던 개미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수조 같은 거? 마력을 담을 수 있는 용기라던가 휴대하기 편한 수통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호숫가에서 자생하는 수생 식물도 구할 수 있는지 궁금하고.”

돌킨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가 말한 사항을 조합해보더니 능청스러운 웃음을 띠며 물어왔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운디네라도 기르시렵니까?”

“....”

­씨익.

그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남쪽으로 내려오니 많은 변화가 느껴졌다.

“...여기는 여전하네.”

대낮부터 술에 취해 구걸하러 다가오는 비렁뱅이를 지나쳤다. 바닥엔 녹아내린 눈이 진창을 이뤄 발을 내딛기가 영 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남쪽 구획에 접어들었을 시점부터 도로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졌고, 석제 주택보단 허름한 판잣집의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노면에 패인 바큇살 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돌킨이 한 건물 앞에 멈춰서며 느긋하게 읊조렸다.

“이곳이 바로 제 점포입니다. 제법 크죠?”

“...장난 아닌데.”

도처에 늘어선 주택과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건물은 상가라기보단 대저택에 가까웠다. 근처에서는 보기 드문 푸른색 외장재를 써 눈에 확 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업적 용도에도 충실하다고 봐야겠지만.

내심 감탄하며 올려다보자 그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정문을 열었다.

“이래 봬도 나름 베라스틴에서 제일 큰 노예 거래소입니다. 제 일생일대의 업적이죠! 저는 유년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일생을 보냈지만 악착같이 노력해서 이 건물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

얌전히 그를 쫓아 드넓은 부지를 가로질렀다. 고풍스러운 석상과 물이 졸졸 흐르는 분수대를 지나치자 거대한 현관이 나왔다. 문간을 장식한 금도금 사자상은 졸부 특유의 허식이 없잖아 있었지만 돈을 아끼지 않은 듯한 주위 배경과 어우러지자 그럭저럭 어울렸다.

‘소비층에 맞춰서 인테리어를 한 건가.’

아무래도 노예 구매를 원하는 손님 대다수는 가난한 서민보단 부유층일 테니까.

돌킨은 내게 잠시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더니 머잖아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럼 들어오시죠 나으리.”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길래.”

“별거 아닙니다. 자 자.”

그의 등쌀에 떠밀려 가게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목도한 것은, 끝도 없이 뻗어 나간 검은 양탄자와 좌우로 길게 도열한 시종의 향연이었다.

미목수려한 남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

왕실 근위병처럼 각을 맞춘 그 모습에 말문을 상실하자 돌킨이 웃으며 말했다.

“다 저희 가게의 노예들입니다.”

“...야.”

“예, 말씀하시죠 나으리.”

“원래 이런 거냐?”

“그럴 리가요. 나리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입니다.”

“....지나치게 과분한데.”

행렬 사이에서 세 시종이 걸어나왔다. 집사복을 차려입은 남성이 내 배낭을 건네받았고, 한 메이드가 외투를 벗기는 사이 다른 하녀가 내 목덜미에 은은한 향유를 뿌려주었다.

돌킨이 두툼한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나으리가 오실 걸 대비해 전부 새로 주문했습니다. 나리의 머리 색에 맞춰 검은 양탄자를 구매해 봤는데 워낙 매물이 없어서 주문 제작을 의뢰하는데 금화가 두 자루나 들어갔습니다. 사실 조금 더 일찍 방문하실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왔지...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런 대접은 필요 없는데.”

“제 최소한의 성의입니다. 나으리가 목숨을 구해주신 덕에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니까요. 딸아이가 얼마나 감사해했는지 모릅니다.”

“.....”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끄트머리에 금자수가 들어간 흑색 융단을 거닐자 푹신한 감촉에 발이 즐거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양탄자 외에도 검은색으로 깔맞춤한 실내 장식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극진한 대접에 고마워했을 법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오니 불편한 심정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 아니 지구에서도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아본 건 처음이 아니었던가.

떡하니 머리 위를 장식한 초대형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건 얼마나 하냐.”

“샹들리에 말이신가요? 아마 금화 이백 닢 정도 들였을 겁니다. 테오다란 공국의 유명한 드워프 장인에게 주문해 만든 수공예품이죠. 저희 거래소의 자랑과도 같은 물건입니다.”

“괜히 물어봤네. 어질어질하다.”

“하하... 비현실적인 가격이긴 하죠.”

“아니, 노예 한 번 팔아먹는데 이 정도의 정성이 필요한 거야?”

“.....”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진중한 어조로 자신의 철학을 토로했다.

“이전처럼 노예를 짐승같이 다루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상질의 의복을 입혀 판매하는 게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과엔 더욱 큰 이득을 불러오리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고객 만족도도 훨씬 높고 노예의 가치도 상승하니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 사실... 후환이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간 베그디아 님께 신벌을 받고 말 테니까요. 부패한 기사와 이교도가 나리께 숙청당했듯이 말입니다.”

“.....”

하긴, 이 세계에선 신의 권위가 상당했지.

속으로 납득하며 뒤따라 걷고 있자니 돌킨의 발길이 멎었다.

“자, 이곳이 바로 저희 매장의 욕실입니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이지요.”

“욕실? 난데없이 욕실은 왜...”

“배낭을 보아하니 나리는 며칠간 여행을 다녀오신 모양이더군요. 그렇다면 여독도 풀고 따뜻하게 몸도 녹일 겸 반신욕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동안 저는 나으리가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상품이 있나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정령 관련 설비를 구매하려는 고객은 전무해서 말입죠....”

“.....”

“저희 매장의 욕실 설비는 귀족 사이에서도 호평이 자자한 만큼 나리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

뭐... 잠깐 정도라면.

성의를 무시하기도 미안하고 집에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줄 수 있겠어?”

“예, 예...! 물론입죠!! 뭐든 말씀만 하십쇼 나으리!!”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내가 말하는 주소로 사람 좀 보내줘. 집에 애인이 기다리고 있거든. 늦는다고 말은 해둬야지.”

“알겠습니다! 당장 제 시종을 보내서 뒤탈이 생기지 않도록 잘 설명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저택의 위치를 설명하고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돌킨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 지금 나으리를 받드는 모든 노예는 엄선된 처녀들이니 안심하고 건드리셔도 됩니다. 청결과 위생 관리 또한 철저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뭐?”

“이 여자들은 전부 나리의 씨앗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별도로 마련된 침실에서...”

“필요 없어.”

단칼에 거절했다.

누구 가정 파탄낼 일 있나...

어쩌다 보니 라디에 더불어 아리엘까지 애인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연인을 늘릴 생각은 없다. 당연하지만 둘 외에 다른 여자와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를 함께할 생각도 없고.

내게 연인은 두 명으로 족하다.

아마도...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갔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고 발길을 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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