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노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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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노예 #3
“...이 정도면 과연 자랑할 만하네.”
욕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날 맞이한 건, 눈이 부실 정도로 거대한 채광창과 코끼리도 수용하고 남을 듯한 규모의 욕조였다.
스케일에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등 뒤로 중후한 문이 닫히며 다소곳이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 두 명이 다가왔다.
“뭐, 뭐야...!”
“.....”
그녀들은 내가 당황하건 말건 담담하게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재빨리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내 옷은 내가 벗을 테니까 놔둬.”
“.....”
두 메이드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곤란한 듯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재차 내 옷을 풀어나갔다.
자연스럽게 손을 걷어내며 말했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만둬. 돌킨한테 무슨 명령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귀족도 뭣도 아니야. 이런 대접을 받아도 곤란하다고.”
“.....”
끄덕.
그녀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고자 손을 뻗었다.
한데...
“.....”
“....”
“...계속 보고 있을 거야?”
두 메이드는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그제야 욕실 구석으로 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하아...’
역시 누군가를 하인으로 부리는 건 거북하다.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모를까, 갑자기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개인 영역을 침범받아봤자 좋을 리 없으니까.
귀족 중에는 이러한 대우를 선호하다 못해 당연시하는 자들도 있지만, 내게는 그저 괴팍한 취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벗은 옷을 옷걸이에 걸고 대충 머리에 물을 끼얹은 뒤 욕조로 다가가자 찰랑거리는 수면이 보였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발을 담그자 후끈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풍덩!!!
“흐으...”
뜨끈뜨끈하니 좋다.
몸에 축적되었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살짝 뜨거운 수온이 지금 내겐 딱 적절하게 느껴졌다. 고급 입욕제를 넣었는지 새하얀 욕조물에선 은은한 우유 향이 감돌았고, 붉은 꽃잎이 수면을 떠다니며 적절하게 몸을 가려주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찬바람이 흑발을 간질이자 절로 푸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좋네.... 돌아갈 때 입욕제나 몇 개 받아 갈까?”
집에도 욕조가 있으니 충분히 온욕을 즐길 수 있다. 어쩌면 다음번엔 다 함께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라디는 이미 몇 번 경험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부끄러워하는 아리엘을 데리고 들어가려면 잘 구슬려야 할 테지만.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다.
머리까지 잠겨들어가며 온욕을 만끽하고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두 메이드가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왜, 아직 뭐가 남았어?”
“.....”
한 메이드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물 온도는 적당하신가요?”
“그래, 최고야. 돌킨이 꼭 들려보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네. 고마워.”
“....!”
내 말에 안심했는지, 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른 메이드가 어색하게 물어왔다.
“으, 음료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원하시는 종류가 있으시면...”
“뭐 뭐 있는데?”
“도, 도련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최고급 홍차부터 차가운 과실주, 도수 높은 증류주까지...”
“그냥 시원한 물이나 한잔 갖다 줘.”
“아... 옛...!! 혹시 안주는 어떤 걸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안주? 안주는 딱히... 아, 달콤한 과자가 있으면 조금 부탁할게.”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육중한 출입문이 닫히고 난 뒤로는 드넓은 욕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메이드와 단둘이 있기도 무안한 바, 재빨리 화제를 만들어냈다.
“크흠... 그... 외모가 닮았던데, 방금 전 얘는 네 쌍둥이야...?”
“죄송합니다!!”
그녀가 바닥에 머리를 찧을 기세로 엎드렸다.
깜짝 놀라 욕조에서 상체를 내밀며 내려다봤다.
“어, 어... 왜...?”
“제 동생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고용된 지 얼마 안 되어 미숙한 아이니 제발 선처해주십시오!! 대신 제가 무슨 짓이든 하겠으니...!”
“자, 잠깐...!”
그녀가 엎드린 채 황급히 옷을 벗기 시작하기에 덥석 팔목을 붙잡았다.
“무례도 안 범했고 그냥 물어본 거야! 해코지할 생각 없으니까 일단 진정해!! 돌킨 이 새끼는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
“.....”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내 특정 부위로 향했다.
재빨리 다시 탕으로 들어가며 내뱉었다.
“어, 어쨌든 너희가 이상한 짓만 안 하면 상관없어. ...돌킨한테 이르지도 않을 거고.”
“감사합니다!”
메이드가 재차 머리를 숙였다. 마치 왕을 모시는 듯 깍듯한 태도에서 나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아니, 진짜 뭐라고 말을 해야 이렇게 벌벌 떠는 거야?’
지하에서 한 짓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지만...
꼭 무슨 진짜 악마를 눈앞에 둔 사람 같다.
지근거리는 골을 짚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쟁반을 든 일전의 메이드가 나타났다.
그녀가 욕조 옆 탁자에 접시와 다과를 세팅하기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난 물만 있으면 돼. 가져온 건 너희 다 먹어.”
“네...? 하지만...”
“나 단 거 싫어해. 처음부터 너희 주려고 주문한 거야.”
쟁반에서 얼음물이 담긴 잔을 쥐고 들이켰다.
두 메이드는 멍하게 서로를 마주보는가 싶더니 돌연 반색하며 기뻐했다. 곧바로 내 눈치를 보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았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다.
아무리 대우가 괜찮다고는 해도 노예는 단 음식을 맛보기 어려울 테니까.
내심 흐뭇하게 두 자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다.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지?”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변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아까 너희도 그렇고 다른 시종도 말을 굉장히 아끼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저희 노예는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습니다. 저희가 입을 열 때는 손님의 부름에 답할 때뿐입니다.”
“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
“간혹 손님 중에는 노예가 부주의하게 말을 걸어오는 걸 무례로 받아들이는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서...”
하기야, 나는 억울하게 노예살이를 한 전적이 있으니 선입견이 없지만, 일부 시민이나 귀족 중에는 차별 의식을 지닌 사람도 있을 법하다. 지구의 중세만 하더라도 노예는 물건만도 못한 취급을 받곤 했으니까.
더군다나 그런 규정이 없으면 자기를 고용해달라고 끈질기게 치근덕대는 노예도 있을 터. 노예의 업무 강도는 주인에 따라 많이 갈리는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손님이 있으면 누구나 탐이 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며 다음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럼... 저기 보이는 매트리스의 용도는...”
욕실 한구석에는 깔개를 씌운 커다란 매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매트 그 자체만으로는 이상할 게 없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위화감이 장난 아니다. 마치 허름한 시골 마을회관에 들어선 호화 칵테일바 같은 느낌.
설마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메이드가 태연하게 답했다.
“저 침대는 언제라도 도련님의 봉사에 응하기 위해 마련한 설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른 메이드를 불러오겠으니.”
“자, 잠깐...! 다른 메이드를 불러온다는 건...?”
“도련님의 피로를 확실히 풀어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혹여나 원하시는 체형과 취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곧바로...”
“필요 없어!!”
정말 나는 어떤 인물로 알려진 걸까.
밖에 나가면 반드시 돌킨을 한 대 쥐어박아야겠다고 각오하며 피로에 젖은 한숨을 내쉬자 스르륵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이번엔 쌍둥이 동생 쪽이 막 의복을 탈의하려던 차였다.
“...너 뭐하냐?”
“네? 하지만 방금 도련님이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
메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대체 내 말을 어떻게 곡해하면 그렇게 들리는지.
차마 대꾸하지 못한 채 미간을 짚고 있자니 옆에 있던 메이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주제넘지만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제 동생은 아직 어려서 도련님의 물건을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대신 충분히 흡족해하실 때까지 제가 극진히 봉사해드리겠으니 부디 이 아이는...”
“언니! 무슨 소리야 어차피 쌍둥이라서 안쪽 사이즈도 똑같으면서.”
“넌...! 아, 아닙니다 도련님, 부디...”
“생각 없으니 둘 다 그만해. 한 번 더 언급하면 화낼 거야.”
단호하게 말을 끊어 그럴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하지만... 도련님의 시종을 안 들면 저희가 혼나요...”
“...돌킨한테는 알아서 잘 둘러둘 테니 걱정 마. 집에 애인이 기다리고 있단 말야. 너희를 건드리면 내가 죽어.”
“아...”
두 메이드는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꽤나 집요한 녀석들이다. 명령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은...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살짝 다르네.’
방금 깨달은 사실이지만 눈앞의 두 하녀는 메이드복의 디자인도 살짝 달랐다. 천 면적도 적을뿐더러 옷감이 훨씬 얇아 햇빛이 드리울 때마다 속살이 내비쳤다.
특히 치마가 너무 아슬아슬해서 실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하면...
“.....”
재빨리 고개를 틀자 자그마한 비명이 들려왔다.
냉수를 들이켜며 속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도련님...?”
“...왜.”
“저기 보이는 다과... 정말로 도련님이 안 드실 거면 지금 먹어도 될까요...?”
“그래.”
“감사합니다...! 이대로 들고 나가면 손님 음식을 빼돌렸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신이 나 접시를 집어들었다.
조금 씁쓸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자 이번엔 언니 메이드가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도련님은 모험가라고 하셨죠?”
“그래.”
“모험가 중에는 난폭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도련님은 정말 자상하시네요... 게다가 저희 주인님이 거듭 주의를 주셔서 무서운 분이실 줄만 알았는데 예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다르셔서...”
“.....”
뭐, 조금은 괜찮겠지.
“...나도 너희처럼 노예일 때가 있었거든.”
“네...? 도련님이요?”
“그래, 그래도 오랫동안 노예로 있었던 건 아니야. 기껏해야 반년 정도?”
“하지만... 도련님은 어쩌다가 노예가 되신 겁니까...?!”
“나? 딱히 특별한 사유가 있는 건 아니었어. 재작년 즈음에 난 숲속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내가 은거하던 동굴에 노예 사냥꾼들이 찾아왔거든.”
“노, 노예 사냥꾼...?! 그 천인공노할 자들이...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반가워했다가 자고 일어나 보니 손발이 묶여있더라. 인신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놈들이었어.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범죄 노예로 둔갑해 파는 놈들 있잖아. 그렇게 마계 대륙에 팔려 갔지.”
정적.
메이드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마계... 대륙.. 말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그곳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딱 한 종족 빼고...”
그녀가 내 흑발을 곁눈질했기에 머쓱하게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거기도 생태계는 많이 다르지만 동식물이 살아가긴 하거든. 나처럼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정착촌도 있고. ...하지만 엄청 열악해서 나도 반년밖에 못 버티고 기적적으로 도망쳐 나왔어. 불법 무역선에 몰래 훔쳐 타서.”
“...탈출했단 말입니까? 자력으로...?”
“아니. 거긴 절대로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어. ...다행히 조력자가 한 명 있었지.”
“조력자...? 하지만 마계 대륙에서 조력자라면....”
“쉿. 거기까지.”
나는 검지를 들어올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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