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노예 #5
* * *
[215] 노예 #5
살인마를 목격한 적이 있는가?
과거 막 마계 대륙에서 탈출했을 무렵의 일이다.
나는 베라스틴으로 오던 길에 한 외딴 마을에서 묵게 된다.
당시 촌락에는 나를 포함해 외지인이 셋 있었고, 마을 이장은 흔쾌히 우리를 맞이했다.
그는 마실 물과 따뜻한 음식, 의복을 제공했고, 마을 구석의 빈 별채를 내주어 며칠 밤을 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위화감이 치밀었다. 필시 외부인을 꺼려야 할 폐쇄적인 촌락에서 그가 우리를 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나는 새벽에 몰래 나가 마을을 둘러보았고, 곧 섬뜩한 광경을 목격했다.
마을 이장이 토막 난 외지인을 수로에 유기하는 것을.
그가 사라진 골목길에는 짙은 혈향이 맴돌았고, 어슴푸레한 달빛을 반사한 핏자국이 요사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마을 주민들로부터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겨왔기에.
그리고 그때와 비슷한 냄새를 지금 맡았다.
‘윽...’
격리실에 들어가자마자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훅 끼쳐왔다.
위험을 감지할 때면 여지없이 맡았던 혈향이 비강을 맴돌았다.
피부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공기는 조금 습하고 더웠다.
불쾌함이 치밀어 옷깃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허리춤의 단도를 확인하자 돌킨이 불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저,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곳은 나리가 볼 만한 노예가 없을 텐데... 상당히 열악하기도 하고요...”
“잠깐 둘러보기만 할 거야. 조명 있어?”
“...여기 있습니다.”
돌킨이 내게 등유 랜턴을 건넸다.
나는 삐걱거리는 손잡이를 받아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격리실이란 장소에 대해 호기심이 동한 건 사실이지만, 빼곡한 철창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곳은 판매 목적으로 노예를 진열해두는 곳이 아니라 수용소, 따지자면 사설 감옥에 가깝다는 사실을.
마른침을 삼키며 뒤따라오는 그에게 물었다.
“일부러 이렇게까지 어둡게 해 둔 이유가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수감자들이 쓸데없는 일로 흥분하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다들 한가락 하던 놈들이라 조금만 풀어주면 소란이 끊이질 않거든요. ...불과 며칠 전에도 큰 소동이 일어나 수습하느라 애먹었습니다.”
“그런가...”
좁은 보폭으로 격리실을 거닐었다. 수감동 바닥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얼룩과 말라붙은 타액이 즐비했다. 배수로에는 엉겨 붙은 머리카락과 핏덩어리가 산재해 얼마 전에 큰 불화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돌바닥에 손바닥 모양으로 패인 홈을 부츠 끝으로 디디며 물었다.
“...중범죄자라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놈도 있을 텐데, 어떻게 구속해 놓은 거지?”
“아, 그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돌킨이 빈 철창을 젖히고 들어가더니 낑낑거리며 묵직한 쇳덩어리를 끌고 나왔다.
그는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손안에 든 황금색 물체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건 특수 제작한 족쇄와 수갑입니다.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는 미다스 금속이 함유되어 있죠. 나리도 들어보셨겠지만 이곳 베라스틴의 성벽에도 이 물질이 소량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엄청 고가지만요.”
“미다스 금속이라...”
이전에 말톤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다. 금빛을 띠는 어떤 금속을 창날에 녹여 마물에게 꽂아넣으면 쉬이 마법을 발동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마법사의 공격을 막는 방패로도 만들 수 있고 방벽을 보강하는 등 다방면으로 쓰이는 금속이지만, 어마어마하게 무거울뿐더러 가격이 몹시 비싼 까닭에 나와는 인연이 없어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철창 너머, 조용히 숨죽인 채 이쪽을 응시하는 검은 형체들을 흘겨보며 걷고 있자니 불현듯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서정적인 음률에 이끌려 한 우리를 향하자 그곳엔 한 노인이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그가 휘파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흐흐... 불쌍한 반푼이 꼬맹이로군. 아직 젖도 못 뗀 애송이가 이곳에는 어쩐 일로 왔나?”
“.....”
철창에 가까이 다가서자 돌킨이 서둘러 제지해왔다.
“...왜.”
“조심하세요... 아무리 나리라도 방심했다간...”
“대단한 놈이야?”
“네...! 이 작자는 바닷가 출신인데, 뱃사람 사이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해적이랍니다...! 현상금이 무려 이백 파운드나 붙었었죠! 항간에는 이자한테 침몰당한 범선이 모여 작은 섬을 이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
그 정도면 최소 A랭크 수준이란 소린데...
과연 돌킨의 말이 허명은 아니었던지 눈앞의 노인은 여느 노생처럼 기력이 쇠하기는커녕 두 눈이 야수처럼 번뜩거렸고, 말랐지만 근육질인 체구 곳곳에는 하얀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지가 묶인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마주치자마자 소름이 돋았을 정도의 기척.
“...이런 녀석이 어떻게 잡힌 거야?”
“그건 저도 잘... 제 발로 해군 주둔지에 걸어들어와 자수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저도 몇 번 넘겨받은 거라 잘은 모르겠습니다. 사실 며칠 전 소란도 이곳 간수가 규칙을 어기고 이자에게 접근했다가 사달이...”
“아, 그 똑똑이 말인가? 날 풀어줄 테니 숨겨둔 금은보화를 절반 내놓으라더군. 그래서 금화 대신 두 귀를 물어뜯어 주었지. 바닥을 기며 재잘거리는 게 보기 좋더군.”
“푸하하하하!!! 그놈 꼴을 네놈들이 직접 봤어야 하는데!!!”
“꼭 옹알이하는 갓난아기를 보는 줄 알았다니까?!! 크하하핫!!!”
“.....”
노인이 말을 마치자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 죄수가 창살을 붙잡고 흔들며 고성을 질렀고, 어떤 노예는 족쇄에 묶인 발을 요란하게 구르며 쇳소리를 자아냈다.
원색적인 희락이 가득한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그들 중심에 서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어깨를 잔뜩 움츠린 돌킨에게까지 시선이 미쳤다.
“...네가 겁먹으면 어쩌잔 거야.”
“하, 하지만... 이 자들은...”
“어이, 돌킨. 언제부터 이곳이 보육원이 되었나?”
“저 벌벌 떠는 것 좀 봐!! 첫날밤 새색시도 저렇게는 안 떨겠다!!!”
“크하하하핫!!! 주인이 노예에게 쪼는 꼴이라니!!”
한 사내가 손가락질하자 재차 웃음이 터져나왔다. 죄수들은 지레 얼어붙은 돌킨을 응시하며 조롱했고, 쩔그럭거리는 쇠사슬로 요란하게 바닥을 긁어대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과거에 해적이라 불리었던 노인이 손가락을 퉁기자 모든 소란이 멎어들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봐, 반푼이 악마. 너 같은 놈이 왜 거기에 있는 거지.”
“...무슨 뜻이지.”
“네놈, 피라미인 줄 알았는데 잘 보니 고래 새끼였군. 너는 그곳에 있는 것보다 우리 안에 갇혀 사는 게 더 어울릴 텐데. 대체 얼마나 많은 주검을 딛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냐.”
“꼭 고든 같은 소리를 하는군.”
구태여 어울려줄 필요도 없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 찰나 주위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불쑥 측면에서 새하얀 손이 뻗어나와 내 로브를 붙잡았다.
나는 즉각 단도로 팔뚝을 절단했으나, 동료 수감자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학적인 웃음은 귓전을 따갑게 맴돌았다.
일말의 도덕성조차 거세된 시선들.
노인이 내 등 뒤에 대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봐, 햇병아리. 넌 우리를 구경하러 이곳에 들어온 것 같은데... 지금은 누가 봐도 네가 구경거리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
잠시 멈추어 물었다.
“...날 굳이 불러세운 이유가 뭐지?”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한 번 더 기억해두기 위해서지. 우린 머잖아 다시 볼 것 같군.”
“....”
나는 가볍게 비웃어 화답했다.
내게 침을 뱉으려는 수감자의 혀를 단도로 찢어발기며
“그래, 그 말 다음번에도 꼭 내 면전에서 해줬으면 좋겠네.”
가뿐히 발걸음을 이어나가자 돌킨이 찢겨나간 옷소매를 부여잡으며 뒤따라왔다.
“헉... 헉... 큰일 날 뻔헸네... 나, 나리 같이 좀 가주십시오...!”
“뭐야, 깜빡 잊고 있었네. 괜찮아?”
“이, 이래서 제가 이곳에 들어오길 꺼렸던 겁니다...! 전국에서 흉악범이란 흉악범들은 죄다 긁어모아 놨더니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벌을 주고 훈육해도 오히려 기세등등해지며 날뛰기만 하고... 이 자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입니다 짐승!!”
“그러게, 감옥도 과분해 보이네. 괜히 기분만 잡쳤어. 이놈들도 전부 영주성에서 신변을 요구한 노예들이라 이거지?”
“예, 예...! 그렇습니다!!”
“.....”
뭐, 위험한 건설 현장이나 군사 훈련에 써먹으려는 건가.
내 알 바 아니다.
발길을 재촉해 수용소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콜록...”
미약한 기침 소리가 내 발목을 붙들었다.
*
사소한 일이었다.
그대로 문을 밀고 나갔을 수도 있었다.
고즈넉한 홍차 한잔에 방금 본 걸 잊고 떨떠름함을 씻어 낼 수도 있었다.
단,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등유 랜턴의 불빛이 드리운 철창 안.
험악한 이곳의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수인 소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으며,
그 소녀의 머리칼이 나와 같은 검은색이었다는 점이다.
“나, 나으리...? 왜 갑자기 멈추...”
“야.”
“예, 옛...?”
“얘도 범죄자냐.”
“아...”
돌킨은 나와 철창 안의 소녀를 번갈아 보고 뭔가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상당히 안타까운...”
“죄목.”
“예?”
“죄목.”
“아... 절도죄입니다.”
“절도죄?”
“네... 북쪽 거리에서 빵을 훔쳤답니다.”
“...고작 빵 하나 훔쳤다고 이런 데 가두어놨단 말이야?”
“나, 나으리...?”
돌킨은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딱하긴 하지만 범죄는 범죄고 하필이면 그때 점포에 귀족이 있었던 모양이라서... 저도 사정을 보아 처음부터 이곳에 가둔 건 아니지만 얘가 적응을 못 하고 다른 노예와 마찰이 심해서 말이죠...”
“마찰?”
“예, 예... 타일 조각을 깨트려서 품에 숨겨놨다가 자기를 괴롭히려는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아무리 불러도 구석에 웅크려서 나오질 않고, 머리칼 때문에 이상한 손님이 꼬이거나 불쾌함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상한 손님이란 건.”
“그... 나리도 아시겠지만... 일부러 위해를 가하려는 용도로 노예들을 사는... 그,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팔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
횡설수설하는 돌킨을 무시하고 우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자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은 두 귀가 움찔하며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등유 랜턴에서 뿜어나온 은은한 불빛이 뺨 위를 적시자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소리와 색채가 사라졌다.
“.....”
라디보다 서너 살쯤 어린 외견. 살짝 치솟은 눈꼬리. 붉은 기운이 감도는 황금색 눈동자는 호박을 박아 넣은 듯했다. 짧은 귀와 꼬리는 언뜻 깜찍하게 비출 수 있었으나 무표정한 입매 탓에 귀엽다기보단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고된 수감 생활로 눈가에 짙은 피로감이 껴 있었지만 타고난 미색은 감출 수 없었다.
라디와 아리엘에게 맞먹을 수준의 미모.
하지만 눈빛에 서린 한기를 마주하자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젠장...’
나이기에 곧바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가 짊어져 왔을 기구한 운명을.
“...종족이 뭐야.”
“네...?”
“얘 종족이 뭐냐고.”
“아... 그건 저도 고양이 수인이라고만 알고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보호자도 없고 지인도 없이 슬럼가를 전전하던 모양이라... 진짜 악마는 아닌 것 같은데...”
“악마일 리가 없잖아.”
이 소녀는 마족이 아니라 나처럼 검은 머리칼을 타고난 것뿐이다.
바짝 치솟은 단묘종의 고양이 꼬리를 응시하고 있자니 소녀의 입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뭐라고?”
“.....”
자세히 듣고자 창살에 귀를 기울인 순간
“큭?!”
“나, 나으리...!?”
손에서 첨예한 통증이 느껴졌다.
황급히 랜턴을 비추자 손등에 박힌 철조각이 보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이, 이건... 창살 이음매에서 나사를 떼어낸 모양입니다! 엄청 단단히 조여놨을 텐데 어떻게...”
“.....”
소녀가 주먹을 풀자 감추고 있던 피투성이 손톱이 보였다.
그 아래 놓인 단도와 함께.
다급하게 허리춤을 매만졌지만, 있어야 할 손잡이가 만져지지 않았다.
이어서 단도를 손아귀로 회수하기도 전에 소녀가 팔을 뻗었고
칼자루를 움켜쥐어 날카로운 검끝을 내게 겨누었다.
....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