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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16화 (216/375)

〈 216화 〉 노예 #6

* * *

[216] 노예 #6

위화감이 치밀었다.

그야 저 단도는 단순한 날붙이가 아니니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무구이자 안디라 신의 성물.

지금껏 나를 제외하곤 그 어떤 인간도 다룰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이, 이.. 이년이 누구한테 무기를 겨누...”

“돌킨.”

“예...?”

“다물고 있어.”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뒷말을 틀어막았다.

나는 지저분한 바닥에도 굴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굽혔다.

주홍빛 눈동자와 눈높이를 맞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애야, 넌 이름이 뭐니?”

“.....”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깨져나간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칼자루에 힘을 실을 뿐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 따위 옛적에 버린 듯한 눈길로.

“...혹시 말을 할 줄 모르는 거야?”

“.....”

“아무 대답이나 해줄 수 있겠니?”

“....”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돌킨이 난처하게 뺨을 긁었다.

“...데려온 뒤부터 계속 이 상태입니다. 다른 여성 고용인을 시켜 말을 걸거나 음식으로 구슬려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비스마르크 어를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야?”

“아, 네... 체포될 당시에는 멀쩡하게 말했답니다. 경비병한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더군요.”

“그럼 그때 무슨 짓을 당한 거 아냐?”

“아닙니다. 이 도시의 경비병하고는 종종 협조하는 사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범죄자는 처벌하기도 애매하니 변제할 돈이 없으면 곧바로 이곳에 보내거든요. 저희는 그 대가로 약간의 중계 비용을 지불하고요. ...그보다 나으리의 단검을 어떻게 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다시금 우리 안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냥 어리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앳된 외모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라디를 미성년으로 오해했던 과거로 미루어 보면 아마 성인이겠지.

발육 상태는 조금 못 미치지만.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잔잔한 어조로 물었다.

“저기... 혹시 아무렇지도 않니? 그 검은 아무나 만질 수 없는 건데...”

“.....”

녀석이 단도를 바짝 들어올렸다.

“...혹시 내가 널 해칠까 봐 경계하는 거니?”

“.....”

“괜찮아. 잘 봐. 나도 비슷해.”

소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머리로 손을 뻗어 후드를 젖혔다. 따스한 랜턴의 불빛이 검은 머리칼에 기울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소녀는 숨을 들이켜며 반걸음 물러났고,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샛별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마족...?”

“아니, 너랑 같아. ...고생했겠구나.”

“....”

소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같은 흑발인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동정했을 수도, 혹은 철창 안에 갇혀있는 자신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은 내 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발자국 다가서자 소녀는 검 끝을 들어올리며 쉰 목소리로 앙칼지게 내뱉었다.

“다가오지 마.”

“...일단 단검부터 내려줄 수 있을까?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거짓말.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야.”

“...그래, 알았어.”

나는 두 손을 들어올려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자아내고는, 소녀가 걱정하지 않게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손등을 옷소매로 덮으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몇 가지 물어도 될까?”

“.....”

“혹시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겠니?”

“.....”

“아니면 종족이 뭔지 물을 수 있을까?”

“.....”

“너는 어쩌다가 슬럼가를 전전하게 된 거니?”

“....”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데 한쪽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소통이 될 리 없다. 마치 굳게 닫혀서 오랜 세월 간 열린 적 없는 방문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

소녀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경계심을 낮추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 터.

분명 좋은 수단이 있을 텐데...

‘잠깐...! 그러고 보니...’

무의식적으로 빈 칼집을 매만지던 중 두툼한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나는 재빨리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를 풀러 안에 든 다과를 꺼내들었다.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콧방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애완동물을 유혹하듯 과자를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계속 갇혀있느라 배고팠지? 마침 양과점에서 사 온 과자가 조금 있거든. 괜찮다면 같이 나눠 먹지 않을래?”

“.....”

“...야, 돌킨 너 혹시 깨끗한 천 있냐? 손수건 같은 거.”

“예, 옛!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까라면 까. 뭘 그렇게 말이 많아.”

“넷...!!”

돌킨이 허겁지겁 품을 뒤지더니 재빨리 격리실 밖으로 달려나가 새하얀 손수건을 들고 왔다.

나는 그가 건네온 면포를 바닥에 깔고 다과를 종류별로 조금씩 덜어놓았다. 철창 밖으로 손을 조금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위치였건만, 소녀는 여전히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날 노려보았다.

“걱정 마. 독 같은 건 안 탔으니까. 자, 봐봐.”

­오독.

늘여놓은 과자 중 한 쿠키를 집어 베어물자 입안에 농후한 단맛이 퍼져나갔다. 달콤한 꿀을 속에 듬뿍 넣었는지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갓 오븐에서 꺼내 뜨끈뜨끈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지만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감상이겠지.

과연 비싼 돈을 주고 북쪽 거리의 양과점에서 산 값어치를 한다.

순간 나조차 잠시 상황을 망각하고 단맛의 황홀감에 빠지자 소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과자를 집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야... 독하다 독해.’

나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뒤돌아보고 있을 테니까 맘 편히 먹어. 그거면 됐지? ...돌킨 너도 뒤돌아.”

“예, 옛...!”

철창에서 살짝 거리를 벌리고 등을 돌렸다.

방풍 랜턴이 자아내는 흐릿한 음영과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돌킨 옆에 서서 기다리자 잠시 후 배후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훔쳐보자 허겁지겁 과자를 욱여넣는 소녀가 보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부드러워?! 달아!? 맛있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쓰럽네...’

지금까지 줄곧 슬럼가에서 살아왔다면 단 음식을 맛볼 기회가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예 이런 맛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

나는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쪼그리고 앉아 소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은 경계심이 옅어진 건지 그녀도 이번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독기가 풀풀 흩날리는 시선은 마치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주장하는 듯했지만.

꼭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를 보는 듯한 느낌.

나는 그녀가 과자를 다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어때, 맛있지? 원래는 내 연인 주려고 산 건데 그래도 잘 먹는 모습 보니까 보기 좋네.”

“.....”

“너한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

“.....”

“일단 이름부터 가르쳐줄 수 있어?”

“....”

이래도 안 되나.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탐문부터 시작해야겠네...’

소녀와 접촉했던 노예 중에 대화를 주고받은 인물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아무래도 같은 처지의 사람에겐 이것저것 터놓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니까. 적어도 이름 정도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막 돌킨의 등을 떠밀며 자리를 뜨려는 찰나 어렴풋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안 돼.”

“뭐가 안된다는 거니?”

“이름. 아저씨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저씨...?”

­끄덕.

“.....”

돌킨을 쳐다봤지만, 그는 완전히 처음 듣는 눈치였다.

살며시 도로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그 아저씨란 사람은 누구니?”

“고마운 사람. 많이 도와줬어.”

“그래? 그럼 꼭 보답해야겠네. 혹시 어디 사는지 알아?”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해코지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 아니, 난 정말로...”

“아저씨는 강해. 빈민촌 악당, 기사, 나쁜 모험가들 전부 죽였어.”

“....그래, 그렇게 강한 사람이면 내가 덤벼도 끄떡없겠네. 그러니까 그 아저씨란 사람이 어디 사는지 알려줄 수 있겠어? 잘하면 그 사람에게 너를 돌려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아무도 없을 때 갑자기 나타나.”

설마...

“...돌킨, 너는 잠깐 나가 있어.”

“나으리...?”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마.”

“....알겠습니다.”

그가 공손하게 묵례하고 격리실을 나섰다.

나는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야, 혹시 네가 말한 아저씨가... 안디라라는 이름이었니?”

“이름은 몰라.”

“그럼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어쩌면 내가 아는 시.. 사람일지도 몰라.”

“......”

소녀는 입을 다물었지만, 내 흑발을 곁눈질하곤 마지못해 대답했다.

“몰라... 항상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어...”

“목소리는?”

“몰라. 말을 거의 안 해. 그래도 착한 사람이야.”

“혹시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었니...? 그림자를 조종한다던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젠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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