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노예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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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노예 #7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곧바로 격리실을 뛰쳐나왔다.
나는 돌킨의 어깨를 붙들고 사납게 벽에 몰아붙이며 추궁했다.
“야, 시간 없으니까 간결하게 대답해.”
“예, 옛! 나으리!!”
“...너 쟤 어디서 데려왔어.”
“부, 북쪽 지역을 방위하는 경비대로부터 인수했습니다!”
“쟤가 어디 살고 있었는지 알아?”
“옛...! 남쪽 광장 근처 판자를 쌓아 만든 곳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안내해.”
“지, 지금 말입니까?”
“당장.”
“그, 그리 먼 곳은 아니라 저희 가게의 옥상에서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복도 쪽을 턱짓하자 그가 허둥지둥 앞서나갔다.
“따라오시죠...!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두르자.”
“네!!”
빠른 걸음으로 노예가 가득한 방을 지나쳤다. 검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경보하는 돌킨과 성큼성큼 뒤쫓는 내 모습을 보며 시종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대꾸할 시간 따윈 없다.
전부 지나쳐 육중한 중문을 열어젖히자 탁 트인 하늘이 나왔다.
돌킨이 옥상을 가로질러 난간을 짚으며 외쳤다.
“바로 저곳입니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 구석에... 보이십니까?!”
“...저 갈색 벽돌 건물 옆을 말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보다 살짝 오른쪽입니다!!”
“알겠다, 저 큼지막한 나무 아래 저거?”
“바로 맞히셨습니다!!”
“.....”
너무 열악한데.
입가를 틀어막고 침음했다. 이곳으로부터 이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 푸른 소나무 근처 툭 불거진 형상이 있었다. 공사장에서나 굴러다닐 법한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구조물이.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방수천을 지붕에 덧대긴 했으나 당장에라도 무너질 기세다. 폭우가 내리면 집이 떠내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늑대가 바람을 불기만 해도 날아갈 기세다.
아무리 포장한다고 한들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다.
저런 곳에서 줄곧 살아왔다는 건가.
“저건 그냥... 개집보다도 못하잖아.”
“나으리도 아시겠지만... 검은 머리는 대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요즘엔 그래도 인식이 나아지고는 있다고들 하지만 말이죠... 나리처럼 강한 힘이 없다면 여태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
그래, 그건 내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삶에 여유가 생긴 만큼 겉으로도 드러나는지 이전처럼 대놓고 멸시받는 일은 줄어들었으나, 길을 거닐다 보면 이따금씩 후드 너머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꽂혀들곤 했다.
나조차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인데 하물며 이 세계에서 태어나 어린 소녀의 몸으로 그 눈빛을 감당해왔을 그녀의 심정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아마 그 ‘아저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몸이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특이할 건 없는데..’
판잣집 근방을 샅샅이 훑어봤으나 상당히 열악하다는 점을 제외하곤 이상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림자 병사가 배회하거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있을 리도 만무.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쟤 혹시 누가 데려가기로 예정되어 있어?”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누군데.”
“...영주입니다.”
“또?”
날카롭게 눈초리를 올리며 묻자 돌킨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 격리실 안에 있던 다른 수감자와 함께 영주성으로 이송될 예정입니다. 물론 도중에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게 철창 채로 운반하지만요.”
“아니 죄수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애는 왜 데려가는 거야? 도움도 안 될 게 뻔한데. 더 건장하고 좋은 노예가 널렸잖아.”
“저... 그게... 혹시 귀 좀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냥 말해.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
“예, 그럼...”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 사실 나중에 말씀드릴까 고민했는데... 요즘 영주성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저희는 저번 언데드 사건의 배후에 기사단장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키론 경이 서거한 뒤로 사태가 진정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영주성에서 노예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건 아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계속해.”
“하지만... 이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저희 매장뿐만 아니라 베라스틴의 모든 노예 상점, 심지어 타 도시나 해외에서도 마구 들여오고 있다고 하니...”
“그냥 그만큼 재건 사업에 많이 투자해서 그런 거 아냐? 키론이 쌓아둔 재산을 탈탈 털어서 도시 복구에 쏟아붓는다던데. 충분히 가능하잖아.”
노예를 많이 사들인다고 한들 아예 말이 안 되는 행보는 아니다. 활용처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건설 자재나 물자 따위와는 달리 노예는 복구 작업이 끝나도 다른 도시에 매각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재건을 마치기 위해서라면...
돌킨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건설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제 노예를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 매장에서 납품한 노예가 세자릿수를 넘어가는데도 말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저번에는 심복을 시켜 모든 외부 작업장을 염탐하게 시켰지만 어디에서도 제 노예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분명 다른 사용처가 있다는 뜻인데... 사실 재건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이 도시에서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왔지만 어쩐지 지금의 베라스틴이 벼랑 끝에 몰려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으리도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돌킨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떨떠름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답했다.
“그래 뭐... 충고 고맙다. 들어보니 꽤 아슬아슬하게 들쑤시고 다닌 것 같은데. 그러다가 진짜로 벌집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렇습니다. 어쩌면 나리와의 모험이 제 담력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돌킨이 겸연쩍게 미소지으며 읊조렸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층계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물었다.
“그러면... 쟤를 영주성으로 안 보내고 내가 중간에 가로채는 건 무리인가?”
“예, 애석하게도... 나리도 아까 노예의 목에 걸린 구속구를 보셨지 않습니까? 그게 이미 영주성 쪽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라... 정 원하신다면 왕도에서 실력 있는 마법사를 불러 강제로 해제하는 방법도 있지만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도 문제지만, 그보다 도중에 노예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
지근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고심했다.
저 수인 소녀는 안디라 신과의 접점이 있을 게 분명하다. 내 단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정황상 그 아저씨라고 불리던 존재가 안디라 당사자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를 만나서 대화할 수만 있다면 내게 축복을 내린 이유나 대장간에서 보았던 검은 장검의 행방, 그림자 여왕의 정체 등 그간 쌓여왔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로도 충분히 소녀를 데려올 가치가 있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의아했던 것.
‘어째서...’
낯익다.
보면 볼수록 낯익었다.
강렬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 소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봄바람에 누운 갈대처럼 살랑이는 꼬리. 무언가를 먹을 때면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내 목소리를 경청하며 쫑긋거리는 귀와, 내게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던 해사한 웃음조차도 전부 알고 있다.
이 기시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근거리는 눈두덩이를 짚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격리소 앞에 도달해 있었다.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소녀는 내 단도로 철창을 베어내는 중이었다.
검은 칼자루를 손아귀로 되돌릴 때조차 전에 없던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나는 절망하며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소녀에게 말했다.
“야.”
“검. 돌려줘.”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
“.....”
“이대로라면 너는 조만간 영주성에 팔려 갈 거야. 앞으론 계속 거기서 지내야 해. 매일같이 죽도록 일하고,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어쩌면 불합리한 일을 당할 수도 있어. 노예란 건 원래 그런 거니까.”
“싫어!! 사람들은 날 보면...!”
“끝까지 들어 얌마. ....근데 마침 내가 며칠 전에 영주한테 큰 빚을 씌워뒀단 말야. 그걸 쓰면 널 거기서 빼 올 수 있어. 대신 보상은 포기해야겠지만.”
“그건...”
“그래, 널 금방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줄게.”
“.....”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을 거다. 어린 소녀, 그것도 흑발이 노예로 팔려가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뻔한 노릇이니까.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고 텃세를 당하거나 여자로서 최악의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녀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 철창에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저 혼자 부정하고, 현실에 분노하고, 어쩌면 타협하기도 하며 감정의 변화를 거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상처는 내 말의 진위를 흐렸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날 신뢰할 수 있도록 웃어 보였다.
소녀가 미심쩍은, 또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토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해?”
“몰라. 일단 영주랑 담판을 지어야 하니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끝내볼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몇 주 안에 어떻게든 되겠지.”
“몇 주...?”
“그래, 그러니까 그동안 몸 간수 잘하고. 이상한 속셈을 품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까 나한테 했던 것처럼 확 혼쭐을 내버려.”
“....왜 날 돕는 거야?”
“그냥 기분이다 인마.”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찬찬히 내 얼굴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한 황금빛 눈동자가 내 흑안에 머물고, 기억에 담으려는 것처럼 한참을 정체하더니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음색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름.”
“도란. 그게 내 이름이니 기억해둬. 알겠지?”
“도란...”
녀석이 소중한 무언가를 마음에 새기듯 내 이름을 되뇌었다.
나는 과자 주머니를 통째로 풀어내 그 앞에 놓아주었다.
발걸음을 돌려 격리실을 나서자 돌킨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영주성에서 노예를 운송해 갈 마차를 보내올 겁니다.”
“...잘 돌봐줘. 그때까지만이라도.”
“알겠습니다. 최상급의 대우를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예 중에 제 심복을 심어 동향을 감시할 예정입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참에 내 이름으로 면회 신청도 넣어둬. 틋콩하고 로닌이 말해둔다고 했으니 내가 누군지 정도는 알겠지.”
“알겠습니다. 저 근데...”
“왜.”
그가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일이 틀어지시면 어떡하실 겁니까? 만약 저희가 우려했던 게 사실로 판명된다면...”
“.....”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굳건하게 세워진 영주성을 응시했다.
이어 사납게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ㅡ
“전부 부숴버릴 거야.
....너도 내 성격 알잖아?”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
돌킨이 섬짓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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