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소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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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소동 #1
노예 거래소를 방문하고 사흘이 지난 시점.
“...슬슬 출발할까.”
현관에 앉아 신발끈을 묶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옷깃을 세웠다. 머리칼이 드러나지 않도록 투구를 푹 눌러쓴 뒤, 그럭저럭 쓸만한 장검과 수통 두 개를 허리춤에 단단하게 고정했다.
이교도와의 결전에서 망가진 장비들은 전부 대장간에서 새로 맞췄다.
현관에 놓인 거울을 확인하자 검은 로브 아래로 반짝이는 장비들이 보였다.
“.....”
든든하다.
꼬질꼬질한 잡철 보호구가 아니라 번뜩이는 강철 장비를 걸치고 있으니 꼭 비범한 실력자가 된 것 같다.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나는 역시 투구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대문을 열고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옷자락을 휘날렸다.
“...아직 쌀쌀하네.”
파릇파릇한 잔디가 드러난 정원을 가로질렀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가셨지만 베라스틴에 봄이 오기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다. 그래도 이제는 따뜻한 의복도, 아늑하게 타오르는 벽난로와 집도 있으니 겨울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부지런히 걸어 중앙 대로로 나오자 한시바삐 앞길을 재촉하는 행인의 부산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 늦었다...! 오늘 정오에 오버트 광장 앞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어디 보자... 오늘 사야 할 물품이 괭이 다섯 자루랑 호미 두 개.. 삽 하나...”
“정말이라니까...! 남쪽 호숫가에서 정령이 출몰했다고!!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에이, 거짓말도 정도껏 해라. 한두 번 속냐.”
“이번엔 진짜라니까...! 나 말고도 목격자가 줄을 섰어! 게다가 마지막엔 어떤 남자가 정령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와이번 꼬리 팝니다!! 회복약도 팔아요!! 싸게싸게 급처하니 다들 한 번씩 둘러보고 가세요!”
“.....”
왁자한 소음이 가도 곳곳을 수놓았다. 이 정도면 얼추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언데드가 사라지면서 피난을 갔던 시민들도 돌아와 차차 일상을 되찾아갔다.
좋은 현상이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도시 중앙까지 도달하자 다채로운 신전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신도들이 보였다.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는 사제에게 묵례하고 조금 더 나아가니 자주 신세를 졌던 아가사 신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석제 블럭이 깔린 부지로 향하자 두 사제와 대화를 나누는 익숙한 은발의 미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안 된다는 거죠? 제가 입교할 때 내세운 조건대로라면 분명 원할 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기로 했잖아요.”
“하, 하지만... 아리엘 사제님이 떠나시면 저희는...”
“아리엘 사제님, 한 번만 더 숙고해주실 순 없으신가요? 한창 복구작업이 시급한 지금, 인력 한 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이런 시국에 책무를 져버린다는 건 몹시 이기적인...”
“이기적? 지금 이기적이라고 했어요? 정말 뻔뻔하네요. 할 일도 없어서 집무실에서 한가하게 여자나 품평하며 시간을 때우시는 분이. 그리고 보니 몇몇 사제가 성금을 빼돌려 매음굴에 다닌다는 소문이 돌던데, 추기경님도 알고 계시나요?”
“아리엘 사제님!! 아, 아니 그... 사제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우리 좋았잖아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다시는 제 이름을 그 입에 담지 마세요.”
“아리엘 사제님. 일단 보는 눈이 많으니 안으로 가서 대화를...”
“야.”
돌연 말소리가 뚝 그쳤다.
내가 아리엘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자 두 사내의 미간이 움찔했다.
놈들을 내려다보며 사납게 내뱉었다.
“불만 있어?”
“.....”
남성이 성가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교단 내부 사정입니다. 알량한 오지랖 부리지 마시고 부외자는 가던 길...”
“지랄. 아리엘이 그만두겠다고 하잖아. 얘는 이제 자유니까 더 이상 너희랑 엮으려 들지 마.”
“....아리엘 사제님의 지인이신가요?”
“지인?”
나는 코웃음 치며 아리엘을 더욱 끌어당겼다.
그녀도 뺨을 붉히며 슬그머니 내게 체중을 싣자 두 남성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리엘 사제님에게 연인이...”
“...믿을 수가 없군요. 그렇게나 성실하던 사제님이 남성을 곁에 두시다니.”
“우리 교단은 연애 자유거든요. 개인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때문에 믿음을 게을리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리엘 사제님, 당신은 이런 시정잡배 따위보다는 이곳이 더...”
놈의 멱살을 붙들고 그대로 담벼락에 처박았다.
“커허헉!!”
“야,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내 애인한테 찝쩍대지 말고.”
“크윽...! 이, 이런 모욕을...! 우리에게 위해를 가한 걸 교단 성기사가 알게 되면...”
“알게 되면? 뭐 어쩔 건데.”
“끄아아아악!!!”
나는 놈을 땅바닥에 내치고 어깻죽지를 자근자근 짓밟았다.
“끄허헉...! 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좆까.”
“살려줘!! 이, 이러다 진짜 부러져!!”
“너희는 어차피 치유할 수 있잖아?”
“히, 히익...!!”
나는 더욱 체중을 실었고, 사내를 혼절 직전까지 몰아붙인 다음에야 발을 뗐다.
고개를 돌려 다른 한 놈을 응시하자 그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야.”
“허윽...! 죄, 죄송합니다!!”
“이 새끼 데리고 당장 꺼져. 앞으로 아리엘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마. 만약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며, 명심하겠습니다!!”
남자는 내게 연거푸 허리를 숙이더니 쓰러진 사제를 들쳐업고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나름 한 교단의 사제란 놈들이 왜 다 이 모양인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아리엘, 어디 다친 덴...”
“도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새하얀 형체가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아리엘이 내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도란! 방금 엄청 멋졌어!!”
“...괜찮은 거야? 일단 분위기를 봐서 끼어들긴 했는데...”
“응!! 너무 좋아.”
“.....”
피식 웃으며 가녀린 등을 끌어안았다. 조급해서 안달 난 사제들을 보아하니 신전 내부에서 아리엘의 입지가 어땠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용케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
감히 내 여자로 사심을 채우려 하다니.
혹여나 다음번에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기필코 처단하리라.
다정하게 아리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치료원 사람들한테도 얘기했어?”
“응! 그쪽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오히려 응원해줬어!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해줬고.”
“잘됐네.”
“이히힛...”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가 행복을 머금은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해 주니 마중을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어도 어련히 잘했겠지만.
손바닥을 내밀자 아리엘이 달그레 뺨을 붉혔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슬쩍 손을 겹쳐왔고, 그렇게 우린 깍지를 낀 채로 느긋하게 중앙 구역을 빠져나왔다.
서로에게 보폭을 맞추며 동쪽 대로로 접어드니 다채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악기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음유시인, 보따리를 풀어놓고 목청껏 외쳐대는 보부상, 어디론가 바쁘게 떠나는 무리와 분수대에 걸터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아리엘은 반짝거리며 생기 넘치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다가도 깍지 낀 손가락을 의식하곤 헤실헤실 미소지었다.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이제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걸? 도란은 책임감이 강한 남자니까 앞으로도 평생 나와 함께해 줄 거지?”
“그야 당연하지. ...그래도 조금 아쉽지는 않아?”
“응? 뭐가?”
“치료원 말이야. 힘들지만 마음에 들어했잖아. 친한 동료도 있었을 테고...”
“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그야 몇 년간 같이 일하다 보면 정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이제 그만큼 도란만을 봐줄 수 있으니까! 도란도 내가 전속 치유사가 되어주면 좋지 않아?”
“.....”
전속 치유사라...
그 말은 즉 내가 그녀를 독차지한다는 말과도 같다.
단순 관심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술, 온기, 체취, 어쩌면 침대 위에서의 모습까지도.
순간 홀딱 벗은 아리엘을 상상해버려 얼굴을 붉히자 그녀가 장난스레 내 볼을 꼬집었다.
“왜, 설렜어?”
“.....”
“솔직하게 말해봐.”
“...조금.”
조금 다른 의미로.
“....그래?”
아리엘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덥석 팔짱을 껴 오더니 기분 좋게 갸르릉거렸다.
하지만 멀찌감치서 건설 자재를 운반하는 노예들을 목격하자 표정을 굳히고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도란, 노예 상인 아저씨한테서 따로 들은 건 없었어?”
“....응. 오늘 새벽에도 잠깐 다녀왔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다더라고. 시간이 좀 걸리려나 봐.”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돌킨을 통해 영주성에 면회 요청을 넣은 뒤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딱히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영주를 만나려면 여러 절차를 밟아야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불길한 소문을 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괜히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저... 아니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까?”
“응? 어떻게든 해본다니?”
“아니 그... 내가 가서 말하면...”
“...괜찮아, 기다리면 만나게 해주겠지. 설마 저번에 세운 공이 있는데 거절당하겠어?”
성급하게 굴 필요 없다. 괜히 서둘렀다가 일을 그르치면 곤란하니까. 혹여나 수상하게 생각해 수인 소녀를 조사했다가 안디라 신과의 접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큰일이다.
영주가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게 확정된 것도 아니고...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며 걷고 있자니 어느새 동쪽 거리에 다다랐다.
붐비는 인파를 거슬러 조금 더 나아가자 목표했던 모험가 길드가 나왔다.
끼이이익...
스윙도어를 젖히고 들어서자 부산스럽게 의뢰를 구하는 모험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씨도 풀렸는데 어디 할 만한 일 없으려나...”
“동쪽 거리에서 같이 작업하실 두 분 구합니다!! 목공 경험이 있으신 분 우대!!”
“녹색 슬라임 진액이 한 병에 30쿠퍼라고? 양심 터진 새끼들....”
“의뢰 구했다!! 오늘도 빨리 마치고 한탕하러 가자!!!”
““좋았어!!””
“.....”
나는 휩쓸리지 않도록 아리엘을 로브 아래로 끌어당긴 채 인파를 헤쳐나가 접수창구 앞까지 도달했다.
즉시 카렌이 있는지부터 살폈지만 그녀는 자리에 없었고, 대신 일전에 본 적 있는 중학생뻘 접수원이 한가롭게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짐짓 헛기침하더니 태도를 바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카이아 모험가 길드 접수원 스텔라입니다. 무엇을 도와... 어, 아리엘 언니?”
“안녕? 잘 지냈어?”
“언니!!”
그녀가 창구를 뛰쳐나와 아리엘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리엘이 등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잘 지냈나 보네.”
“아니요!! 너무 힘들었어요! 모험가들이 갑자기 너무 많이 몰려와서...!”
“그런 것치고는 쌩쌩해 보이는데?”
“다 언니를 봐서 그런 거예요!”
“그래그래, 나도 반가워.”
“....”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친분이 있는 사이었지.
아리엘이 그녀를 보듬어준 뒤 입술을 뗐다.
“그런데... 카렌은 어디 있는지 알아?”
“네, 교대 중이라 안쪽에서 잠시 쉬고 있을 거예요! 불러올까요?”
“그래? 휴식시간에 방해하기는 좀 미안한데...”
“에이, 괜찮아요. 어차피 다음 교대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아카이아 길드랑 아가사 신전이 협업하던 시기는 진작에 지났을 텐데...”
“아... 나 오늘부로 치유소 일 그만뒀어. 신전에서도 나왔고.”
“네...? 그게 무슨 소리... 언니가...?”
“응, 나도 이제 모험가 하려고.”
“.....”
접수원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쩍 벌리며 굳어버렸다.
아리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멋쩍게 뺨을 긁었다.
지금까지는 예상했던 범주의 반응이었지만, 접수원은 우리의 기대를 멋지게 배신하고 건물이 떠나가라 외쳤다.
“뭐, 뭣...!!! 언니가 모험가를 한다고요?!!!!”
곳곳에서 흉흉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뭐야, 신참인가?”
“하긴 지금이 한창 새로 등록할 시기긴 하지. 그렇다면 우리가 빠질 수 없고!! 케헤헷...!”
“애들아 모여라!! 파릇파릇한 신입이 왔단다!! 어디 한 번 제대로 신고식... 어...? 어...?! 저, 저 사람은...!!”
““치, 치유소의 여신이다!!!””
“뭐라고?!! 치유소의 여신이면... 아리엘 사제님이 왜 이곳에?!!!”
“모험가가 되겠다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왜 갑자기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모험가를...”
“밖에서 다 들었다!! 아리엘 사제님이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 찾아왔다면서!!”
““잠깐!!! 여신님 곁에 저 시커먼 놈은 누구냐?!!!””
“......”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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