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소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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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소동 #3
소란이 정리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길드 안쪽에서 밝은 주황색 머리칼의 미소녀가 튀어나오더니 모험가들을 향해 일갈했다.
“길드 건물에서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히이이익!! 길드 터줏대감 카, 카렌이다!!”
“제,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모두 도망쳐!! 지금 잡혔다간 목숨이 위험해!!!”
“꾸물거리지 말고 빨랑 비켜!!”
모험가들이 등을 돌려 달아났지만 카렌이 던진 걸상에 머리를 얻어맞고 하나둘씩 픽픽 쓰러져나갔다.
“어딜 도망가?!! 박살 난 테이블하고 의자 변상하기 전엔 쥐새끼 한 마리 못 나갈 줄 알아!!! 늬들 오늘 내 손에 다 죽었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요...”
“...듣지 마 라디야.”
라디의 두 귀를 막아주었다. 벌꿀을 도둑맞은 흑곰처럼 날뛰는 카렌을 보자 등골이 오싹했다. 저 흉흉한 살기 앞에서 태연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곧 그녀가 잔해더미를 박차고 높게 뛰어오르더니 황급히 탈출하는 한 모험가를 바닥에 짓누르며 소리쳤다.
“다들 꼼짝 마!! 지금 나가는 놈들은 죄다 길드 명단에서 제명시킬 줄 알아!! 문 잠가!!”
“어, 어... 카렌 씨...?”
“문!!! 잠가!!!”
“예, 옛...!!”
철컹!
막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사내가 마지못해 빗장을 내리니 삽시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모험가들이 발버둥을 멈추고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침묵한 와중,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며 한 사내를 턱짓했다.
“거기 당신.”
“저, 저요...?! 하늘에 맹세코 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보기만 했...”
“방관한 놈들도 다 똑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요. 최대한 간결하게. 당장.”
“그, 그게...!”
남자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발견하곤 황급히 일러바쳤다.
“저 새끼...!! 아, 아니... 저 사람이 저질렀습니다!! 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래? 어디 주동자 얼굴...”
“.....”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
층계를 올라오자 난간 너머로 어수선한 길드 로비가 내려다보였다.
모험가들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 일행을 쳐다봤지만, 카렌이 난폭하게 응접실 안으로 밀어 넣자 시야가 차단되었다.
바깥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칸막이마저 내리고 나니 완벽한 밀실이 완성되었다.
마물의 가죽을 덧대 만든 딱딱한 의자에 불편한 심정으로 앉아있자니 카렌이 나와 아리엘, 라디를 똑바로 응시하며 정면에 털썩 마주앉았다.
피부를 콕콕 찌르는 듯한 정적이 버거워 먼저 말문을 뗐다.
“저.. 카렌 씨...?”
“.....”
“부서진 테이블하고 의자는 엄 뭐시기 그놈이 배상하기로 했...”
“도란 씨.”
“.....”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
날카로운 주황빛 눈동자가 날 쏘아보았다. 아까처럼 흉악한 안광은 내뿜지 않았으나 그녀의 서늘한 시선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꼭 죄지은 아이가 된 것만 같다.
며칠 전 얼음장에 빠졌을 때보다 오한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투구 아래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죄송합니다...”
“.....”
카렌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충 전후 사정은 들었어. 모험가들끼리 시비가 붙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밖에서 싸울 생각은 안 해봤어?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도란 씨가 부추기기까지 했다던데 왜 그랬어요?”
“그... 이번 기회에 확 본때를 보여줘서 뒤탈을 없애려고...”
“그래.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니까 도란 씨는 당분간 페널티야. 임무 다섯 개를 수행할 동안 보수는 절반으로 삭감하고 원하는 대로 의뢰를 선택할 수도 없어. 벌금은 20실링이고, 이외에도 망가진 길드 기물을 변상해야 하지만 그건 엄베르크가 대기로 했으니까 넘어가 줄게.”
“.....”
어깨에서 힘을 뺐다. 벌금이 조금 빡세긴 해지만 충분히 각오했던 바다.
한데 막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려던 도중 문뜩 고개를 드니 감귤색 눈동자는 여전히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본론은 이제부터라는 듯이.
카렌이 잠시 아리엘을 응시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 너희 둘 사귀어?”
““.....””
잠시 아리엘과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카렌과 절친한 사이였을 터. 신중하게 뒷말을 고르자 아리엘은 내 손등을 상냥하게 겹쳐오고는 잔잔히 입을 열었다.
“응... 그렇게 됐어.”
“.....”
카렌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이더니 나직하게 물어왔다.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어쩌다가.”
“음... 그냥 자연스럽게...? 이전부터 마음이 있기도 했고... 함께 붙어 다니면서 동고동락하다 보니까 더 이상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워지더라고.”
“.....”
아리엘이 깍지에 힘을 실었다.
카렌은 그런 우리를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행복해...?”
“응. 엄청나게. 도란이랑 함께하고 나서 나날이 즐거워. 매 순간이 기쁘고 가슴이 따뜻해져.”
“.....”
한숨.
카렌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푹 숙인 고개 탓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번잡한 감정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카렌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후련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진심으로 축하해 아리엘. 잘됐네. 너 이전부터 도란 엄청 좋아했잖아.”
“응... 고마워...”
“....”
의아하게 카렌을 쳐다보자 그녀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몰랐어? 얘 그냥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틈만 나면 도란 씨 얘기하고, 며칠 치료원에 안 들르면 근황을 물어보러 찾아오고, 무슨 대화만 나눴다 하면 와서 자랑하고. ...도란 씨가 던전에서 실종되었을 때는 오밤중에 찾아와서 도란 씨가 사라졌다고 울먹이는데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세요?”
“카, 카렌...! 그런 얘기는 도란이 없는 곳에서...”
“뭐 어때 이젠 비밀로 할 필요도 없잖아. ...도란 씨, 앞으로도 아리엘을 잘 부탁해요. 다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엉뚱하고 맹한 구석도 많은 애라... 만약 울리기라도 하는 날엔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
그래,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서라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렌이 맑게 웃어보였다. 그런 와중에 두 명과 동시에 교제하는 걸 문제 삼지 않는 건, 카렌도 이 세계 주민이라는 걸까.
“그럼... 오늘은 모험가 등록을 하러 온 거예요?”
“...네, 아리엘도 아카이아 길드에서 가입하려고요. 그래야 셋이서 파티를 짤 때도 편리할 테니까요. ...지금 등록할 수 있어요?”
“물론이죠. 우리 쪽에서도 대환영이야. 아리엘은 신원도 확실하고 실력도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라디라고 했니?”
“아, 네... 안녕하세요 카렌 씨.”
이야기가 일단락될 때까지 잠자코 있던 라디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카렌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그냥 말 편하게 해도 돼. 베라스틴에 살면 앞으로 자주 볼 텐데 그냥 언니라고 불러.”
“그래도...”
“괜찮아. 이번에 아리엘이랑 같이 고생했다며? 얘기 많이 들었어. ...너도 이참에 베라스틴 소속으로 바꿔주려고 하는데 괜찮지?”
“감사합니다. 그... 카렌 언니...?”
“그래, 라디야. 그럼 나머지는 됐고...”
그녀가 날 빤히 바라봐 새치름하게 입을 열었다.
“...왜요.”
“왜요?”
“죄송합니다..”
“아니 뭐... 도란 씨, 아니 도란. 우리도 이제 말 놔.”
“...네? 갑자기요?”
“그래, 나랑 아리엘은 편하게 대화하는데 우리끼리만 존대하면 이상하잖아. 어차피 나이대도 비슷하고, 아무리 업무 때문에 만난 사이라지만 알고 지낸 지도 꽤 오래됐고, 사적으로 도와준 적도 제법 많지 않아?”
“뭐... 저야 상관없지만...”
사실 조금 신경 쓰이던 참이기도 하고.
카렌은 내 대답을 듣고 흡족하게 웃더니 테이블 아래서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그럼... 아리엘, 여기 빈 항목에 인적 사항 좀 채워줘. 모험가 패에도 반영되는 내용이니 신중하게 적고, 라디 넌... 여기 이 서류에 사인하고 지장만 찍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줄게.”
“고맙습니다...”
“별거 아니야. 그리고... 도란 넌 대체 언제 승급할 거야.”
“.....”
아니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등받이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에서 조난만 안 당했어도 진작에 승급했을 텐데.
이번에도 베라스틴에 창궐한 언데드를 해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긴 했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길드 측에서도 마땅한 보상을 못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공로를 인정받아 갑자기 승급한다고 한들 다른 모험가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테니.
결국 영주성 측에서 이번 사태의 전말을 투명하게 공표하기 전까지는 보류라는 건데...
망연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카렌이 헛기침해 주의를 되돌렸다.
“그럼 이참에 랭크도 올릴 겸 의뢰 좀 열심히 해봐. 너 세니까 이젠 좀 어려운 의뢰도 문제없을 거 아냐. 파티원도 세 명이라 사냥 퀘스트도 받을 수 있고 아리엘이 있으니 다칠 염려도 없는데.”
“그러게... 나야 그럴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지. 이전엔 동료라곤 말톤밖에 없었는데 이젠 그것도 옛말이네.”
“아, 말톤 씨 하니까 생각 난 건데 그 사람은 언제 돌아온대? 슬슬 위험할 텐데... 한 달 안에 다음 의뢰를 수행하지 않으면 말톤 씨도 강등당할지 몰라.”
벌써 기한이 그렇게 됐나.
“그렇다고는 해도... 나도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도통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개인적인 볼일도 있어서 조만간 한 번 찾아가려고 벼르고 있긴 한데...”
“...너 그러다가 또 엉뚱한 데로 새는 거 아냐? 저번엔 설원에 떨어졌다고 하니 이번엔 반대로 용암 지대라던가... 분화구 속이라던가.”
“에이 설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면 그럭저럭 할 만한 의뢰 좀 추천해줄 수 있어? 잠깐 실험해 볼 게 있으니 사냥 관련 퀘스트였으면 좋겠는데...”
“실험?”
“.....”
아차 싶어 입을 다물자 그녀가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스노우 폭스를 잡겠다며 남쪽 호숫가에 다녀왔었지. 때마침 그 장소에서 정령이 출몰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혹시 의뢰도 완수하지 않고 돌아왔던 이유가...?”
“.....”
나와 아리엘, 라디 셋이서 나란히 어깨를 움찔했다. 아리엘은 양피지에 깃펜을 놀리다 말고 우뚝 정지했고, 라디는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실상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테이블 아래로 수통을 의식했다.
카렌이 미심쩍게 눈매를 좁혔다.
“...왜 눈치를 보고 그래. 설마 해서 던져봤는데, 정말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단순히...”
“거짓말인 거 다 알거든? 너 거짓말 진짜 못해.”
“.....”
아니, 내 주변 여성들은 독심술이 기본 탑재 시스템인가.
내 정체를 알고도 도와주었던 카렌이다. 그녀에게라면 솔직히 털어놓아도 되겠지만 시기상조란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만큼 인간을 따르는 정령은 드문 존재니까.
일단 적당히 말을 지어내려는 찰나
“어어어...? 도, 도란님...?!”
“응...? 자, 잠깐!”
스르륵...
수통을 틀어막은 마개가 저 혼자 풀리기 시작했다. 이내 한계에 다다른 샴페인처럼 뽕! 하고 튕겨 나가더니 그 안에서 아기자기한 생명체가 뛰쳐나왔다.
됴란!!
“.....”
정령이 해바라기처럼 해맑게 웃으며 내게 안겨들자 응접실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폭포수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삐그덕거리는 고개를 드니, 뻣뻣하게 굳어버린 두 녀석과 토끼처럼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뜬 카렌이 보였다.
아리엘이 팬을 내려놓으며 민망하게 입을 열려던 찰나, 카렌이 조금 더 빨랐다.
“설마... 운디네야...?”
“...그래.”
“어떻게... 어떻게 된...”
“...네 말대로 호수에서 주워왔어. 얘가 좀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우리가 도와주니까 잘 따르더라고. 베라스틴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졸래졸래 쫓아오길래 한 번 키워보기로 했지.”
“호, 혹시 만져봐도 돼?”
“음... 아마 괜찮을걸?”
됴란?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을 들어올려 카렌의 품에 안겨주자 그녀의 입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으으.... 어, 어쩜 이렇게 귀엽지...? 정령이면 신비로운 이미지일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수통에 넣어서 다니는 거야?”
“그래, 막상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럼 얘는 뭘 먹어?”
“아 그건...”
어색하게 아리엘을 바라봤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지.
“그냥... 그런 게 있어. 며칠간 다양하게 줘봤는데 다행히 사람 음식도 먹긴 먹는 모양이더라고. ...더 좋아하는 게 있긴 하지만.”
“응...? 신기하네... 이름은 정했어?”
이름 말인가.
나는 정령을 향해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 란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란이? 왜?”
“아직 어려서 할 줄 아는 단어가 내 이름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도란에서 적당히 따와서 만들었지. 어때?”
란이가 제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날 바라보며 꺄르르 웃었다.
온화하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카렌이 재차 되뇌며 읊조렸다.
“란이라... 란... 괜찮은데? 이 근방에선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정령이니까 뭐. 난 평범한 이름보단 이게 더 좋아.”
“그래... 사실 오늘 사냥 의뢰를 받아가려던 것도 다 얘 때문이야. 이참에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확인해 두려고. 잘하면 전력에 큰 보탬이 될지도 모르니까.”
저번에는 엄청난 위용을 발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물이 풍부한 수원지인 데다가 폭주 상태였던 것도 한몫했을 테니까.
평상시에도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건 힘들겠지.
카렌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음... 그럼 비교적 안전한 서쪽 숲으로 가보는 게 좋겠네. 동쪽은 아직 언데드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가지 않는 게 좋아. 마침 적절한 의뢰가 하나 있었을 텐데...”
“그래, 부탁할게.”
“응.. 그리고...”
“....?”
카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응접실을 나서려다 멈춰섰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자 채광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주홍빛 머리칼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이어 내 쪽으로 돌아 화사하게 웃으며
“다행이야 도란, 행복해 보여서.”
“.....”
나는 그녀에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