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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21화 (221/375)

〈 221화 〉 소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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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소동 #4

동토가 된 서쪽 곡창 지대를 지나자 무성한 잡목림에 다다랐다.

살벌했던 추위가 한풀 꺾이니 녹음이 다시 우거지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숲 안으로 발을 디디자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상활한 공기, 코끝을 시큰시큰 수놓는 늦겨울의 아취...

슬슬 봄에 접어들기 시작한 숲은 조금 푸르다.

이끼와 눈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정경을 감상하며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나아가던 중 라디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들어왔으면 슬슬 밖으로 내보내도 될 거예요. 인기척이 느껴지면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그래? 야, 너도 나와.”

­크샤아아악!!

­됴란!

나는 그림자 속에서 개미를 소환하는 것과 동시에 수통 마개를 열었다.

란이는 밖으로 튀어나오자마자 내 종아리를 끌어안으며 애정을 표현했지만, 개미와 마주치니 급격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기를 달래듯 녀석을 품에 들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자 라디가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개미를 시켜 란이를 공격하게 시켰었죠. 그래서 경계하는 걸까요?”

“그런가 보네... 어떡하지 도란?”

“뭐, 차차 친해지면 되겠지. ...너희 둘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 지난 일은 다 잊고, 알았어?”

­...크샥!

­됴란...

“괜찮을까요...?”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야. 설마 별일 있겠어? 자 둘이 악수해.”

­.....

둘은 마지못해 서로에게 다가가더니 닿을락 말락 더듬이와 손을 맞댔다.

흡족하게 미소짓자 아리엘이 슬그머니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카렌한테 받은 의뢰 내용은 뭐였어?”

“의뢰? 아... 고블린 몇 마리 잡아 오라더라고. 이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놈들의 서식지가 나올 거래.”

“하기야... 고블린을 소탕하려면 날씨가 풀려 개체수가 급격하게 불어나는 봄철 이전을 노리는 게 현명하니까요. 그래야 잔당도 확실하게 소탕할 수 있고... 그런데 고블린은 도란님이 제일 싫어하는 마물 아니었어요?”

“뭐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다기보단... 예전에 그랬잖아요, 자기가 제일 질색하는 몬스터가 고블린이라고. 그때가 아마 저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을 텐데...”

“이야... 용케도 그걸 기억했네.”

“응? 고블린을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원체 흉악하고 해로운 마물이긴 하지만...”

아리엘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행위에 무심코 끌어안자 그녀는 꺅 신음을 흘리며 뺨을 붉혔다.

멀뚱히 올려다보는 개미와 정령을 휘휘 손짓으로 물리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이어나가며 답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일 년간 숲속에서 방황했다는 건 이미 말했지?”

“...응. 저번에 들었어.”

“근데... 내가 있던 곳이 상당히 외진 숲이라 다양한 몬스터가 살았어. 고블린과 처음 조우한 것도 그때였는데 하필이면 영역이 겹쳐서 허구한 날 대립했거든. 먹을 걸 가지고 경쟁하질 않나... 사냥터에서 빈번히 마주치질 않나...”

“정말...? 그럼 엄청 위험하지 않았어? 고블린도 모이면 꽤 위협적인 마물이잖아. 지능도 높은 편이고...”

“그게... 사실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매일같이 치고받고 하다 보니까 결국엔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했어. 그곳엔 무시무시한 마물이 득실거렸으니 놈들도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 하루는 트롤의 함정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고블린 새끼를 구해 준 적도 있었고.”

“그럼 그건 단순히 싫어한다기보단... 그냥 애증 관계 아니에요?”

“에이 그럴 리가... 그때 놈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치가 떨리는데. 은신처로 돌아왔더니 일주일 치 식량을 도둑맞은 적도 있었고, 놈들이 파둔 똥간에 빠진 적도 있었어. ...냇가에서 아무리 씻어도 한 달 내내 냄새가 안 가시더라.”

“으... 그건 좀...”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아리엘과 라디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겪은 수모의 일각일 뿐.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내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선두에 서서 개미와 함께 울창한 잔가지를 정리하며 나아가다 보니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데 문뜩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란이가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종아리를 차박차박 때리며 전방을 손짓하고 있었다.

­됴란...! 도랸!!

“...왜, 뭔가 있어?”

“뭘까 갑자기... 배가 고픈 건 아닌 모양인데.”

“그러게... 마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요. 정령만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뭐, 금방 알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가는 방향인데.”

오랜 시간에 걸쳐 산짐승들이 뚫어놓은 오솔길을 따라 계속 전진하자 우리는 머잖아 녀석이 재촉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수풀을 스치는 산바람 사이로 맑은 물소리가 들려왔기에.

“와아...! 도란! 저기 좀 봐!!”

“...이거 때문에 그렇게 흥분했구나.”

“운디네라서 본능적으로 물을 감지했나 봐요..”

투명한 수면 아래로 유유히 헤엄치는 색색들이 물고기가 보였다. 여울진 물살은 햇살을 반사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자 수면에 잔물결이 일며 청량한 기운이 퍼져나갔고, 잔잔한 파문이 바위에 닿아 부서지는 모양새가 더없이 청아했다.

시냇물을 닮아 푸르른 정령의 눈동자에 선선한 색채가 찰랑이는 걸 보니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고 경치를 감상하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투구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조금 쉬었다 갈까?”

“응? 하지만...”

“뭐 어때. 마침 휴식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기왕 여기서 점심도 해결하고 가자. 란이도 마음에 든 모양이고. 그렇지?”

­됴란!!

란이는 해맑게 웃으며 풍덩 개울 안으로 뛰어들었다.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며 능숙하게 상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운디네가 맞긴 한가 보다.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보자기에 싸 온 주먹밥을 꺼내자 라디가 코를 쫑긋거렸다.

“이건... 쌀이네요. 요 근방에선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저께인가 돌킨의 가게에 다녀오는 길에 들린 가게에서 팔고 있더라고. 양이 많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들여오는 모양이니 앞으로 종종 먹을 수 있을 거야. 이전에도 먹어 본 적 있어?”

“네, 예전에 살던 마을에는 작게나마 벼농사도 지었거든요. 귀해서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추수철이 되면 수도원 사람들이랑 수확을 도와주고 조금 얻어오곤 했어요. ...이러고 있으니 그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언니도 와서 같이 먹어요!”

“응! 잠깐만...”

아리엘이 한 손에 부츠를 쥔 채 맨발 차림으로 다가왔다. 물기가 흘러내리는 새하얀 발목을 보자 고혹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그새 물에 들어갔다 온 모양.

지구의 중세에서는 여성들의 발목 노출을 알몸만큼이나 야하게 생각해 기장이 긴 치마로 가렸다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활동성을 중시하는 모험가란 직업이 있는 만큼 그리 터부시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살짝 이상야릇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뭐야, 벌써 들어갔다 왔어?”

“응, 발만 조금. 란이랑 놀아주느라.”

“차가웠을 텐데... 물에 들어갈 시기가 되려면 아직 꽤 남았잖아.”

“응 그게... 신기하게 하나도 안 차가워. 오히려 살짝 미지근한 정도? 이 주변만 눈이 녹아있길래 혹시나 해서 확인해본 건데...”

“그러고 보니...”

이 개울 근처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최근 연달아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 탓인 줄 알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보다.

라디가 우물거리던 주먹밥을 꿀떡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음... 담수에서 자라는 식물 중에 그런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어요. 광합성으로 얻은 영양분을 분해할 때 열기를 내뿜는다고... 저도 자세한 원리는 모르지만요.”

“그래? 그거 신기하네... 잠깐, 그러면 온수를 데울 때도 그 식물을 이용하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유용한 식물이 있다면 굳이 안 쓸 이유도 없을 텐데.

라디가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게 또 그렇게까지 편리하지만은 않은가 봐요. 수질에 상당히 민감해서 사육하기도 몹시 까다롭고 흐르는 물에서만 서식하는지라 설비를 갖추려면 매우 큰 비용이 들어간대요. 게다가 여름철에 자칫 대량으로 발생하면 사람들이 멋모르고 접근했다가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네요.”

“...하여간 이 세계는 적당한 게 없네.”

아니 꼭 이 세계만 그런 것만은 아닌가.

나 또한 아버지와 함께 오지를 탐험하던 중 페루 아마존에서 뜨거운 강과 조우한 적이 있다. 현지 부족의 샤먼에게 축복을 받은 뒤 밀림을 통과하자 정말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강물과 맞닥뜨렸다.

학자들은 지열을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던가.

신비로운 자연에 감탄하며 물 만난 연어처럼 헤엄치는 란이를 구경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한가하게 있어도 괜찮은 거야? 모험가들이 물가 근처는 늘 조심하라던데... 실제로 치료원에 실려 온 사람 중에는 냇가에서 다친 사람도 꽤 있었고.”

“뭐... 여긴 산짐승의 쉼터와도 같은 곳이니까. 그래도 겨울엔 대체로 안전한 편이야. 경비병도 있고.”

저 멀리 개미를 눈짓하자 녀석이 집게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리엘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다리를 쭉 뻗으며 미소지었다.

“도란이 있으니까 정말 든든하네... 다른 모험가들은 이런 건 상상도 못 할 거 아냐. 불침번도 필요 없고, 교대하며 휴식할 필요도 없고. 안 그래 라디야?”

“그렇죠. 보통 혼자서는 야영할 엄두조차 못 내니까요. 동료가 있어도 불침번 때문에 불화를 겪는 파티도 많고... 저도 이전에는 숙박비를 아끼려고 허름한 여관에서 자다가 금품을 도난 맞을뻔한 적도 있었어요.”

“다 고충이 있구나... 라디도 고생했겠네.”

“대신 그 덕분에 도란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요.”

라디가 사낭 쥐 귀를 쫑긋거리곤 새침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기대왔다.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뺨의 문양을 어루만져주자 녀석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더욱 체중을 실어왔다.

한데 옆에서 다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지만 말고 언니도 안기고 싶으면 솔직하게 표현해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스킨쉽도 못 했죠? 고작 손 한번 잡아본 게 다잖아요.”

“으... 그, 그래도...! 아직 그 이상은 조금 버겁다고 해야 하나... 이성과 가까이 지내보는 건 처음이라... 지금 이렇게 도란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거려서...”

아리엘이 도중에 말을 흐리고 두 귀를 붉히며 내 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새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교도를 도륙할 때도 개의치 않던 그녀지만 이런 일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 모양이다.

부끄럼타는 모습이 귀여워 살짝 짓궂은 장난을 치려던 찰나 이번엔 아래쪽에서 초롱초롱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왜, 란이야. 벌써 다 놀았어?”

“음... 배가 고픈 것 같은데요? 우리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허기가 졌나 봐요.”

“그래? 그럼 이거 한 번 먹어볼래? 이건 주먹밥이라는 건데...”

먹고 있던 주먹밥의 한 귀퉁이를 떼어내 주자 란이가 날름 집어삼켰다. 자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퍽 애교스럽다.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내려올 줄을 모를 정도.

처음엔 인간의 음식을 꺼리기도 했지만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적응해나가는 듯하다.

아직 편식하는 기미가 좀 있긴 하지만.

녀석은 열심히 맛을 음미하다가도 눈동자를 빛내며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리 위, 묵직한 질량을 과시하는 과실을.

­됴란! 됴란!

“으... 지금...?”

­됴라안!!

란이가 계속 보채자 그녀가 난처하게 나와 라디를 곁눈질했다.

우리는 어깨를 맞댄 채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래, 아리엘.”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마치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러게요. 꼭 마력 공급을 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남자 앞이라 죽을 것 같이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둘 다 지금 놀리는...”

­됴랴아아안!!

“아, 알겠으니까...! 도, 도란은 잠시 자리 좀 비켜줘...!”

“싫은데?”

“읏... 정말...”

아리엘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결국 란이의 간절한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얼굴을 토마토처럼 물들이고 외투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더니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녀석을 꼬옥 끌어안았다.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옷자락으로 몸을 가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보지 마.”

“싫어.”

“...부끄럽단 말야.”

“그래서 이러는 거 잘 알잖아.”

“.....”

보통 질투할 법도 하지만, 란이는 인간으로 따지면 아직 아기에 불과하니 별생각은 들지 않는다. 곧 중급 정령으로 성장하고 나면 완전히 젖을 떼는 날도 오겠지.

혹여나 윤곽이 비칠까 반투명한 운디네의 피부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손등을 톡톡 두드리는 감촉이 전해져왔다.

시선을 올리니 아리엘이 쥐구멍에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

“응? 뭐라고?”

“..­...”

“잘 안 들려. 좀만 더 크게 말해줘.”

그녀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이며 손바닥으로 내 귀에 가림막을 세우더니­

“그... 도란도.. 마력공급 해줄까...?”

“....!”

바로 품속으로 파고들자 아리엘이 황급히 내 얼굴을 밀어냈다.

“아, 아니...! 당장은 아니고...! 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그럴 각오가 들면...”

“얼마나.”

“으, 응...?”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데.”

“그, 그거야 그냥 자연스럽게...?”

그녀를 꼬옥 끌어안자 라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도란님이 돌킨 씨한테서 고급 입욕제를 받아왔었죠. 오늘 돌아가면 셋이서 목욕이나 같이 할까요? 저랑 도란님이 함께 들어간 적은 있어도 언니는 매번 도망치기만 했잖아요.”

“가, 갑자기...?”

“네, 이제 슬슬 두 분도 가까워지실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저 혼자만으론 도란님을 감당하기 버겁다고요.”

“.....”

아리엘은 갈팡질팡 시선을 굴리다 이내 푹 고개를 숙여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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